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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한 Nov 30. 2021

그날 밤, 응급실에서 일어난 일

육아차차 육아 육아 #26

    아들이 다쳤다. 놀이터에서 놀다 기구에 부딪혔는데 그만 이마가 좀 찢어졌다. 아주 심각하진 않아도 흉을 걱정해야 할 정도는 됐고, 마침 공휴일 저녁이라 바로 근처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갔다. 서둘렀지만 휴일의 응급실엔 사람이 꽤 많았다. 당연히 긴 기다림이 예상됐는데 그것은 단순한 인원의 수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매우 그러했다. 한 번 둘러보니 아무리 내 아들이지만 객관적으로 그리 위급해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기존 인원만 해도 그러할진대, 호흡 곤란이나 어지러움, 혹은 각종 심각한 외상환자들은 도착 순서에 상관없이 먼저 입장하였고 자연스레 기약도 없이 순번이 밀리기만 했다. 

    결국, 처음 도착 당시의 대다수가 진료를 위해 들어가고, 그 뒤에도 두 대 정도의 구급차에 우선순위를 내어준 뒤에야 아들은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치료를 마치고 집에 오니 시간은 거의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고, 그만하기 다행이라는 안도와 약간의 허탈함에 금세 몸이 노곤해졌다.


    응급실이라는 곳은 말 그대로 응급한 정도가 기준이라 도착 순서 여부와 상관없이 진료가 이뤄진다는 걸 몸소 체득하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 비록 머리로는 이해해도 막상 하릴없이 순서가 밀려나니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하여간 응급실에 그리 자주 갈 리는 없으니 이만하면 다행이다 하고 넘기려는데,

    불과 일주일 뒤 저녁 비슷한 시각, 딸에게 문제가 생겼다.

    심각한 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종종 발생하는 가벼운 두드러기라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딸이 원래 과하게 건강한 아이라는 게 문제였다. 평소 특별한 알레르기가 없던 녀석이 벌겋게 올라오니 오히려 더 걱정이었다. 급한 대로 집에 있던 코감기약을 먹이고 좀 지켜보려는데, 발진이 목을 타고 뺨까지 올라오는 게 아무래도 안 될 성싶었다. 바로 옷을 갈아입히고 짐을 챙겨 다시금 응급실로 향했다. 

    두 번째라 모든 게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접수처 근처에 내린 아내가 딸을 데리고 미리 증상부터 말하는 동안 난 멀지 않은 곳에 주차했다. 물론 빨리 접수를 한다고 먼저 진료가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서둘러보자 싶었다. 마침 주차를 하고 들어가 보니 지난주보다는 훨씬 적은 인원만 있었기에 뭔가 부산 떤 보람도 있었다. 그런가 했다만, 반색하는 내게 방금 직전에 소아과 환자가 들어가서 오늘도 적잖이 오래 걸릴 거라며, 아내가 비관적인 전망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그에 맞추어 움직여야 했다. 코로나 상황이라 모두가 대기실에 오래 있기 어렵다는 건 이미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곧바로 플랜 B를 가동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곧장 차에 가서 기다리고 대표로 나만 남아있기로 했다. 그 와중에 챙겨 온 간식과 아이패드라면 기다림이 길어지더라도 한결 나을 터였다. 우린 마치 응급실에 오기 위해 항상 준비했던 사람들처럼 각자 기다림에 최적화된 상태에 임했다. 

