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없던 날

by 겨자씨앗

나는 세 남매 엄마다. 여태껏 세 아이 중 한 명이라도 내게 붙어 있었는데, 시댁 아버님 생신 차 들렀다가 “방학이다, 약속했다”며 “모두 자겠다”라고 성화다. 연로하신 어머님, 식사 준비도 만만찮을 텐데…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아이고 내가 먹는 거 숟갈 올리면 되지~ 걱정 말고 애들도 자유 좀 줘라.

그렇게 됐다. 아이들에게 2박 3일의 자유가 주어졌다.


일탈을 꿈꾸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청불 영화보기였다. [노트북]과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를 봤다. 영화 [노트북]은 시골 별장에 잠시 놀러 온 부잣집 갑부 딸이 목재 일을 하는 가난한 소년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진 후,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되는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다. 마지막 결말이 없었으면 그저 그런 영화인데 노년이 되어 겪는 비극이 이 영화의 가치를 높인다. 단 5분 동안만 자신을 알아보는 소녀를 위해 소년은 계속 그들의 과거를 들려준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오 사랑하는 노아~~”하며 얼싸안지만 찰나가 흐른 후, “다당신 누구세요? 왜 나랑 있는거에요? 사람을 부르겠어요. 아악악~~” 소리지른다. 우리는 같이 영화를 보며 만약 상대방이 저러한 상황에 있다면 어떡할 거냐고 짓궂게 묻는다. 나도 저럴 것 같아. 자주 찾아보고, 마음 아파하고, 그래도 부인 사랑해야지. 저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킹스맨 시리즈는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신조로 각 잡힌 슈트, 몸에 장착된 첨단 비밀 무기를 지닌 스파이들이 재치 있고 긴장감 있게, 잔인한 폭력을 유희적이고 장난스럽게 묘사하는 복고풍 첩보 액션물이다. B급인데 고급스러움과 중년 남성의 매력이 흠씬 묻어난다. 이번 작품은 첫 편 시크릿 에이전트를 더 거슬러 올라가 킹스멘 에이전시 창립 배경을 그렸다. 아서왕 전설에 이름을 딴 아서, 갤러헤드, 렌슬롯, 퍼시벌, 멀린이 누가 되는지 눈여겨보면 재미있다. 이런 조직이 실제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림자 정부], [그림자 경제]라는 책도 있듯이 권력자를 움직이는 배경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청불 영화를 본 후, 한 일은 맛있는 것 먹기였다. 다섯 명이 제대로 외식하려면 5만 원이 넘기 일쑤다. 보통 국수나 분식 종류는 3만 원 안에서 해결된다. 치킨도 두 마리는 사야 한다. 아이들 먹이고 샐러드 식당에서 둘이 먹는 경우도 많았다. 오늘은 초밥집에서 배 터지게 먹어봤다. 아이들을 포함한 외식값이 나와도 깨알 웃음이 나온다.


그다음은 둘만의 조용하고 고요한 차마시기다. 한쪽 뇌를 차지하는 아이들이 거슬려서 분위기 있는 찻집을 생각도 못한 지, 어언 8년째구나. 낯선 곳에서 디저트와 늘 마시던 차를 마시는 색다른 분위기는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한다.


집에 오니 고요하다, 깨끗하다, 정돈되어 있다, 먹을 것이 아직 축나지 않았다, 집중할 수 있다, 해야 할 일을 후딱 해치운다, 보고 싶은 TV를 마음껏 본다, 운동하러 마음껏 나갈 수 있다, 쑤셔대는 발 없이 잠에 든다, 아침에 잔소리할 필요가 없다, 조용하다, 정말 조용하다, 뛸 일이 없다, 아래층 층간 소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공부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뭐 하고 있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싸움 소리가 없다, 머리가 지끈지끈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밥 맛이 없어서 대충 때운다. 시간이 나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일들도 여전히 손에 잡히질 않는다. 함께 성경을 읽었는데 오늘은 심심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 밤마다 했던 가정둘레길 시간도 없다, 루틴이 깨진다. 뭘 해도 왜 재미가 없는지… 그렇게 의욕적이고 솟아오르던 사명감과 투철한 의지들이 공기 빠진 풍선처럼 매가리 없이.


전화기 너머 아이들 음성을 듣는다. 한글을 깨치고, 방학 숙제를 하고, 글을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할머니가 해준 브랜드표 감자탕과 미역국, 멸치와 나물,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는다. 예쁜 옷도 사줬단다. 신발은 괜찮다고 했단다.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포동포동 살이 올랐단다. 한 밤만 더~하고 외치는 아이들에게 그러라고 했다. 어머니는 내게 혼내는 남편과 야당이 되어 늘 아이들을 감싸안는 역할을 하라고 당부한다. 자유를 주었으니 모든 것이 달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하루 더, 싱겁지만 고귀한 자유를 선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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