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놓치다

다른 기차가 있다는 선택지를 몰랐다.

by 신재현


여행의 중반쯤 되자 나는 더 이상 주문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어느 순간부턴 무언갈 해야 한다는 압박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완전히 없앨 순 없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어떤 깨달음이나 놀라운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생각을 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경험도 있는 거다. 그냥 돌아다니는 여행도 있을 수 있는 거다.


돌이켜보면, 나는 회사를 다니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건 아마 내 문제였을 수도 있고, 시스템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아마 둘 다였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냥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비엔나와 잘츠부르크를 지나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에 들렸고, 두 번의 야간열차를 탔다.


맛있는 맥주를 마시고 많은 음식을 먹었다. 하루에 2만보씩 걸어 양말에 모두 구멍이 나 새로 사야 했다.



베를린에선 인종차별(장소가 절묘했다. 유대인 박물관 근처였다.)을 얼마간 당했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약탈당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는 걸 봤다.


친구들과 가족에게 엽서를 보냈고 유쾌한 사람들을 만났다.



프랑크푸르크에선 소시지를 많이 먹었고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뒤셀도르프에서 한 번 환승을 해야 했는데, 방송을 못 들은 탓에 플랫폼이 바뀐 걸 몰랐다.


뒤늦게야 플랫폼이 바뀌었고, 기차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혼비백산했다. 지금까지 여행은 어쨌든 큰 틀에서의 계획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비상상황(?)은 처음이었다.


뒤셀도르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기차가 하루에 몇 개나 있을까. 어떡하지. 예약해 놓은 숙소는. 기차는...


갑자기 계획대로 안된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갑자기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심지어 주말이라 관광안내센터도 거의 다 닫은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안내센터를 발견한 건.


나는 반쯤 울먹이며 직원에게 기차를 놓쳤다고 말했다. 직원은 울상인 내 얼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종이를 한 장 건넸다.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다른 기차 정보였다.


원래 가려던 루트랑은 완전히 다른 루트로 가는 정보였기에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표는 어디서 사나요?


직원이 말했다. 그냥 타세요. 그리고 검표원이 물어보면 사정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기차를 타는 내내 역무원이 표를 검사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고 난 종이에 적힌 대로 잘 갈아타 무사히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그렇다.


기차를 놓치더라도 다른 기차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면 된다. 그 간단한 사실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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