[하얀 국화] 이방인이 쓴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

하얀 국화_메리 릭 브락트

by 겨자씨앗


전쟁은 여자의 얼굴도, 인간의 얼굴도 하지 않았다.


만주와 몽골에서 볼 것 같은 티끌 한 점 없는 시퍼런 하늘 아래, 나는 도시의 퍽퍽한 길을 걷는다. 메마른 보도블럭 위엔 말라 비틀어진 지렁이가 널브러져 있다. 작열한 태양 아래 아무도 들리지 않는 소리로 신음하며 몸을 꼬아 수분이 몸속에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들어 갈 때까지 그들이 느꼈을 괴로움이 마치 그녀들 같다. 아직 매끈거리며 반짝이는 가운뎃손가락만한 지렁이 한 마리가 수많은 죽음의 행렬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나는 지렁이를 그늘진 흙 속에 옮겨주고 나뭇잎을 덮어준다. '너는 꼭 살아라. 꼭 살아서 생명을 이어가라.


<하얀 국화>는 ‘소녀상’ 이야기다. 책은 1943년과 2011년을 교차하며 '하나'와 '아미'의 두 자매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60여 년의 세월을 오가는 두 자매의 비극 속엔 외세 침략과 내전 가운데 벌어진 운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가운데 조국은 16살 난 소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한반도 끝자락 제주도에서 바다를 유영하며 당당하게 물질하며 해녀의 정신을 이어받은 피이건만 첫 피를 왜군에게 강제로 흘려야 했다. 다행히 하나의 동생 아미는 화를 면했지만 살아남은 자의 가혹함은 외세의 해방 뒤에도 여전히 찾아온다. 언니의 알 수 없는 생사, 아버지가 수소문하러 간 사이 물질해야 하는 어미는 한시도 아미를 자신의 눈밖에 두지 못한다. 노래도 웃음도 사라진 이 가정에 또 한 번 풍파가 닥친다.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아버지는 잔인하게 이웃의 손에 죽고, 어머니는 동족의 밀고에 죽는다. 아미는 제주에 기거하려는 명목으로 강제 결혼하게 된 남편에게 평생 마음을 내주지 못한 채, 아들과 딸마저 침묵으로 대하는 비운의 어머니가 돼버린다. 제주 항공 밑에는 어머니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이름 모를 사람들의 말라 비틀어진 지렁이 같은 비명이 있다. 비석조차 세워주지 못해 내륙을 넘나들지 못하는 아미의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작가 메리 릭 브란트는 재미 교포 2세다. 그녀는 서두 ‘작가의 말'에서 한국인들도 꺼내기 힘든 성노예 이야기를 한국인 어머니의 입이 아닌 런던 매체를 통해 알게 됐고, 끔찍하게 자행된 일들 앞에 아직도 제대로 된 정의가 구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알려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한다. 국제 사회는 범죄임이 분명한 증거와 증인이 있는데, 왜 일본 정부에 대하여 압박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강대국의 논리가 반영되는 것 같아 그저 피해국으로서 씁쓸하고 한스럽기만 하다. 이 작품은 치밀한 고증과 자료로, 객관적 시각에서 외국어로 쓰였고, 2018년 <가디언>과 영국 <보그>지가 주목해야 할 10명의 작가로 선정된 것에 대해선 참으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아무쪼록 외국에 더욱더 위안부에 대한 잔혹했던 실체와 생생한 참상을 다양하게, 널리 알려야 한다.


2019년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 감독의 ‘주전장’은 위안부 다큐멘터리다. 그 안엔 일본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은 아예 교과서에 삭제하거나 관련 자료를 말살했다고 한다. 일본의 이러한 태도가 역사의식과 선진국이라는 품격과 품위를 떨어뜨린다. 결국, 미래 세대에게마저 분노와 증오를 대물림하게 만들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백치 정신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8월 14일은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정부는 2017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국가기념일로 제정했다. 디지털 자료저장소인 ‘아카이브 814’도 둘러봤다. 사진 속 여인들이 하나와 겹쳐 끔찍하고 참담했다. 표정 하나 없이 자포자기한 듯 암담함이 밀려온다. 작가는 하나를 생지옥인 위안소를 탈출시켜 몽골에서 삶을 이어가게 하지만 만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여성들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하얀 국화>에선 하나와 아미를 둘러싼 주요한 역할을 하는 네 명의 인물이 있다.


첫 번째는 일본 장교 모리모토다. 하나는 모리모토의 일방적인 로맨스로 위안소를 탈출하게 됐고, 안심하고 거처할 몽골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잔인하고 처연한 이야기 가운데 일본 장교가 언뜻 하나를 구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일제강점으로 황국신민을 만들어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겨주었다는 어떤 주장처럼 민족과 조국을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갖다 댄 것과 같다. 하나가 느껴야 하는 굴욕 된 자유, 억압된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가 더는 하나와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을 때, 하나는 비로소 해방을 맞게 된다.


