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서’라는 맥스 예술의 시작
글/그림 데이비드 위즈너 『아트와 맥스』(2010, ㈜베틀북)
사막 한가운데, 도마뱀 한 마리가 캔버스 앞에 늠름하게 서 있다. 캔버스는 그 도마뱀의 모습과 느낌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도마뱀의 이름은 아서다. 아서는 LP판을 틀어 놓고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조용한 음악 속에서 자신의 그림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서의 진지한 눈빛 속에서 느껴진다. 그 분위기가 사막이라는 공간에 흡수되는 것 같다.
인간에게 황량하고 삭막하게 느껴지는 사막이 도마뱀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사막에 놓인 집 한 채가 그것을 대변해 주듯이 서 있다. 선인장 사이에 서 있는 아서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집 앞마당에 있는 것 마냥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인 것 같다.
평온하게 그림을 그리는 아서 뒤로 긴 꼬리를 흔들며 두 팔 벌려 정신없이 뛰어오는 도마뱀 한 마리가 있다. 맥스다.
맥스의 모습은 아서와는 대조적이다. 아서는 큰 체격에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고, 맥스는 머리는 갈색, 몸은 초록색이다. 맥스는 아서보다 작다. 시각적으로 아서가 일반적인 도마뱀의 느낌이라면, 맥스는 변종 같은 느낌이 든다.
차분한 아서 뒤로 맹목적으로 달려오는 듯한 맥스의 모습은 무슨 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과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기대감을 함께 갖게 한다.
금방이라도 아서의 그림을 뚫고 나갈 것 같은 기세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돌진해 오던 맥스가 그림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맥스는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아서에게 말했다. 아서는 방해만 하지 말라며 미술 도구를 맥스에게 빌려주었다.
하지만, 맥스는 자신이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몰랐다. 아서가 잘하는 것을 보고, 막연한 기대감에 따라 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 기대감이 가져다준 설렘이 곧 막막함으로 바뀐다. 그 첫발을 떼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그림이라도 그릴 것처럼 들떠 있던 맥스가 손에 붓을 꽉 움켜쥔 채 캔버스를 등지고 멀뚱멀뚱 서 있다. 빈 캔버스처럼 맥스의 머리도 하얗게 되었을 것이다. 방법은 모르겠고, 능력에 대한 확신도 없고, 금방 식을 것 같은 열정만 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신나게 들어선 미로에서 출구를 영영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상태일 것이다.
맥스는 아서에게 가서 묻는다.
‘저기, 아서? 뭘 그려야지?’
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아서는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을 던진다.
‘글쎄… 날 그려도 되고.’
맥스는 자신의 두려움을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했고, 아서는 맥스가 청한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시작’의 어려움이 있다. 알지 못해서 두려운 것도 있고, 너무 많이 알아서 두려운 것도 있다. 어떻든지 간에 막막하게 그 두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꼭 응원해 주지 않아도 툭 던진 나를 향한 누군가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는 엄청난 힘이 있다.
아서가 툭 던진 그 말에서 맥스의 예술 활동이 시작되었다. 맥스는 아서 몸에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맥스의 얼굴에 당황하거나 주저하는 표정은 없었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아서라는 대상에 자유롭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서는 화가 났다. 자신의 몸에 물감을 칠하는 맥스 때문에 아서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아서의 몸에 균열이 생기면서 아서를 둘러싸고 있던 피부가 산산조각이 났고, 그것들이 모두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서의 울퉁불퉁했던 도마뱀의 껍질이 사라지고 몽실몽실한 파스텔 톤의 속살이 드러났다. 솜사탕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그 질감의 속살에 맥스가 칠한 알록달록한 물감이 스며들어가 있었다. 아서의 몸이 부서졌다기보다는 낡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감춰놨던 아서의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난 것 같다.
아서의 몸이 선으로만 남았을 때, 아서의 조각난 껍질의 파편이 다시 아서의 몸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아서의 몸을 입체적으로 세워주었다. 맥스는 청소기로 물감이 칠해진 도마뱀 껍질의 파편들을 다시 아서의 몸에 넣어주었다. 아서의 몸은 다양한 색을 가진 작은 점들로 덮이게 되었다. 아서는 그런 자신의 새로운 모습에 만족했다.
아서가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만나기까지 맥스의 여러 가지 예술적 시도가 있었다. 맥스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입혀진 연기 같은 아서의 몸을 선풍기 바람으로 날려버리기도 하고, 건조해진 아서에게 물을 먹여 아서의 몸을 뒤덮고 있던 물감을 몸 밖으로 흘러 내려가게도 했다. 또, 맥스는 색을 잃은 아서의 몸을 한 올 한 올 실타래를 푸르듯이 당겨서 결국 아서의 몸이 사라지게도 만들었다. 그리고 맥스의 기억을 더듬어 그 실타래 같았던 아서의 몸을 철사처럼 휘어서 아서의 모습을 재현해 냈다.
다시 태어난 아서는 새로운 모습으로 색다른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어 냈다.
아서와 맥스는 예술이라는 것이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캔버스 위에 대상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만이 예술이 아니라, 자유롭게 표현해 내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예술은 작가의 느낌을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에게 함께 느끼자고 손짓하는 것인가 보다. 대중은 그것을 자신의 상황과 자신의 모습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맥스의 예술은 자신만의 느낌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소통을 통한 공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남들과 다른 차별성을 인정받는 것이 창의력일 것이다. 그것이 맥스를 더 자신 있게 만들어 냈을 것이다.
자신을 자신답게 드러내고 인정받는 것은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되는 것 같다. 그 힘이 자신을 스스로 믿게 만들어준다. 그것이 켜켜이 쌓이면 자존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서도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믿는 자존감의 뿌리가 튼튼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모습이 변한다고 해서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변화도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창의성을 표현할 수 있는 그 시작과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자존감이 중심을 잡아주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과정 속에서 인정을 받는다면, 자존감은 더 커지고 단단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