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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미 Oct 08. 2021

시작을 지켜 봐 주는 시선 속에 꽃피는 창의성

: ‘아서’라는 맥스의 예술의 시작

『아트와 맥스』(2010)
글/그림 데이비드 위즈너 (㈜베틀북)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이의 그림에 감탄할 때도 있지만, 좀 더 색을 꼼꼼히 칠했으면 좋겠다던가, 사물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올 때가 많다.  


아이가 글짓기 숙제를 해 왔다. 아이의 글을 읽으면서 감동받을 때도 있지만, 아이가 하고 싶은 말보다는 띄어쓰기, 맞춤법, 문단 나누기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에 눈이 먼저 갈 때가 많다. 그리고 빨간펜으로 틀린 부분에 밑줄을 그어야 직성이 풀린다.  



아이가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 그 시간을 즐기는 아이의 모습보다는 아이가 만들고 있는 ‘무엇’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아이의 그 시간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침범할 때가 많다.



아이가 하는 예술적 행동이 아이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바라봐 주기보다는 그 결과물을 평가할 때가 더 많다. 아이가 앞으로 좀 더 나은 결과물을 내기 바라는 마음이라는 변명으로 훈수두기가 시작된다. 그러면서 아이의 생각이 다듬어지길 바란다. 동시에 그 다듬어진 아이의 생각 속에 아이의 창의성이 묻어나기를 바란다.



이것이 가능할까?




사막 한가운데, 도마뱀 한 마리가 캔버스 앞에 늠름하게 서 있다. 그 도마뱀의 모습과 느낌을 그대로 캔버스에 담아내고 있는 또 다른 도마뱀이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도마뱀의 이름은 아서다. 아서는 LP판을 틀어 놓고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조용한 음악 속에서 자신의 그림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서의 진지한 눈빛 속에서 느껴진다. 그 분위기가 사막이라는 공간에 흡수되는 것 같다. 인간에게 황량하고 삭막하게 느껴지는 사막이 도마뱀에게 사막은 삶의 터전이다. 사막에 놓인 집 한 채가 그것을 대변해 주듯이 서 있다. 선인장 사이에 서 있는 아서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집 앞마당에 있는 것 마냥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 같다.



평온하게 그림을 그리는 아서 뒤로 긴 꼬리를 흔들며 두 팔 벌려 정신없이 뛰어 오는 도마뱀 한 마리가 있다. 맥스다. 맥스의 모습은 아서와는 대조적이다. 아서는 큰 체격에 피부색이 갈색 한 가지 계열로만 되어 있는 반면, 맥스는 몸은 초록색이며 머리는 아서와 같은 갈색 계열로 되어 있는데 아서의 절반 정도의 체격을 갖고 있다. 몸과 머리의 색깔이 확연히 구분된다. 시각적으로 아서가 일반적인 도마뱀의 느낌이라면, 맥스는 변종 같은 느낌이 든다.

 


차분한 아서 뒤로 맹목적으로 달려오는 듯한 맥스의 모습은 무슨 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과 함께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금방이라도 아서의 그림을 뚫고 나갈 것 같은 기세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돌진해 오던 맥스는 그림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맥스는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아서에게 말했다. 아서는 그 말에 의심이 들었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방해만 하지 말라며 미술 도구를 맥스에게 빌려준다.



하지만, 맥스는 자신이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몰랐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이 잘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따라 해 보려 했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막연한 설렘이 곧 막막함으로 바뀐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첫발을 떼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그림을 그릴 것처럼 들떠 있던 맥스가 손에 붓을 꽉 움켜쥔 채 캔버스를 등지고 멀뚱멀뚱 서 있는 이 장면에 마음이 갔다. 빈 캔버스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 맥스의 머리도 캔버스처럼 하얗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방법은 모르겠고, 능력에 대한 확신도 없고, 금방 식을 것 같은 열정만 있는 상태다. 금방이라도 출구를 찾을 것처럼 신나게 들어선 미로에서 나갈 출구를 영영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상태다.    


맥스는 아서에게 가서 묻는다.


‘저기, 아서? 뭘 그려야지?’

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아서는 한줄기 빛과 같은 말을 던진다.

‘글쎄… 날 그려도 되고.’ 