두 번째는 몽골 소년 알탄이다. 순수, 지극함, 열정, 성심성의를 다해 은근한 사랑을 표현하는 그를 통해 진정한 안도감과 해방을 맛본다. 알탄은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소중히 여기는 비단 허리띠를 하나에게 선물한다. 가장 곤경에 처했을 때, 모리모토에게 대들며 구해주려 했고, 러시아 군인들에게 잡혀 있을 땐 결국 자유를 하나에게 선물한다. 앞으로 알탄과 하나가 잘 될 것이라는 예감을 준다. 하나가 몽골에서 계속 지내게 될 것이라는 암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거리감을 준다. 조국에서 편히 쉬지 못하고, 끝내 가족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에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감정이 든다. 왜 작가는 하나를 몽골 땅에 두는 걸까. 아마도 한국에 온다는 것이 위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 이후에 있을 동족상잔의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을 예견해 하나를 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세 번째 인물은 아미의 남편 현모다. 그는 동족보다는 이념을, 진실을 왜곡한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조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고 가야 할 숙명이자, 운명으로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다. 그의 쓸쓸한 만년의 죽음 앞에, 한 번도 웃어주지 않은 아내를 보고 “사랑했다.”, “잘못했다”, “용서해줘"라는 말로 생을 마감하는 현모는 아미의 슬픔 만큼이나 그 역시 짊어져야 했던 마음의 무게와 고통으로 인생의 짓눌렸음을 보여준다.


네 번째는 이방인 레인이다. 미국인인 레인은 아미와 딸 윤희 사이에 깊은 간극을 이어준다. 윤희와 레인의 사랑은 아미가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미는 레인에게 수요집회를 참석한 진짜 이유-언니를 찾는 것-와 심장병이 있음을 털어놓는다. 하나와 아미의 비극은 더 이상 자신들만 움켜쥘 문제가 아니다. 아미의 아들과 딸, 레인이 수요집회에서 정의를 외치는 모습에 ‘하얀 국화'에 담긴 꽃말의 의미처럼 ‘진실과 감사, 성실함’을 잇는 희망을 보여준다. 왜 한국인이 아닌 이방인이 이런 가교 역할을 하도록 했을까. 이는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은 아닌가 싶다.


전쟁은 여성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준다. 하나와 아미가 느껴야 하는 수치심. 아미는 이렇게 표현한다.


“아미의 수치심은 한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스러질 동안 두 번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부끄러움, 목청껏 정의를 외치지 못한 부끄러움, 사는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부끄러움.


잘못한 것 없는 부끄러움. 죄의식을 일으키는 이 부끄러움은 한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네들의 수치심은 우리도 공범이며 공동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녀들이 살아서 증언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이것이 후손들이 되풀이하지 않으며 잊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작가가 하나에게 부여한 정신, 제 한 몸은 어쩌지 못하지만 늘 의식은 자유로웠던 점을 높이 산다. 하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것은 하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가 자신의 몸을 다시 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일 것이다.

“죽어야 한다면, 우물로 뛰어들어 죽기보다는 고향으로 돌아가느라 애쓰다 죽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그렇고 엄마의 엄마가 그랬고 내 동생이 그렇듯. 그리고 언젠가 내 동생의 딸들도 해녀가 될 거야. 난 언제나 바다의 여자였어. 너도, 그 어떤 남자도 나를 그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 수 없어.”


하나는 몽골에서 러시아 군인들에게 잡혔을 때 군용트럭에 있는 두 모녀에게 16살 자신의 사진을 전달한다. 나는 이 책에서 가장 클라이맥스로 이 장면을 뽑고 싶다. 잊지 말아 달라고.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라고. 외교적인 협력을 하고, 동맹국으로서 화합하되, 지난날 일은 잊어선 안 된다고.


일찍이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은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는 나무와 같은 존재다."


내면의 힘. 내면적 의식의 자유. 이것만은 손댈 수 없는 것이다.

양심과 생각과 감정, 마음껏 사유할 수 있는 정신. 이것은 인간만이 가진 신성하고 고유한 진리다. 인간이 가진 자유야말로 육체와 정신, 영혼까지 책임지는 존재의 역할을 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존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숭고함이다.


전쟁은 언제나 인간의 숭고함을 짓밟는다. 정치, 종교, 인종, 교육, 사회 전쟁은 인간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다. 우리는 이 땅에서 현재진행 중인 전쟁 범죄 앞에 침묵해선 안 되며, 좌시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언제나 숭고함을 짓밟는 행위들과 싸워야 한다. 숭고함은 존엄성과 같다. 존엄성은 영어로 dignity와 Sanctity의 의미가 있다. Dignity는 위엄, 품위, 자존감을 뜻하고, Sanctity는 신성과 성스러움을 의미한다. 인간은 품위 있는 성스러운 존재다. 누가 인간에게 이런 자격을 부여하는가. 인간의 숭고함은 인간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인 것이다. 인간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되는 천부적 권리는 헌법의 기초이며 상생의 원리가 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과 숭고함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가난과 계층과 불평등과 차별 가운데서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1943년 하나가 자유를 얻게 된 뒤, 몽골 후브스쿨 호수에 뛰어드는 장면과 2012년 아미의 딸 윤희가 엄마의 고향 제주도에서 돌아가신 엄마를 추모하며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이 맞닿아 있다. 세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이 장면은 진심으로 자유롭고, 진정으로 화해하며, 서로 보듬어 안아주는 화해를 보여준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여생만큼이라도 행복하시고, 편안하셨으면 한다. “그동안 너무 고생하셨다, 이제는 고국에서 편히 쉬시라. 아무 걱정 없이 국가가 모두 부담하겠다”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역사의 주인공들이 하나둘 사라져갈 때마다, 이 문제는 이제 마무리짓고 덮어두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상기시키고, 기억하여 다시는 어린 소녀들이 이런 설움을 당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위안부 할머니들께 조금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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