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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May 14. 2021

1980년 잃어버린 봄

: 여전히 흑백사진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

*『오늘은 5월 18일』(2013)

: 글/ 그림 서진선(보림)



나라를 지키던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시민들도 총을 들었다.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2021년 현재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휴교와 파업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드러내고, 총부리 앞에 쓰러지는 시민들을 보며 또 다른 시민들은 팔에 자신의 혈액형을 적고 총을 들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정치적 사건을 거치면서 ‘민주주의’ 제도가 역사라는 이름 아래 확립되었다고 생각했다. 독재정치, 쿠데타, 혁명 등은 과거의 역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이것은 비단 빛바랜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시간이 흑백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 거꾸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미얀마의 모습에서 우리의 1980년 5월 18일을 보았다. 1980년 광주, 그해 우리에게도 봄은 오지 않았다. 미얀마의 잃어버린 봄을 보면서 1980년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봄의 아픔이 그대로 느껴진다.




밤새 울리던 총소리가 멈추고 아침이 왔다. 1980년 5월 21일 누나가 집을 나갔다. 며칠 동안 아빠와 엄마는 누나를 찾으러 다녔다. 토요일에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 집에 와서 누나가 곧 올 테니, 학생과 시민군을 위해 주먹밥을 만들자고 했다. 그날 나는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형들 사이에 있던 누나를 보았다. 누나는 트럭에 타고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주먹밥이랑 물과 음료수를 트럭 위에 실어 주었다. 누나는 그 트럭을 타고 떠났다.


다음날 비가 왔다. 나는 누나를 찾으러 가는 아빠를 쫓아갔다. 그곳에서는 많은 관들이 있었고, 관 위에는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누나 사진은 없었다. 향 냄새가 지독해서 나는 밖에서만 있다가 왔다. 그곳에 다녀와서 나는 더 이상 총놀이를 하고 싶지 않아 졌다. 누나가 만들어준 나무젓가락 총을 버렸다.




이 이야기는 1980년 당시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그곳에 살았던 서진선 작가는 친구가 겪은 이 이야기를 30여 년이 지나서 그림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이 ‘5.18 민주화 운동’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처음 우리에게 들려준『오늘은 5월 18일』이다.


이 그림책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시위대에 뛰어든 누나를 그리워하며 쓴 열흘간의 일기다. 당시 광주의 평범한 집의 앞마당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5.18 민주화 운동’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 가족들의 모습으로 번져갔다. ‘5.18 민주화 운동’을 담담하고 천진한 말투로 한 아이 일상처럼 풀어서 보여주었다. 그래서 더 슬프다.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에 광주에 살았던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가슴 아프다.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화려한 휴가’나 ‘택시 운전사’ 같은 영화 장면이 스쳐간다. 부드러운 선과 톤 다운(tone down) 된 색깔이 주는 따뜻한 느낌이 1980년대 배경의 영화 필름에 닿아 있다. 그리고 현실적인 배경이 독자로 하여금 당시 광주 어느 마을에 서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평상이 놓여 있고, 봉선화가 피어 있는 화단이 있는 마당이 있는 집, 서른 명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초등학교 1학년 교실, 넓은 마당에 많은 꽃이 피어 있는 화단이 있는 남동성당, 분수대가 있는 광장 뒤의 전남도청에 들른 기분이 든다. 이런 공간뿐 아니라, 연탄재, 싸릿 빗자루, 쓰레기통, 달력, 벽시계 등과 같은 소품이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무장한 군인이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에 들어왔다. 밤이 되면 총소리와 대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인민군이 쳐들어왔다고 걱정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집에서는 총알이 들어올까 봐 창문을 이불로 다 가렸다. 학생들은 교복을 벗어두고, 시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이런 학생들과 시민군들에게 동네 사람들은 밥을 해 먹였고, 이들이 다치면 치료도 해 주었다.


많은 광주시민들이 무고하게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광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공포는 오롯이 광주시민들이 감당해야만 했다. 광주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게 계엄군의 통제에 놓인 섬이 되었다.


그림책 속의 앞뒤 면지에 다양한 총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무장세력들의 얼굴과 그들의 폭력 같이 느껴지는데, 마치 면지가 그림책 이야기를 감싸듯이 당시 무장한 계엄군이 평화롭던 광주를 공포스럽게 둘러싸고 있는 모습 같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수업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가라는 선생님 말씀에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났다. 밖에 나가지 말라는 엄마 말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총놀이를 했다. 이렇게 철이 없던 아이들이 끝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광주에서 벌이지는 일들이 아이들의 눈과 귀도 열리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을 잃은 상처를 통해 그 시간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곳의 아이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설레게 하는 진짜 총을 들고 있는 나라를 지켜주는 고마운 ‘군인 아저씨’는 없다. 다만, 무력으로 광주시민을 위협하던 국가 폭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일기의 마지막 날은 1980년 5월 28일 수요일이다. 장소는 첫날 보여준 아이의 집 마당이다. 그 일기의 첫날에는 마당에서 엄마는 빨래를 하고 계시고, 아빠는 닭들에게 사료를 주고 계셨다. 누나가 나무젓가락으로 아이에게 총을 만들어주겠다고 해서 신이 난 아이가 누나에게 뽀뽀를 해 주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마지막 날의 모습은 누나와 아이가 함께 종이접기를 하고 웃으며 안고 있다. 그림만 보면 누나가 돌아와서 아이의 집에 일상이 찾아온 것 같다. 하지만 그림 옆의 텅 빈 종이에 ‘누나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누나가 보고 싶다’라고 쓴 두 문장으로 그 그림이 현실이 아니라, 아이의 희망인 것을 알 수 있다. 2021년 누나는 집으로 돌아왔을까. 가슴이 먹먹하다.      


1997년 ‘5. 18 민주화 운동’은 법정기념일로 제정하고, 국가가 행사를 주관해서 치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들이 폭도가 아니었고, 그들의 희생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과 그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앞으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면 안 된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 참여한 개인들이었다. 그 개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 희생된 개인들과 그 가족들이 여전히 지금도 아물지 못한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 그림책에서처럼 누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따라서 ‘5.18 민주화 운동’ 같은 희생의 역사를 과거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생각해 보고 그 의미에 대해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이 흑백사진 속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시간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의 말이 이 그림책을 읽는 내내 더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우리 아이의 한 줄 평>

광주에서 이런 아픔이 있었는지 몰랐다. 이 그림책으로 그 아픔을 나도 함께 느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가 벌써 49세가 되었을 것이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아픔을 가지고 있을까. 그 어른에게 위로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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