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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Oct 05. 2020

한 폭의 치마 속에 펼쳐지는 세상

좀 더 멀리 그리고 넓게 치마가 펼쳐지기를 바라며

*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치마』(2018)

    글, 그림: 명수정(글로연)



이 그림책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확하고, 표현이 아주 흥미로운 그림책이다. 한국화 같은 그림 속에 잔다르크 같은 동화 속 여자 아이들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꿈을 활짝 펴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그림책의 작가는 이 그림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저는 자신의 치마가 활짝 펼쳐지길 바라는 여자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각 대륙마다 찾아보고 모아서 이 책의 활짝 펼쳐진 치마들 곳곳에 수놓았습니다. 제가 모아놓은 이야기들로 인해 여자아이들은 더 활짝 자신의 치마를 펼치고 남자아이들은 여성에 대한 보다 더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함께 꿈을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분명히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고, 결국에는 모든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마음으로 씩씩하게 자신의 치마를 마음껏 펼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그 날이 오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작가의 이 말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아직도 여자와 남자는 동등한 위치에 있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치마는 여전히 여자의 전유물인가?’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보았다. 동시에 이미 그림책 속의 주인공들의 나이를 지나선 40대 여자인 나는 그 동화 속 여자아이들의 투쟁 아닌 투쟁이 무지개 빛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을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노력의 성과로 나타난 작은 변화들이 앞으로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려야 남자와 여자가 동등해질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녀평등을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사회적 지위가 동등해지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큰 틀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정치 참여다. 참정권의 남녀평등은 남녀평등의 의미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7-18세기 시민혁명으로 절대주의가 붕괴되고 민주주의가 대두되었다.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이 주어졌지만, 여성은 그 모든 국민에 속하지 못했다.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된 것은 20세기였다. 이것마저도 여성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국가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선봉에 서 있는 미국조차 1920년에 이르러서야 21세 이상의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획득하였다.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따른 아시아와 아프리카 독립 국가들의 흐름에 따라 1948년 제정헌법에서 남녀의 평등한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실제 우리의 생활에서도 남녀의 평등이 존재해 왔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다’ 혹은 ‘모르겠다’ 일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성에 따른 역할 분담은 공평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어딘가에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면 누군가의 희생이 따라야 하는 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를 나눠서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남녀평등에 대한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받은 기억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개념 혹은 역할을 집안에서 제일 먼저 배운다. 그래서 집안이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이라면 여자의 한계는 자라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집안이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와 여자라는 선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자동적으로 ‘나는 여자입니다’ 혹은 ‘나는 남자입니다’라는 전제조건이 툭 튀어나와 자리를 잡아버린다.


학교에서는 학습과목들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진다. 남학생들도 가정 과목을 배우고, 여학생들도 기술 과목을 배운다. 교련시간에 남학생은 총검술을 배우고 여학생은 응급치료를 배운다. 이렇게 수업시간에 배우는 것으로 남녀평등을 이해하고 남녀평등이 실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것은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남녀 역할을 구별 짓는 것이 의미 없다는 생각에는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남자와 여자의 평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만한 기회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이런 면에서 이 그림책은 아이들이 주로 보는 그림책에 ‘주체적인 여자,’ ‘꿈이 있는 여자,’ ‘행동하는 여자’ 등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 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그림책을 4가지 면에서 흥미롭게 보았다.


첫째, 이 그림책을 끌고 나가는 주요 색깔이 빨간색이라는 것이다.


단발머리를 하고, 주름치마를 입고, 빨간 구두를 신은 아이가 만나는 세상을 향해 “당신의 치마가 세상 끝까지 펼쳐져?”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 여자아이는 하얀 바탕 위에 빨간색 선으로만 그려졌다. 하얀 바탕은 순수하고 깨끗한 아이의 마음으로 어떤 색깔로도 입혀질 수 있는 것을 표현했고, 이 하얀 도화지 위의 빨간선으로만 여자아이를 그린 것은 여성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다시 말해, 빨간색은 여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그림책의 그림의 많은 작품이 한국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그래서 검은색으로 주로 표현하는 것이 한국화의 느낌이 더 살았을 것 같다. 그런데 빨간색으로 표현한 것은 시각적 텍스트의 상징화 같았다. 그리고 그 상징은 바로 이 그림책의 주제인 ‘여성’으로 연결되었다. 따라서 나는 여성의 월경을 빨간색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했다.


여성의 월경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생리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검은 비닐봉지 안에 싸주는 생리대처럼 감춰야 하는 것에 익숙한 단어다. 그래도 요즘은 월경을 시작하면 주변에서 축하해 주기도 하지만 이런 문화가 생긴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빨간색이 이 그림책의 전체적인 그림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둘째, 각자의 위치에서 갖는 만족에 따른 희망적인 메시지이다.


