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허겁지겁 얻은 월세방은 남편이 다니던 학교 근처였다. 길 하나 건너면 남편이 수시로 월담을 해서 넘나들던 학교의 담장이었다. 보증금이 없고 방세가 저렴해야 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이사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구한 곳이었다.
동생의 학교도 가까웠다. 주인은 혼자 사시는 할머니였다.
학교가 가깝다 보니 남편의 친구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아침에 등교하다가도 들렸고 점심시간에도 오고, 학교가 끝나고는 당연히 들렸다.
그 비좁은 방에서 자고 가는 놈까지 있었다. 자다 보면 머리맡에 누군가 자고 있었다. 발을 뻗으면 발길에 차이는 인간도 있었다. 밤새 담을 넘어 들어온 것이다.
아기는 이제 겨우 백일을 지난 상태였다. 가뜩이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입까지 더해갔다. 일주일치 식량이라고 엄마가 채워준 쌀독은 삼일도 못 가서 동이 나버렸다. 우리가 밥 먹을 때 들이닥쳐 숟가락을 드는데 못 먹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의 살림은 더욱 궁해졌다. 동생은 점심은커녕 아침과 저녁까지 굶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 상황에 엄마는 동생의 교납금마저 내지 못했다.
여름이 끝나고 짧은 가을이 급하게 지나가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기를 낳고 처음 맞는 계절이었다. 이젠 난방걱정까지 더해졌다. 우리끼리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기온이었지만 아기는 찬바람을 민감하게 느꼈다.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설사를 자주 했다. 오래된 구옥의 귀퉁이 방은 웃풍이 셌다. 방 안에서 한기가 돌 정도였다.
그동안 아기는 출생신고는커녕 예방접종도 못했다. 사실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아기에 대한 정보를 얻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이사하고부터는 남편의 부모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가 이사한 곳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휴대전화는 물론이고 우리에게 일반전화도 없었기에 우리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동생이 학교를 자퇴했다. 교납금이 너무 밀려서 더 이상 학교엘 다닐 수가 없게 됐다.
동생은 엄마가 사는 곳으로 가고 우리끼리 남게 되었다.
동생이 없자 남편의 친구들의 방문은 더 자유로워졌다. 학교를 땡땡이치고 하루 종일 죽치는 놈까지 생긴 것이다. 돌도 안 된 아기가 있는 상태에서, 좁은 방안에 시커먼 놈들, 서너 놈이 들어앉아 하루 종일 뒹굴거렸다.
말이 엄마아빠지, 남편이나 나나, 여전히 철없는 애였다. 남편은 하루 종일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우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 당시 남편이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방세를 내고 식비를 해결할까? 하는 걱정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언제나 몸이 달은 것은 내 몫이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거나 절망적인 마음이 든 적은 없었다. 그런 마음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갖게 되는 거지. 너무 극한 상황에 몰리다 보면 아예 다른 마음이 비집고 들어오질 못하는 거 같다.
그저 오늘을 버틸 뿐이었다. 그렇다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는 종교적인 사상에 입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낼 뿐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금세 겨울이 찾아왔다. 연탄을 때지 않고는 견디기 어렵게 됐다. 그동안은 두꺼운 이불 위에 잔뜩 껴입힌 아기를 올려놓고 지냈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빨래도 얼기 시작했고 잘 마르지 않았다. 바깥에 널던 빨래들을 방안에 줄을 매어 널었다. 방안 공기가 차갑다 보니 아침이 돼도 기저귀가 축축한 채였다. 세탁기가 없었기에 손빨래를 해서 널었던 것이다.
연탄을 때야 했다. 한 장에 백 원인 연탄을 열 장씩 사다 땠다. 따뜻하게 지내려면 하루 세 장은 때야했지만 불구멍을 꽉 막아 두 장으로 줄였다. 방은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다. 아랫목만 조금 따뜻할 뿐 다른 쪽은 온기가 거의 없었다.
닷새를 견디고 나면 연탄이 떨어졌고 다시 연탄을 살 돈이 없을 때가 많았다.
나는 주인집 연탄 창고에서 한밤중에 몰래 연탄을 집어왔다. 주인집 연탄 창고를 거쳐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는데 화장실 가는 척하고 슬쩍 들고오는 식이었다. 그곳에는 가을에 천 장 넘게 들여놓은 연탄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어느 날, 아기를 재워놓고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주인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가슴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혹시 내가 연탄을 집어다 땐 것을 들킨 것 같아서였다.
주인 할머니는 나를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미적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쉬지 않고 방망이질했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할머니에게도 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방안은 따뜻했다. 냉기가 도는 우리 방과는 달랐다.
할머니는 나를 앉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윗목에 있는 밥상을 들고 왔다. 밥상보가 덮여 있었다. 밥상보를 걷어내고 밥상을 내 앞으로 당겼다. 밥상 위에는 금방 끓인 된장찌개가 담긴 뚝배기와 밑반찬 몇 개와 밥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얼마 만에 제대로 된 밥상을 구경하게 된 것인지. 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자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밥은 먹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먹어. 내가 보니 밥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아서...오늘도 밥 냄새가 안 나더라.”
나는 무슨 말로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그동안 할머니가 미닫이문의 틈으로 우리를 종종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방에 드나드는 남편 친구들의 수를 세며 화장실 세를 더 내야 한다거나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으니 전기세를 더 내야 한다느니, 잔소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밥도 제대로 못해 먹는 것까지 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날 할머니에게 밥을 얻어먹고 방을 나왔다.
며칠 후 할머니는 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친척의 누군가가 그 학교로 전학을 오는데 방을 못 구해서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냥 내쫓기에 마음이 편치 않으니, 내게 밥 한 술 먹여 죄책감을 덜어 낸 듯했다.
우리는 또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사철도 다 지나고 돈도 없고 막막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나는,
아기가 커가는 상황에서 조용하고 친구들이 제집 드나들 듯하지 못하는 곳으로 가리라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