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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Feb 15. 2021

‘알몸’과 ‘학교’가 들려주는 이야기

: ‘자유’와 ‘자존감’이라는 종착지

『알몸으로 학교 간 날』(2012)

: 글/ 타이-마르크 르탄, 그림/ 벵자맹 쇼, 옮긴이/ 이주희(아름다운사람들)


『알몸으로 학교 간 날』이라는 제목이 나에게는 파격적이었다. 나는 ‘알몸’이라는 것보다는 ‘학교’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에 먼저 눈길이 갔다. 학교는 몸과 마음을 훈련할 수 있는 곳이고, 지식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배우는 곳으로, 가장 평범하고 일반적인 상식이 지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안을 삐딱하게 들여다보면, 학교에서는 규칙을 지키며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창의적이고,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한다고도 한다. 통제 속에서도 자유로움을 느끼고, 정해진 정답 속에서도 열린 사고를 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통제와 정해진 정답이라는 틀이 우리에게 자유와 다양성을 더 갈구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학교라는 공간이 '알몸'이라는 것이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학교를 ‘알몸’으로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알몸’이라는 설정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많은 것들의 시작은 사람들의 시선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알몸’이라는 단어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입해 보면, 예술의 영역이 아닌 대부분의 상황에서 튕겨져 나오는 단어일 것이다. 분명 뭔가 숨겨져 있는 심오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이 그림책을 읽고 또 읽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나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 그림책에는 피에르, 마리, 피에르 아빠, 피에르의 학교 친구들, 피에르의 담임 선생님 등이 등장한다. 나는 피에르를 중심으로 마리, 학교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 피에르 아빠와의 관계로 나누어서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하였다. 이 관계들 속에서 마리는 피에르를 변화시킨 인물이다. 그리고 학교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피에르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알몸인 피에르가 불편은 하지만, 지적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끝으로, 피에르의 아빠는 결과적으로 피에르가 학교에 알몸으로 가는 것을 도운 면이 있는 인물이다.


마리를 만나서 변화되는 피에르: 마리와 피에르 관계 위안과 안정     


이 책을 처음에 읽었을 때 나는 알몸의 피에르와 마리의 관계에 무게를 두었다. 마리는 피에르와 같은 모습의 알몸으로 학교에 온 옆 반 여자 아이다. 그 아이도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초록 장화였다. 피에르가 풀줄기를 찾다 들어간 풀밭에서 그와 같은 모습으로 풀줄기를 찾고 있는 마리를 만났다. 이들은 함께 풀줄기를 줍고 나뭇잎으로 신체의 중요한 부위를 가렸다.          


쉬는 시간이 끝나서 이들은 고맙다는 말만을 서로에게 남기고 헤어졌다. 서로 무엇이 고마웠을까. 아마도 자신과 같은 모습인 자체가 서로에게 고마웠을 것 같다.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고, 나만 주위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위안을 주었을 것 같다. 이 고마움과 위안이 피에르와 마리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그림책에서 마리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알몸이 부끄럽고, 창피해서 감추려고 했었던 피에르가 마리를 만난 이후에는 자신감 있는 능동적인 사람이 되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피에르와 마리의 관계를 통해 나는 비슷한 사람들로부터 얻는 위안과 안정의 메시지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마리도 피에르를 만나서 더 이상 자신을 감추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편한 시선을 느끼는 피에르: 피에르와 학급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 관계 진정한 배려


두 번째로는 알몸의 피에르와 옷을 입은 학급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의 관계에 무게를 두었다. 처음에 나는 이 관계에서 알몸이라는 것이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소수의 의견에 대해서도 들을 준비를 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알몸의 피에르를 놀리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 주는 친구들의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는 교훈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빨간 장화만을 신고 학교에 온 피에르에게 친구들이 먼저 일반적인 인사를 건넨다. 친구들에게 알몸의 피에르는 놀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피에르, 안녕.”

“피에르, 별일 없지?”

“피에르, 오늘 좀 달라 보이는데?”

“어, 그런데 피에르, 너 장화 예쁘다.”

“아, 그래, 장화 아주 멋있네!”

“예쁜 빨간색이야.”



친구들이 이렇게 건네는 인사에도 피에르는 장화 속이 조금 갑갑하다는 생각만 했을 뿐, 친구들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피에르의 가장 친한 친구 폴만이 “안 추워?”라고 물었지만 피에르는 대답할 틈 없이 교실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피에르의 모습을 평가하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도 피에르의 알몸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에르를 배려한 것 같다.


하지만 피에르는 그들의 배려에도 자신의 모습을 창피해하고, 감추고 싶어 했다. 그것은 아마도 일방적인 배려였기 때문인 것 같다. 상대가 원하는 배려가 아니라, 자신들의 편의에 따른 배려 말이다.