여자아이는 자연 속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모두 그들의 치마가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지에 대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때마다 여자아이는 그렇지 못하다는 단호한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그 대답 뒤로 그들은 자신만이 느끼는 혹은 바라는 것들을 희망적으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들이 가진 치마는 세상 끝까지 펼쳐지지 못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있는 현재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


꿀벌은 자신의 향기는 멀리 퍼질 것이고, 개구리는 자신의 치마로 비를 피할 수는 있다고 한다. 꽃송이는 꽃병의 치마 속에서 자신이 활짝 피어날 수 있고, 무당벌레는 포도 같은 열매가 자라고 나면 자신의 치마는 햇살처럼 환하게 빛날 것이라고 했다.


새는 바람이 불면 자신의 치마가 세상 끝까지 펼쳐지는 기분이 들고, 개미는 자신의 치마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멋진 꿈을 꿀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종탑 위에 앉아 있던 부엉이는 자신의 치마로 종소리가 세상 끝까지 펼쳐질 것 같고, 호랑이는 자신의 치마에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세상 끝까지 펼쳐질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


오리는 자신이 가는 곳까지는 자신의 치마가 펼쳐질 것이고, 물고기는 커다란 물결이 치면 세상 끝까지 자신의 치마를 펼쳐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달은 자신의 치마가 세상 끝까지 펼쳐지지 못해도 기분은 좋다고 한다.


여자아이는 꿀벌, 개구리, 꽃송이, 무당벌레, 새, 개미, 부엉이, 호랑이, 오리, 물고기, 달처럼 자신도 자신만의 치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자신만의 치마를 만들었다. 그 치마는 우주 공간 속에서 이 지구를 다 품을 수 있는 치마였고, 그 치마 속에는 동화 속 씩씩한 여자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여자 아이는 그들의 대답에서 자신의 치마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용기가 생겼다. 그림책 밖에서 그들을 보고 있던 나조차도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안의 있던 ‘가능성’ 혹은 '열정'이었다.


셋째, 동화 속 여성 캐릭터를 찾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책에는 그림마다 품고 있는 여러 나라의 이야기가 있다. 모두 24개의 이야기로, 주인공은 모두 치마를 입은 여자 아이다. 그들은 주체적이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들이다.


이 그림책에는 프랑스의 ‘아홉 명의 형제와 누나,’ 스위스의 ‘알프스 소녀 하이디,’ 캐나다의 ‘종이 봉지 공주’와 ‘어머니 이맙 우크아’, 캐나다의 ‘빨간 머리 앤’, 중국의 ‘푸른 장미’와 ‘뮬란,’ 그리스 섬과 몰타의 ‘못난이 거인,’ 아르헨티나의 ‘마팔다,’ 아일랜드의 ‘리니 왕자,’ 영국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해리포터,’ 인도의 ‘영리한 공주,’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가져온 거미 아난시의 아내 아소,’ 노르웨이의 ‘더벅머리,’ 한국의 ‘박씨부인전,’과 ‘바리공주,’ 북아메리카의 ‘하늘 여자,’ 오세아니아의 ‘모아나,’ 미국의 ‘겨울왕국,’과 ‘오즈의 마법사,’ 북유럽의 ‘해의 동쪽 달의 서쪽,’ 시베리아의 ‘달과 소녀,’ 스웨덴의 ‘말괄량이 삐삐’의 주인공이 이 그림 속에 등장한다.


이미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도 있지만, 생전 처음 들어본 이야기가 더 많았다. 전 세계 곳곳의 이야기를 품으려는 작가의 노력이 느껴졌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게 치마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이야기를 찾는 재미가 있다.


넷째, 한국화 같은 분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치마들이다.


그림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어디서 본 듯한 한국화 한 점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실제로 작가는 우리의 동양화에서 그림의 모티브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다음 7편의 그림에서 한국화의 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첫 번째로는 꿀벌이 사는 치마인 국화를 보면 신사임당의 <국화>가 떠오른다. 작가는 신사임당의 <국화>에서 국화 꽃잎을 표현한 방식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봐도 디자인적으로 훌륭하게 다가와서 이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어왔다고 한다. 그 꽃잎을 표현한 방식이 그림책에도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그 노란 꽃잎 하나하나의 국화꽃이 따뜻하게 꿀벌을 품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림책 속에 표현된 국화
신사임당의 <국화>


두 번째 한국화는 강세황의 <향원익청>이다. 향원익청이란, ‘향기는 멀수록 맑다’라는 뜻이다. 이 그림책에는 개구리 치마가 연꽃으로 표현되어 있고,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져 있다. 이 다양한 색깔이 연꽃의 향기가 멀리 맑게 퍼지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림책 속에 표현된 연꽃과 연잎
강세황의 <향원익청>


세 번째는 정선의 <인곡유거>이다. 실제로 그림 속 저 집은 정선이 노년에 지냈던 곳이다. 그림에서 노년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여유로움이 그림책에서 새가 앉아 있는 버드나무에 전해지는 것 같다. 새는 부드럽게 축 늘어진 버드나무 위에 여유롭게 앉아 있다.  


