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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Apr 07. 2024

화창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주는 선물

: 쇄서포의(曬書胞衣)

글 김주현, 그림 강현선, 『책 너는 날』(사계절, 2020)




파란 하늘은 높고, 하얀 구름은 뭉실뭉실 떠다니는 햇볕 좋은 나른한 오후다. 



좋은 이 날씨가 아까워 사람들은 마당에 책을 널기 시작했다. 기와집 대감댁 마당에도 가난한 선비집 마당에도 똘이네 초가집 마당에도 햇살을 쫓은 책들이 널려져 있다. 이불을 널고, 고추를 널고, 도마와 행주 그리고 그릇까지 모두 줄을 맞춰 마당에 세워 놓는 가운데 책도 있었다.      





장마에 눅진해진 책 속에 책벌레들이 생겨난 대감님의 책, 하얗고 말끔한 책장 너머 모기 잡은 자국만 있는 대감댁 도령의 책, 한 장 한 장 널어놓은 책장이 마음을 풍성하게 해 주는 가난한 선비의 책이 모두 햇살 아래 누워 있다. 그리고 어머니 몰래 천자문 책을 팔아서 먹을 것 사 먹은 돌이는 뱃속에 책이 있는 것처럼 자신의 배를 드러내고 평화로운 햇살 아래 벌러덩 누워 있다. 



책이라는 것이 한 번 보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보고 또 봐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 같고, 책에 적혀 있는 그 내용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뿌듯함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부모는 책을 통해 자식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아이들은 책 보는 것이 별로 재미없어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렇게 책을 햇볕에 쪼이고 바람을 맞히는 일을 쇄서포의(曬書胞衣)라고 했다고 한다. 음력 7월 7일 칠석에 했던 우리의 세시풍속이다. 쇄서포의를 줄여서 포쇄[曝曬]라고도 하고, 바람을 쐰다 하여 거풍(擧風)이라고도 한다. 책에 한정해서 포서[曝書]라는 말도 많이 썼다고 한다. 



대감댁, 선비집, 돌이네 등 집의 모습처럼 그 계층은 모두 다르지만, 날씨 좋은 날 책을 너는 모습은 같았다. 한지로 책을 만들던 시절이니 습기나 책벌레로 어떤 책이든 쉽게 망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햇살과 바람으로 살균하고 점검하여 다시 건강한 책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마치 책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당에 널려 있는 책의 모습은 한 권 한 권, 한 장 한 장 놓이는 그 손길이 조심스럽게 느껴져 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늦여름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여유 있게 다가온다. 하얀 바탕에 찍어 놓은 푸른색과 파란색이 눅눅한 물건들을 바짝 말려주는 듯해서 쾌적하게 느껴진다. 



햇살과 바람 아래 뉘어진 책들은 쿰쿰했던 냄새가 고소하게 바뀌고, 무겁고 축축하던 질감이 가볍고 빳빳하게 바뀔 것 같다.



종이로 만들어진 책이 점점 사라지는 요즘, ‘책을 넌다’는 말이 생소하기도 하면서도 정감 있게 다가온다. 전자 도서의 편리함도 있지만, 손으로 만지는 물성도 책 속에 적힌 글과 그림 못지않게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는데 점점 그 점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안타까운 면이 있다. 



읽지도 않고, 버리지도 못한 채 책장 안에 묶여 있는 나의 책들에게 시선이 간다. 몇 년 동안 꼼짝 안고 경직된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많은 책들도 햇살 아래 선선한 바람을 느끼게 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 옆에 누워 한가로운 오후를 느끼고 싶다. 





<우리 아이의 한 마디>

나도 책이나 말려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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