체육시간에 피에르가 신이 나게 깡충깡충 뛰어오르다가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가만히 서서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뛰는 것을 멈추었다. 피에르가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면서 즐거웠던 순간이었지만, 친구들은 그 모습이 불편했던 것 같다. 친구들은 알몸으로 학교에 온 피에르의 수치심은 감싸주려고 했지만, 진정으로 피에르가 즐거워하는 것을 함께 공감해 주지는 못했다. 알몸의 피에르의 모습은 친구들에게도 낯설고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들은 알몸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척했다가 그들의 진심이 어느 순간 들켜서 배려했던 마음이 피에르에게는 배려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 같다.


아빠 덕에 알몸으로 학교에 간 피에르: 피에르와 아빠와의 관계 자립               


세 번째는 피에르와 아빠와의 관계에 무게를 두었다. 이 그림책에는 피에르의 엄마가 등장하지 않는다. 피에르의 엄마와 아빠가 헤어져 살 수도 있고, 사건이 벌어진 그 날만 집에 엄마가 없었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피에르가 알몸으로 학교를 간 날에 피에르의 엄마는 없었다.


피에르는 아빠가 깨워줘서 일어났고, 아빠가 차로 데려다줘서 학교에 왔다. 피에르의 신발도 아빠가 챙겼다. 피에르의 아빠는 자신이 시계 소리를 듣지 못해서 피에르를 제시간에 깨우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아빠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고, 피에르는 느긋하게 누워서 슬그머니 한쪽 눈만 뜨고 있는 그림에서도 이들의 관계를 알 수가 있다. 피에르와 아빠의 이런 모습이 자연스럽다.


엄마의 부재는 현실 사회를 반영한 것 같다. 모든 가정이 엄마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편견이다. 그리고 엄마가 있다고 하더라고 아이에 대한 일은 엄마가 해야만 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조율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 정형화된 가정의 모습은 없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 간의 모습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건 비슷한 것 같다. 자녀를 깨워서 등교시키고, 어지러워진 방을 보고 잔소리를 하고, 학교 생활, 이성 관계 등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는 등의 부모의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피에르가 제시간에 스스로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제대로 했으면 알몸으로 학교를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하지 못한 피에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알몸으로 학교에 들어서서 겪는 수치스러움, 당황스러움, 두려움 등을 경험한 피에르가 그것을 해결하려고 행동하는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피에르는 자신의 알몸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한다. 처음에는 친구들의 시선이 집중되지 않도록 딱딱한 의자에서 몸을 비틀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아주 크게 웃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피에르는 친구들을 피해 혼자 큰 덤불 뒤에 숨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뭇잎을 따서 몸을 가리기로 했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처했던 피에르가 마리를 만난 이후에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피에르의 관계에서 아이가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해쳐나가도록 부모가 기다려 주면 아이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다면 이 그림책은 시작도 못해 보고 마무리해야 할 수도 있다. 엄마였다면 아이가 알몸으로 가는 것을 그대로 두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에 아이가 학교를 알몸으로 갔다고 하면, 이 이야기의 중간에 화가 난 엄마가 아이의 옷을 챙겨 가지고 학교에 갔을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설정은 알몸이라는 상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같다.


세 가지 관계를 종합 정리하면 어떤 말이 떠오를까? 자유!


피에르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 집중하다 보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다. 내가 앞서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과 다른 맥락에서 '알몸'이 진짜 신체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상태의 몸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적나라한 알몸의 그림과 성기를 나타내는 듯한 익살스러운 장치들이 자연스럽게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누기 편한 면이 있는 그림책이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의미보다는 피에르 반 친구들의 그림을 보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 솔직한 자신의 모습이 알몸이라는 생각을 했다. 피에르의 반 친구들도 피에르처럼 자신을 뒤덮고 있는 것들을 벗어던질 때  가장 즐거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옷과 장신구 등으로 자신을 치장하듯이 살아가면서 우리가 우리를 규칙, 제도, 예절 등으로 치장하는 것이 쉽지 않고, 간단하지도 않다. 그리고 이것이 반드시 불필요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자신이 그대로 바라보는 순간이 많지 않고 그 방법도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에 누구나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마리와 피에르의 관계에서는 위안과 안정, 피에르의 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과 피에르의 관계에서는 배려, 피에르와 아빠와의 관계에서는 자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관계를 모두 함께 놓고 생각하면 어떤 말로 정리할 수 있을까.


이 그림책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 들어가 있는 그림이 있다. 바로 새다. 이것은 인형의 모습이기도 했고, 옷에 그려진 모양이기도 했고, 살아 있는 새의 모습이기도 했다. 피에르의 새는 빨간색이었고, 마리의 새는 파란색이었다. 새는 피에르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위안과 안정을 받아 자신감을 키우고, 진정한 배려를 배우게 하고, 자립적 인간으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행동하는 것을 지켜봐 주었다. 나는 그 시간이 책임을 수반하는 ‘자유’와 ‘자존감’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새는 피에르가 자신의 자존감과 자유를 찾아가는 길의 동행자 같았다.


자존감 있는 사람은 자신 내면으로부터 책임감이 바탕이 된 진정한 자유를 누수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가라고 새가 응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아이의 한 줄 평>

피에르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은 모두 옷을 입고 있는데, 피에르가 알몸인 것에 대해서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피에르에게 ‘달라도 괜찮아’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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