그림책 속에 표현된 버드나무
정선의 <인곡유거>


네 번째는 김홍도의 <산사귀승도>를 모티브로 삼았다. 작가는 자기 그림에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인 집의 지붕을 자연이 아닌 치마를 소재로 하여 넣고 싶었다고 한다. 숲 속에 있는 종탑은 펼쳐진 치마처럼 해 질 녘의 노을을 한 아름 품고 있고, 부엉이는 그 위에 앉아 있다. 이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시끄럽지 않고 은은하게 퍼져 나갈 것 같이 이 모습이 평화스럽게 느껴졌다.


그림책 속에 표현된 집의 지붕
김홍도의 <산사귀승도>


다섯 번째는 호랑이가 폭포수가 흘러대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그림은 정선의 <금강내산>과 김홍도의 <구룡연>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림책의 이 그림은 비단 두 개의 한국화가 아니더라도 다른 산수화에서 많이 보았던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산의 모습과 호랑이의 조화는 모두 한국적이어서 익숙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부드러운 빨간 산등성이 위에 검은색 호랑이는 더 위엄 있게 느껴졌다.


그림책 속에 표현된 산의 모습


정선의 <금강내산>


김홍도의 <구룡연>

                                               

여섯 번째는 정선의 <망양정>으로, 물 위를 여유 있게 떠 있는 오리가 있는 그림의 모티브가 되었다. 정선의 <망양정>은 <<관동명승첩>> 중 하나이다. 이 그림에서 바다와 파도를 묘사하는 방식이 서양의 표현법과 확연히 차이가 나며, 중국과 일본의 것과도 그 느낌이 다르게 작가에게 다가왔다고 한다. 작가는 우리의 옛 그림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림책 속에 표현된 물
   정선의 <<관동명승첩>> 중 <망양정>


일곱 번째는 달빛이 비치는 것을 치마 한 폭으로 표현한 그림을 김홍도의 <추성부도>이다. 구양수가 전하고, 김홍도가 표현해 내고자 했던 노년의 비애와 죽음을 앞둔 마음을 이 그림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가을밤 교교히 빛나는 아름다운 달빛 아래 호리호리하고 신비로운 나무들의 형태와 움직임을 보았다고 한다.


 

그림책 속에 표현된 달빛
김홍도 필 추성부도


작가가 밝힌 한국화를 모티브로 삼은 7편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또한 나는 무당벌레의 치마인 포도 그림을 보고서는 신사임당의 <포도>를 떠올렸다. 포도 열매의 탐스러움 닮아 있다.


그림책 속에 표현된 포도
신사임당의 <포도>


그림책의 그림을 한국화와 비교해서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한국화를 통해서 그림책의 그림을 다시 한번 보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위와 같은 4가지 흥미로운 것들에 집중해서 그림책을 살펴보면서 나는 그림마다 그려진 치마가 품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그 치마 밖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 치마 밖에 있는 것이 현재까지는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여자의 한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여자들이 자신의 치마를 세상 끝까지 펼쳐볼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힘만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여자인 내가 나의 치마를 세상 끝까지 펼쳐 보려면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돕는다는 명분 아래, 나 때문에 희생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것이 다행일 것 같다.


특히, 여자가 결혼을 하면 그 여성성은 강하게 나를 조정한다. 결혼을 하면 마치 내가 숨겨 놓았던 ‘여자’라는 카드가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는 것 같다. 일단, 나는 시댁이라는 또 다른 집안이 생기고, 그 집안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나’라는 존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또 다른 내 모습으로 ‘나’를 만들어내야 한다. 시댁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내가 어떤 며느리이고, 어떤 아내이고, 어떤 엄마인만을 판단한다. 이것이 시댁이 나빠서가 아니라, 어느 시댁이든지 가지고 있는 당연스러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더 서글프다.


그래서 나는 이 치마가 세상 끝까지 펼쳐지지 않아도 여자 아이가 자연 속에서 만난 친구들이 자신의 치마에 만족하는 모습을 공감했고, 그 모습에 위안을 받기도 했다. 내 치마가 세상 끝까지 펼쳐지지 않아도 나로 인하여 내 가족이 행복하고, 성장한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해도 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등바등하지 말라고 나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내 치마의 폭을 더 넓혀서 많은 것들을 품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치마폭을 넓힐 수 있으니 힘을 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의 내 치마가 세상 끝까지 펼쳐지도록 기대만 하기보다는 내가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나는 앞으로의 세대가 점점 그 치마폭을 넓힐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들어주고 응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세대의 변화가 새로운 세대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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