    나는 대기실에 홀로 남은 한 마리 미어캣이 되어 속속 도착하는 다른 응급 환자들의 상태 경중을 따져봤다. 심심하기도 했지만, 사실 상황 파악이 주목적이었다. 아들은 외상이라 다른 외상환자에게까지 순서가 밀렸지만, 딸은 아이들만 오지 않으면 터무니없이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어린 응급 환자는 오지 않았고 조금씩 희망이 커지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서서히 긴장이 풀리던 바로 그때, 저 멀리서, 너무도 태연히 걸어오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네댓 살쯤 됐을까. 울거나 칭얼거리지도 않았고 심지어 안긴 채 실려서 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엄마 손을 붙잡고 자기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올 뿐이었다. 순간 속이 복잡해졌다. 당장 보이는 아이의 상태로선 딸의 순서에 영향을 줄 거 같진 않았다. 눈에 띄는 외상이 없거니와 상태도 좋아 보이는 게 크게 위급한 건 아닌 듯했다. 그런데 어딘가 불안했다. 이 늦은 시간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응급실에 올 리는 없으니까. 아이의 방문 목적을 알기까지는 맘을 놓을 수 없었다.

    마침 아이의 사연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고, 그 직후 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나 멀쩡해 보이는 아이가 우리 딸보다 위급하다는 걸, 우선순위에서 앞서는 ‘응급 환자’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딸의 증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막막한 마음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금 애기 한 명 새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우리보다 먼저 순서가 될 거 같아.”

    

    “응? 왜? 뭐가 심각해?”


    “어. 적어도 우리보다는 급할 거 같네. 딸은 좀 어때?”


    “이제 약 기운이 올라오는지 한결 나은데? 얼굴은 거의 가라앉았어.”


    “그래? 그럼 잠시만 이리로 보내볼래?”


    두 주 연속으로 응급실에서 마냥 기다리고 싶지가 않았다. 마침 아이가 호전됐다 하니 더 그랬다. 이내 아이가 대기실로 들어왔는데 확실히 나아져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조심스레 대기실 담당 간호사분께 알은체했다.


    “이런 경우 많이 보셨을 거니까 좀 봐주시겠어요? 사실 출발 전에 코감기약을 먹였더니 어느 정도 가라앉은 거 같아서요. 이 상태면 꼭 진료 안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사실 코약이나 두드러기약이나 비슷해서 그럴 거예요. 확실히 많이 나아진 거 같기는 한데…”


    간호사 선생님 눈에도 접수 당시보다는 많이 호전돼 보였는지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다만 만약의 경우를 고려한 듯 조심스러운 태도는 분명했다.


    “근데 목 주변에 발진이 남아있어서 진료 한 번 보고 가시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저희가 사실 지난주에도 늦게까지 있었거든요. 방금 온 아이 보니까 아마 순서도 밀릴 거 같고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방금 온 어린 환자를 언급하자 어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대꾸했다.


    “아마 저 아이는 소아과로 가진 않을 거 같아요. 순서가 바뀌거나 하지는 않을 거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아닙니다. 누가 봐도 저 아이가 급한데요. 순서는 상관없는데 괜히 별로 안 심각한 저희 때문에 다른 급한 분이 진료 밀릴까 봐 그러죠, 뭐.”


    이미 지친 상태인 데다 막 도착한 어린 환자의 위중함을 듣자 어딘가 더 진이 빠져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콧물 시럽 정도로 다스려지는 아이의 두드러기가 이 장소, 이 시간과 어울리지 않아 보여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그렇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까, 정 그러시면 안에 상황 보고 선생님 잠깐 나오실 수 있는지 제가 알아봐 드릴게요. 또 다르게 생각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감사하게도, 얼마 후 소아과 담당 선생님이 잠시 나오셨다. 딸아이의 상태를 보더니 약이 잘 들은 거 같다며 굳이 당장 주사 맞고 갈 게 아니라면 가도 될 거 같다고, 병원은 내일 낮에 가도 충분할 거 같다고 하셨다. 더 고민할 게 없었다. 접수는 취소하고서 모두가 차로 돌아왔다. 서둘러 주차 정산을 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어딘가 지긋지긋한 게 얼른 벗어나고만 싶었다. 진저리치는 나를 보던 아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애는 왜 응급실로 온 거야?”


    “아, 그게.”


    갑자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돌이킬수록 기가 막힌 사연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진짜 ‘응급’ 환자였다.     


    “애가 코에 구슬을 집어넣었는데, 도무지 그게 안 빠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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