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 아저씨

: 예상치 못하게 생긴 관심

by 박세미

『소풍』(2014)

글: 소영, 그림: 성원(리젬그림책)




아파트 관리실에서 흘려 내보내는 안내방송이 오늘도 나온다.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아파트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으로…….’



마이크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온 집을 울려댄다. 말투는 공손하고 부드럽지만, 내용은 삭막하다. 내 집 안이라도 시끄럽게 해서도 안 되고, 담배도 태워서도 안 되고, 전기도 마구 써도 안 되고, 세탁기 배수구도 아무 데나 설치해서도 안 된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층간소음을 유발하고, 남의 집에 담배 냄새가 흘러 들어가게 하고, 우리 동 전체에 전기를 끊을 수도 있고, 세탁한 물이 역류해서 올라오는 문제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층간소음’에 대한 방송이 가장 많이 나온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가구를 끌어대는 소리, 늦은 시간 청소기나 세탁기를 돌리는 소리 등에 대한 지적이다.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아이들에게 ‘살살 걸어, 뛰지 마!’라는 소리를 한다. 가구를 끌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을 받치기도 하고 들기도 한다. 그리고 청소기나 세탁기는 저녁 8시 이후에는 돌리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마이크의 경고는 평온했던 감정을 시끄럽게 흩트려 놓는다. 일방적으로 나만 이웃을 배려하라고 하는 것처럼 들려서 사납게 감정들이 요동친다.



아파트는 이중적인 공간이다. 현관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완벽히 나만의 공간이 나온다. 아파트에서 이웃에 대한 관심은 사생활 침해 같고, 그들과의 소통은 오지랖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 공간이 사방으로 이웃과 접해 있어서 서로의 배려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아파트는 가장 개인적인 독립된 공간을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높은 공동체 의식을 필요로 한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사회에서 고립되어 혼자서 살아갈 수도 있는 공간이 아파트이기도 하다.




여기 그렇게 섬처럼 혼자서 살아가는 아저씨가 있다. 이 이야기의 그림이 너무 사실적이고 자세해서 이 아저씨가 마치 우리 집 옆에 살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아저씨의 일상은 평범하게 보였고, 층간소음으로 힘들어하는 아저씨의 모습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다.



205호에 사는 아저씨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다. 아저씨는 ‘밖은 거칠고 복잡한 것들로 꽉 차 있어서 다치기 쉬운 곳’이라고 생각해서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아저씨가 현관문을 열 때는 마트에서 배달시킨 음식을 갖고 들어올 때뿐이다. 아저씨는 낮에는 자고, 밤에는 그림을 그린다.



아마도 이 아저씨는 자신이 외롭다고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관문 밖의 세상은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별다를 것이 없는 자신의 안전한 일상에 만족하면서 생활했을 것이다. 아저씨의 이웃들도 205호에 누가 사는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 아저씨가 특별히 이웃들에게 피해 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고요하고 잔잔한 아저씨의 생활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앞집 204호에 아이와 엄마가 이사를 오면서 발생한 ‘층간소음’ 때문이었다. 아이와 엄마가 사는 그 집에서 하는 이야기가 벽을 넘어 아저씨 집에 울려 들어왔다. 그리고 층간 소음은 아저씨의 생활을 뒤흔들어놨다. 아저씨는 결국 몸살이 났다. 일상이 깨지는 것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이 몸이 아픈 것으로 나타났다. 층간소음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난 병이었다.



