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의 나는 나서서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데, 술을 마시면 수다쟁이가 된다. 술이 한 잔 두 잔… 다섯 잔쯤 들어가다 보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온다. 평소 하지 못했던 얘기를 하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생각만 해왔지만,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내 생각을 말하기도 한다.(술 깬 후 이불 속 로우킥은 덤)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지만, 내일이면 생각나지 않을 이야기들일 수도 있지만, 알코올을 빌린 인간관계를 통해서 위안을 얻는다. 대화를 통해 힘을 얻는다.
요즘 술자리에서 나의 패턴은 비슷하다. 한잔만 하자고 했던 술자리가 몇 시간이 흐르고, 넷 중 한두 명은 하품을 하기 시작하고, 나는 술이 점점 취하는 건지 깨는 건지 모른 채로 말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맞은편에 아직 전사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붙잡고 한참을 떠든다. 술자리에서 대화의 주제는 매년 조금씩 바뀐다.
어렸을 적엔 돈, 결혼, 직장 이야기가 주였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육아,부동산, 주식, 교육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가 되었다. 하지만 이건 술에 취하지 않을 때도 늘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한마디로 술자리에서까지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건 별로다.
그렇다고 우리 삶에서 그런 문제들을 빼면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과 달리 할 이야기는 없긴 하니 늘 빠지지 않는 주제들이다.
그래도 가끔 핀트가 나가면, 혹은 술이 많이 취하면 가슴 속 깊은 곳에 있었던 본심 세포가 나오곤 한다.
이상주의자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이상주의자가 맞으니까) 그냥 현재를 행복하게 살고 싶다.
사람 일은 모른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1년 안에 죽을지도 모르는 게 사람의 인생이다. 물론 살자는 뜻은 아니다. 나에겐 가족,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들보다 먼저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될 날이 온다면 그 순간에 지나간 날들에 대해 뼈아픈 후회는 하고 싶지가 않다.
이만하면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봤다. 잘 살았다. 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근데 참, 이게 평소 혼자 생각만 하면 좋은 나의 인생 모토를 술을 취하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들어야 하는 게 문제다.
그 점은 쪼끔 미안하게 생각한다. 뭐 어쨌든 그래도 그게 알코올이 들어갔을 때 나의 매력(혹은 진상이라고도 불린다.)이 아니겠는가?
술이 있어서 때론 너무 진지한 이야기를 가벼운 듯 이야기할 수도 있고, 20대 때로 돌아간 듯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도 있다.
얼마전 친하게 지냈던 이웃이 일본으로 이민 간 지 2년 만에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 우리를 주려고 갖고 들어온 위스키 한 병으로 신랑은 상당히 많은 잔의 하이볼을 생성(!)해냈다.
2년 만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을까도 걱정했지만, 그 공백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일단 알코올부터 한잔 들이키고 시작했던 것에 상당한 지분이 있지 않을까? 내 관심사든 아니든 간에 어떤 이야기라도 즐겁게 얘기하고 들어주는 사람들, 시답지 않은 주사에도 호응해주는 사람들, 다음 날 아무 이야기도 못들은 척 해주는 사람들이다.
그나저나 이제 술에도 칼로리가 표기된다고 하는데, 그걸 보고서도 박스채 사게 될지 모르겠다. 음, 사실 아마도 별 영향은 주지 못할 듯하다. 알코올이 주는 재미와 의미는 포기하기가 힘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