맥스는 자신의 두려움을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했고, 아서는 맥스가 청한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 말과 동시에 맥스의 예술 활동이 시작되었다. 맥스는 아서 몸에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맥스의 얼굴에 당황하거나 주저하는 표정은 없었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아서라는 대상에 자유롭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잔뜩 물감이 묻은 자신의 몸에 화가 난 아서가 헐크처럼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하자 몸에 균열이 생기면서 아서를 둘러싸고 있던 피부가 산산조각이 나서 몸에서 모두 떨어져 나갔다. 아서의 몸이 부서졌다기보다는 낡은 것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감춰놨던 아서의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서의 울퉁불퉁했던 도마뱀의 껍질이 사라지고 몽실몽실한 파스텔 톤의 속살이 드러났다. 솜사탕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그 질감의 속살에 맥스가 칠한 알록달록한 물감이 스며들어가 있었다.



아서의 조각 난 껍질은 아서의 몸이 선으로만 남았을 때, 다시 아서의 몸으로 돌아가서 아서의 몸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맥스는 청소기를 이용해서 물감이 칠해진 도마뱀 껍질의 파편들을 다시 아서의 몸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아서의 몸은 다양한 색을 가진 작은 점들로 덮였다. 아서는 그런 자신의 새로운 모습에 만족했다.



아서가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만나기까지 맥스의 여러 가지 예술적 시도가 있었다. 맥스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입혀진 연기 같은 아서의 몸을 선풍기 바람으로 날려버리기도 하고, 건조해진 아서에게 물을 먹여 아서의 몸을 뒤덮고 있던 물감을 몸 밖으로 흘러 내려가게도 했다. 또, 맥스는 색을 잃은 아서의 몸을 한 올 한 올 실타래를 푸르듯이 당겨서 결국 아서의 몸이 사라지게도 만들었다. 그리고 맥스의 기억을 더듬어 그 실타래 같았던 아서의 몸을 철사처럼 휘어서 아서의 모습을 재현해냈다.



다시 태어난 아서는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냈고, 맥스는 아서가 그렸던 그 캔버스 위에 자신의 느낌으로 도마뱀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아서와 맥스는 예술이라는 것이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캔버스 위에 대상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만이 예술이 아니라, 자유롭게 표현해 내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누구’처럼, ‘무엇’처럼이라는 것은 예술에 있어서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예술은 작가의 느낌을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에게 함께 느끼자고 손짓하는 것인가 보다. 대중은 그것을 자신의 상황과 자신의 모습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서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주길 바랬던 도마뱀들은 아서가 맞고, 맥스가 틀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맥스의 행동에 당황하고, 예술가로서 맥스를 믿지 않았다. 이 도마뱀들은 항상 아서 편에 서 있었다. 아서가 사라졌다가 다시 선으로 재현되었을 때, 아서가 다시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붓을 건네 준 것도 바로 이들 중에 한 마리였다.



그런데 이들은 맥스의 예술적 행위를 통해 아서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만족해 하는 모습을 보고 맥스의 예술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들도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몸에 물감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맥스 그림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맥스의 예술은 자신만의 느낌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소통을 통한 공감을 이끌어 냈기 때문에 이 도마뱀들이 맥스의 예술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었을 것이다. 공감이 없는 일방적인 작가의 느낌과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맥스의 행위는 아서의 만족을 얻어냈기 때문에 예술로 승화되었을 것이다.



또, 맥스는 아서 같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예술적 행위를 할 수 있었다. 맥스가 무엇을 할지 몰랐을 때, 아서는 자신을 그려보라고 했다. 물론, 아서는 맥스가 자신에게 물감을 칠할지는 몰랐겠지만, 맥스의 시작이 아서였던 것은 분명하다.



‘시작’의 어려움이 있다. 알지 못해서 두려운 것도 있고, 너무 많이 알아서 두려운 것도 있다. 어떻든지 간에 막막하게 그 두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꼭 응원해 주지 않아도 툭 던진 나를 향한 누군가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는 엄청난 힘이 있다.



맥스의 창의적인 예술 감각이 데이비드 위즈너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맥스의 행위를 바라보고 있는 아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서가 바라본 그 시선 끝에 걸쳐진 맥스의 창의력은 아서를 더 성장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아서는 선배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그리고 친구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서는 전통적인 예술일 수도 있고,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예술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맥스의 예술세계의 시작일 수도 있다. 맥스가 아서를 부를 때, ‘아트’라고 불렀던 것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아이의 한 줄 평>


아서는 사막에 사는 뿔 도마뱀으로, 몸이 갈색이다. 그리고 경계심이 강하고, 공격을 받으면 눈에서 피를 뿜어내는 습성이 있다. 반면, 맥스는 일반 도마뱀으로 아서보다는 경계심이 낮고 몸 색깔도 화려하다. 이러한 습성을 가지고 있는 도마뱀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예술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 것이 재미있었다. 이 둘의 관계를 통해 예술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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