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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Jun 20.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7)

#07.

   그 사이 우리는 또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한 곳이 조금 교통이 편리한 데다 보니, 예전처럼 남편의 부모님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전에처럼 자주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불시에 들이닥치곤 했다.  

명절도 쇠러 가야 했다. 보통은 1박 2일이나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그때 엄마가 장사를 시작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재혼한 엄마는 새아버지와 함께 5일장을 다니며 옷을 팔았다.

 5일에 한 번씩 쉬었는데 그때 서울도매시장에서 옷을 떼어왔다. 서울로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서 먹을거리를 채워주고 우리의 방세도 내주고 얼마의 돈도 쥐어주고 갔다.

새아버지 모르게 들리는 것이다 보니 늘 급하게 다녀갔다.      


 명절에, 나는 먼저 엄마의 집에 들렀다가 시골로 갔다.

엄마가 장사하러 가면서 부엌 구석에 새아버지 모르게 조금의 돈과 선물꾸러미를 숨겨 놓은 것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사는 곳은 버스로 한 시간 반 거리였고, 거기서 또 한 시간을 넘게 버스를 타고 가서 십리길을 걸어야 시골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엄마가 굳이나 그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선물을 가져가라고 한 것은,

 아무래도 딸을 조금이라도 잘 봐주셨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이었을 게다.

손위 형님들이 시부모님께 선물꾸러미를 내놓을 때,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을 딸이 안쓰러워 그랬을 것이다.


 나는 아기를 업고 기저귀와 분유가 든 보따리를 들고, 버스를 타고 내리고 또 기다렸다가 버스를 갈아타는, 반나절이 넘는 거리를 걸쳐서야 시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늘 제일 늦게 당도했다. 그러면 남편의 엄마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솔직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반찬도 못하고, 일의 요령도 없는 열여덟 살짜리 철부지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남편의 엄마는 큰소리로 욕을 하며 몰아붙였다.

 "아니 뭘 꾸물거리느라고 이제야 기어들어오는 거냐?"


 "아니 뭘 그리 오래 먹고 있는 거냐? 우물우물 꿀떡하고 삼키지 않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거야!"

 우리 집에서는 씹지도 않고 삼키느냐며, 오래 씹어야 소화가 잘 되는 거라고, 빨리 먹는 내게 잔소리를 했었는데, 시집에서는 더 빨리 먹지 못한다고 식사 때마다 잔소리를 들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일어서 있어야 맞는 건지를 몰라서 주저주저하며 눈치를 봤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도 거기서는 잦았다.

찌개가 든 냄비를 옮기다가 넘어져서 엎어버리기도 하고 설탕을 소금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릇 깨는 것은 다반사였다.

 "저 병신은 저런 것도 구분을 못하냐! 밉다 밉다 하니까 별 짓을 다한다 야."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내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눈물을 훔치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큰동서나 다른 아주버니들의 예비부인들은 참기름이며, 가져가 먹을 것들을 챙기느라고 분주했다.

   

 시골에서의 명절 며칠은 내게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명절을 쇠고 나오면 바짝 말라있었다.

 “아니 잘 사는 시집에 다녀오면 얼굴이 좋아져야지, 어째서 더 말라서 오는 거야.” 주인집 아주머니가 하시던 말씀이다.

 내게는 남편의 부모님이 늘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시간은 너무나 더디게 흘러갔다. 아기가 돌이 된 일 년의 시간이 십 년처럼 지나갔다. 집에 들어와 치르자며 호들갑스럽게 보냈던 백일 때와는 딴판으로, 아기의 돌엔 아무것도 못하고 보냈다. 돌이 될 무렵, 남편의 부모님이 백일에 해줬던 반 돈 짜리 백일 반지를 보내왔을 뿐이었다. 나는 백일의 악몽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아기가 돌이 지나고 있었지만 우리의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이 출판사 영업일을 한 다곤 하지만 수입이 별로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엄마에게 기대어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아기가 돌을 지나고 얼마쯤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엄마가 몇 주 오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끼닛거리가 떨어졌다. 며칠째 설거지를 하지 않아 정리해 둔 밥그릇 위로 먼지가 뽀얗게 앉을 정도였다. 엄마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엄마가 새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전화를 해서 연락이 닿았다손치더라도 엄마가 직접 오거나 내가 가지 않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통장계좌로 입금을 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온라인이라는 개념이 없던 때였다. 돈을 보내주려면 우체국에 가서 돈을 부치면, 우체부가 우편환이라는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면 우체국에 우편환을 들고 가서 돈으로 바꾸는 시스템만이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이뤄지는데 빠르면 4~5일, 늦으면 일주일에서 열흘도 걸렸다.)


 돈을 빌릴 데도 없었다.

 그 당시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엄마와 동생 외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산 것이다. 남편이 원치 않았다.

 

 나는 생각다 못해 주인집, 전화를 빌려 큰동서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기 백일 때도 봤고, 명절 때마다 함께 보냈던 남편의 큰형의 부인인, 그러니까 내게는 큰 동서였다.