몸살이 날 정도의 소음이라면, 관리실이나 204호를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몸살을 앓고 나서 자신의 생활을 바꾸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층간소음에 자신의 생활을 맞추려고 했던 것은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대처인 듯 하지만, 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주변의 소리에 자신을 맞춰주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종종 있다. 동의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일이지만, 바꿀 수 없는 일들 앞에서 결정권이 없는 나는 그 일에 맞춰야만 한다. 사람이 일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일을 끌어가기 때문에 그 조직의 일부인 ‘나’라는 사람은 기계의 부품처럼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만을 하기를 요구받는다. ‘시끄럽게’ 일을 만들지 말고, ‘주목’ 받아서 좋은 일이 없다는 암묵적 강요가 있을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바뀐 생활 속에서 뜻하지 않게 아저씨에게 들리는 이웃집 소음은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층간소음이라는 것이 단지 ‘소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리’가 되었다. 아저씨는 204호에서 흘러들어오는 소리를 밀어내기보다는 그 소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의자를 끌거나 아이가 뛰어다니는 소음이 아니라, 엄마와 아이의 대화였기 때문에 아저씨의 귀가 열리고 마음이 향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저씨는 그 소리를 듣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 소리에 자신의 마음과 관심을 담아 행동으로 대답했다. 아이가 엄마에게 울면서 오리 인형을 사달라는 소리에 아저씨는 오리 인형을 택배로 배달시켜 주었고, 진짜 고양이를 요구하는 소리에 새끼 고양이를 택배로 아이에게 보내주었다. 그들의 대화에 자신이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햇살이 좋은 일요일, 아저씨는 아이의 소풍 가자는 소리를 듣고 낮잠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엄마는 소풍을 가려면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며 소풍을 미루려고 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생각했다. ‘소풍을 가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아저씨는 아이가 생각했던 소풍 준비물인 소풍 가방과 물통과 자신이 생각한 김밥 싸는 재료를 204호로 보내주었다. 다음날, 앞집 엄마가 도시락을 싸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와 엄마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아저씨는 그 소리만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아저씨가 현관문 밖의 세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아이와 엄마의 모습을 통해 본 바깥세상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거친 곳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신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아이와 엄마도 험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아저씨는 현관문 밖의 세상에 자신도 맞설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다는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204호의 층간소음이 아저씨의 생활을 변화시키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깨기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세상을 불신하고 자신의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강해 보이는 아저씨의 빗장을 아이와 엄마가 풀었다. 이들은 아저씨에게 조언을 하거나 배려를 하지 않았다. 이들은 아저씨를 알지도 못한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생활을 살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저씨가 세상에 문을 여는데, 도움을 주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때로는 내가 열심히 사는 하루가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도 있다.



아저씨는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소풍을 가는 아이와 엄마를 따라 버스를 탔고, 버스 뒷자리에 앉아 달리는 버스 차창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도착한 호수공원에서 솜사탕도 샀고, 공원 식당 앞에서 줄도 섰고, 오리배도 탔다.



아저씨는 긴 의자에 앉아 쉬었다. 그 긴 의자에 혼자 앉아 있으니 친구 없는 자신의 소풍이 다소 싱겁게 느껴졌다. 아저씨가 외롭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아이와 엄마가 아저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에 와 앉았다. 아이가 물 한 컵을 아저씨에게 건넸다. 아저씨가 망설이다가 받은 아이가 건넨 그 물은 시원하고 달콤했다. 아저씨의 소풍이 완성되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가 되는 순간, 아저씨가 잊고 지냈던 비어 있던 공간에 온기가 돌면서 외로움에 대한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흑색 펜으로만 그려졌던 이 그림책에 색깔이 입혀질 수 있는 순간이다. 아저씨의 평범하지 않은 외모가 평범해질 수 있는 순간이다. 아저씨의 큰 체구와 비정상적인 외모는 실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점점 괴물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시선이었을 수도 있다. 마치 미녀와 야수에서 잘생긴 왕자가 마법에 걸려 야수가 된 것처럼, 이 아저씨도 고립, 불신, 불통이라는 마법이 풀려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세상으로부터 상처만 받지 않으려다 괴물이 되기보다는 세상에서 상처도 받고 극복도 하면서 함께 사는 평범한 모습이 차창 밖에서 불어주는 바람의 시원함에 미소 지을 수 있는 행복을 줄 것이다. 이제 이 아저씨는 언제든 소풍 갈 준비가 되었다.






<우리 아이의 한 줄 평>

이 아저씨는 폐쇄적이고, 표정도 별로 없고, 우울해 보이고, 움직이기도 싫어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앞집 아이인 꽃님이를 통해 변하는 것을 보니, 사회와 단절이 되어도 동심으로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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