 "어머, 우리 집에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죄송하지만 부탁을 좀 드리려고요…"

 "무슨 일인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데 돈 있으시면 조금만 빌려 주세요. 어디 얘기할 데가 없어요. 며칠 후에 엄마가 오시면 드릴게요."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운 주인아주머니가 들어오실까 봐 방문 쪽을 바라보고 서서,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를 몰라서 몇 시간 전부터 연습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긴장하고 오랜 망설임 끝에, 간신히 부탁한 거와는 다르게 대답은 너무도 간단하고 짧게 돌아왔다.

 "내가 돈이 어디 있어?"


 그날도 우린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쌀이 한 공기도 안 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기의 식량이었다. 나는 아기의 분윳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분유를 끊었다. 그리고 쌀을 곱게 빻아 뜨거운 물을 부어 숟갈로 떠 먹였다.

배가 너무 고팠지만 어디에도 말할 데가 없었다.  다 뒤져도 먹을 거라곤 보리차 반 봉지와 집간장이 다였다. 우린 끓인 보리차와 찬물에 탄 간장물로 허기를 달랬다.


 시골집에 가서 뭐라도 얻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녀오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에게 다녀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쌀을 얻으러 갔다가 또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서였다. 차라리 내가 갔다 오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감생심 그 호랑이처럼 무서운 사람들에게 갈 생각을 했는지, 삼일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라고 한 옛 속담을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옆방에 사는 사람에게 아기를 맡기며 천 원을 빌렸다. 그때 차비가 칠백 구십 원이었고, 시내버스비가 백십 원이어서 천 원이면 딱, 갈 수 있는 버스비였다.

 터미널에서 한 시간을 넘게 버스를 타고 가서 십 리 길을 걸어야 시골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볕이 따가워지는 오월이었다. 그늘도 없는 황톳길을 한 시간 넘게 걷는데 현기증이 일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고 길 위로 자꾸만 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시골집 마당에 들어설 때쯤에 이미 다리가 풀려있었다. 며칠 동안 거의 굶다시피 지낸 탓이었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동네 사람 모두 모내기를 하는 중이었다. 모내기나 벼를 베는 시기에는 품앗이라고,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일을 도왔다.

 나는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부터 한 바가지 퍼서 마셨다.

 그리고 집을 나와 모를 내는 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일하는 사람들의 밥을 내가는 중이었다. 구수한 밥의 냄새를 대문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

 내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밥을 내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알아봤다.

 “아이고, 아랫집 막내며느리 아니야? 어머니 찾으러 왔구나.”

그때, 누군가가 밥 먹었냐고 물었다. 나는 염치고 체면이고도 없이, “아뇨.”라고 냉큼 대답했다.

 마루에 차려놓은 밥상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상에 다가가 앉아서 숟가락을 들었다. 밥상 위에 있는 모든 반찬이 맛있고 달았다. 나는 씹지도 않고 넘겼다. 한참 정신없이 밥을 떠 넣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이고 며칠 굶은 사람 같네. 잘 먹네.”


 그때 사람들의 틈에 서 있던 남편의 엄마가 나보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남편의 엄마를 따라나섰다.


 “어떻게 온 거냐?”

 남편의 엄마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쌀이 없어요. 쌀 좀 얻으러 왔어요….”

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그새 그 쌀을 다 먹은 거냐?”

 나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리도 쌀이 없다. 가져가려면 이거나 가져가라.”

남편의 엄마는 장독대에서 고추장과 된장을 퍼서 한 봉지씩 담아 주고는, 찬바람이 불듯이 대문을 나서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막막했다. 그냥 돌아가면 당장 우리는 굶어야 했다. 하지만 "없다"라고 단칼에 자르듯이 말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는 가야 했다. 남편의 엄마 등에 대고 내가 애원하는 목소리 말했다.

 “돌아갈 차비가 없어요...”

 “뭐야?”

 남편의 엄마가 돌아서서 내게 쏘아붙였다. 나는 그저 고개 숙이고 있었다. 남편의 엄마가 퉁명스럽게 주머니에서 돈, 천 원을 꺼내 던져주고는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나도 집을 나와서 축 처진 어깨로 다시 시골길을 걸었다. 양손에 들린 된장과 고추장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앉았다. 버스가 오려면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정류장엔 내가 오기 전부터 쌀자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족히 다섯 말, 그러니까 40킬로는 되어 보였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적막한 시골 정류장이었다. 내가 한 시간 가까이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쌀자루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나는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서 곁눈질로 쌀자루를 힐금거렸다. 여전히 동네는 물속에 가라앉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버스가 멀리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쌀자루를 버스에 실기로 마음먹었다. 버스가 브레이크 밟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멈추어 섰다. 내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의 문이 열리자 나는 달려가서 장보따리부터 실었다.

"잠깐만요. 짐이 더 있어요!"


나는 다시 정류장으로 뛰어가서 쌀자루를 들었다. 그러나 쌀자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힘에 40킬로는 족히 되는 쌀자루가 들릴 리가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버스가 떠나기 전에, 누군가 오기 전에, 버스에 실어야 했다.

 내가 안간힘을 쓰자 쌀자루가 조금 움직였다. 나는 쌀자루를 끌기 시작했다.


 버스의 문 앞에까지 거의 다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순간 등에서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쌀자루 주인인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버스에 오르려다 말고 내게 물었다.

 “실어드릴까요?”

 나는 그 사람의 도움으로 쌀자루를 버스에 실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쌀자루를 질질 끌어 집에까지 가져왔다.


 집주인아주머니는 “야, 이걸 어떻게 여기까지 가져온 거야. 기운이 장사네.”

 나도 어떻게 그것을 들고 온 것인지 몰랐다. 어디서 그런 엄청난 힘이 난 것인지.


나는 그날 그 쌀을 헐어 밥을 지었다. 쌀을 씻는데 씻어도 씻어도 흙물이 나왔다. 질질 끌고 오느라 길바닥의 흙먼지가 범벅이 되어 버린 것이다. 쌀을 씻어 밥을 짓고, 된장과 고추장만 놓고 저녁을 먹었다.

나는 그날 저녁 집에 온 남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틀 후에 생겼다.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불렀다.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수화기를 들으며 누구냐고 물었더니, “아기 큰아빠 같은데, 예의가 없네. 인사도 없이 대뜸 새댁을 바꾸라는 거야.”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댔다.

 “당장 우리 집으로 와요.”

 “왜요?”

 “아, 씨발, 오라면 오지 웬 잔말이 많아?”

얼마나 큰소리로 말을 했으면 전화기 옆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아무리 어려도 제수씨는 제수씨인데 어디다 대고 씨발이야. 사람 못쓰겠구먼.”

아주머니가 혀를 차며 말씀하셨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큰일 났다 싶었다. 나는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알고 있었다. 온몸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손바닥 안에서 진땀이 배어 나왔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주인집 안방에서 우리 방으로 오는,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질 뿐이었다.


 나는 마침 집에 있던 남편에게 얘기했다.  남편은 아무 걱정 말라며, 큰형네 집으로 갔다.

아무리 배가 고파서 탐이 난 것이라고 해도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도둑으로 몰려서 시댁에게 추궁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무서웠다.      


 시댁으로 달려간 남편은 오히려 다짜고짜 어른들에게 대든 모양이었다. 똥 싼 놈이 성내는 격으로, 내게 욕을 한 큰형에게 되려 화를 내며 덤벼든 모양이다.

덤벼드는 남편에게 남편의 엄마가 말했다고 했다.

“아, 그래. 아니란 말이지? 그러나 걔가 도둑질한 것이 맞으면 그때는 각오해라. 우리는 도둑놈 하고는 못 산다.”     


 다음날, 우리 집으로 낯선 젊은 남자를 데리고 남편의 엄마와 작은 형이 왔다. 남편의 엄마는 방에 들어서면서 여기저기를 눈으로 뒤지고 있었다. 좁은 방 어딘가에 있을 쌀자루를 찾는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쌀을 다락에 올려다 놓고 잡동사니로 덮어 놓았다. 불빛 없는 다락에서 쌀자루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 남자가 쌀자루를 가져가는 나를 멀리서 봤다는 것이다. 그 쌀은 황부자라는 사람의 작은 아들이 버스 정류장에 가져다 놓고 깜빡하고 만 물건이라는 것이다.     

“야, 봐라 맞냐? 안 맞냐?”

남편의 엄마가 다짜고짜 남자에게 물었다.


 좁은 방의 구석자리에서 기도 못 펴고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나를 건너다봤다.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남자는 더벅머리에 키가 작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의 그는 어린 내 눈에도 어리숙해 보였다.

이제는 오리발을 내미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잘 보세요. 나 맞아요?”

 내가 당돌하게 남자의 턱밑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순간 남자의 눈에서 당황하는 빛을 얼핏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맞아요? 안 맞아요? 똑바로 말씀하세요. 잘못 말씀하시면 큰일 나세요.”

 모 아니면 도였다. 어차피 물은 이미 엎질러진 상태였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동네에서 부자라고 소문난 집 물건이라고 하니 조금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남자는 시골에서 자라나 농사만 짓고 살아온 순진한 사람 같았다. 당돌하고 앙칼진 도시의 결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눈빛을 바닥으로 향했다.

 “아닌 것 같아요......”

말끝을 흐렸다.


 “다시 한번 더 자세히 똑바로 잘 봐. 아니야? 아닌 것 맞아?”

 남편의 엄마가 남자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네..... 아닌 거 같아요......”

 남자가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고 가슴은 빠르게 방망이질을 해댔지만 굳은 얼굴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고 있었기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남편의 엄마의 얼굴엔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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