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우리가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마당에 내놓는 사이,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첫눈치고는 제법 굵었다.
마당에 내놓은 옹색한 보따리들 위로 함박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때 열어놓은 대문 앞을, 누군가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남편의 아버지와 셋째 형이었다.
정확히 우리가 사는 집이 어디인지 모르는지 이집저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삿짐을 어떻게 옮겨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차였다. 이삿짐이라고 해봤자 아기 용품과 옷 몇 가지와 이불,
부엌집기가 전부였다.
이삿짐차를 부를 돈도 없었지만
자동차로 옮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대책도 없이 이삿짐부터 꺼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우연치고는 너무나 절묘하게 형과 아버지가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이다. 2.5톤 트럭에 쌀과 무를 한 부대 싣고서였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큰형 집에 쌀과 가을채소들을 가져다주는데 웬일인지 우리에게도 쌀을 한 가마 주려고 왔다는 것이다.
후일 들은 바로는, 남편의 큰고모님이 애들 먹을 거라도
대주라고 했다고 했다.
집을 찾기 위해 남편의 친구들을 다그친 모양이었다.
우리가 이사를 가려고 한다니까,
“아니, 짐을 싣고 갈 생각도 않고 짐부터 내놓은 거냐?”
우리는 고개만 숙이고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느들은 어째하는 일마다 다 그 모양이냐?“
이번엔 잔소리를 들어도 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음 집을 알려주게 되어버렸다.
트럭에 아기를 안고 앉아 당분간 굶을 일이 없겠다는 생각과, 다시 악몽이 시작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며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사한 곳은 조용한 주택가였고 남편이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도 꽤 멀었다. 그곳까지 아침저녁으로
드나들 친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새로 이사한 동네는 군인가족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의 계급을 알진 못했지만 몇 개월에 한 번씩, 그 동네 남자들은 한꺼번에 훈련을 들어갔다. 그러면 그 동네 여자들은,
한 마디로 자유부인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생들이 있었는데, 애들을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모두 한 집에 모여 화투를 치거나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거나 했다. 물론 술이 빠지지 않았다.
애들은 중국집에서 배달시켜 먹이는 듯했다. 거의 몇 날 며칠을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노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우리 방의 문 중에 하나가 주인집 거실로 통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취해서 흥청대는 소리와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풍족해 보이는 생활이 몹시 부러웠다.
그 집 마당가에는 늘, 중국집에서 배달해 먹고 내놓은 그릇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어떨 땐 손도 대지 않은 짜장면과 탕수육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만약 그때 내가 육식을 할 줄 알았었다면 그것을 들어다 먹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생선도 먹지 못하는 완전한 채식주의자(고기를 전혀 먹지 못했다.)였다.
그러던 중, 엄마가 남편을 출판사에 취직시켰다. 영업사원으로였다. 정해진 월급은 없고 판매하는 금액에서 20% 정도를 받을 거라고 했다. 그것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때 일반 회사 경리의 월급이 팔만원이었고,
9급 공무원 월급도 팔만원 정도였다.
책 두세 질만 팔아도 여느 직장인에 준하는 수입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우리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미성년자였다.
남편이 첫 출근하기 바로 전 날, 나는 엄마에게 돈을 얻어서, 남편에게 시장에서 제일 저렴한 양복 윗옷과 셔츠를 사서 입혔다.
어쨌든 조금은 어른스러워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나이도 나이거니와 워낙 말라서 옷이 몸에서 겉돌았다.
꼭 아버지 옷을 입고 나온 아이 같았다. 그러나 남편은 만족해했다.
거울 앞에서 서 있는 그의 눈빛만큼은 통과의례를 치르기 위해 서 있는 무사의 결연함과 비견될 정도였다.
남편은 첫 월급날, 아기에게 줄 과자 몇 봉지를 사들고 퇴근했다. 품 안에서 월급봉투라고 꺼내놓는 남편의 얼굴은 한층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회사 이름이 인쇄된 봉투 안에는 만 원짜리 다섯 장과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래는 조금 더 받아야 하는데 세금 떼고, 뭐 또 떼는 게 있대. 그러고 나니까 그거야."
남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한 척 말했지만 스스로 대견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에게는 정말 큰돈이었다. 방세를 내고도 이만 원 가까이나 남아 있으니까. 부자 같았다.
그 부자 같았던 마음의 시효는 길지 않았다. 첫 달엔 아는 사람에게 강매나 마찬가지로 판매해서 버텼다.
그러나 다음 달부터 팔 데가 없었다. 우리의 인맥은 다음 달부터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사회 경험 없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한정적이었다.
개척을 해서 판매해야 하는데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나이 어린애가 알지도 못하는 집엘 무턱대고 들어가 책을 판다는 것은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만큼이나
희박하게 보였다.
그렇지만 남편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했다. 아마도 가장의 역할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침마다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았던 모양이다.
남편은 영업하는 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남편의 형들의 직업이 영업직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환경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때 그의 주변 사람들이 공직이나 일반 회사원이었다면 아마 남편은 다른 쪽으로 꿈을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 어렸고 장래 희망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어른이 되어버린 탓에 꿈을 어디에다 둬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때 영업이라는 직업을 만난 것이다.
실적을 어느 정도 달성해야 하는데 팔 곳이 없다 보니, 남편은 내 이름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때는 ‘할부’가 아닌 ‘월부’라는 것이 있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이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다달이 원금을 나눠서 내는 방식이었다. 십오만 원짜리 책 한 질을 월부로 끊었다. 만 오천 원씩 열 달을 내야 하는 것이다.
만오천 원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돈이었다.
당시 방세가 삼만오천 원이었다.
납입날짜가 되면 수금사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왔다.
납입 날짜가 다가오면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젠 책값까지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어찌어찌 만 오천 원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날이 되면 나는 이른 아침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귀를 바짝 세웠다. 동네가 워낙 조용했기에 개미가 움직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오토바이소리가 멀리서 들리면, 나는 급하게 아기를 안고 다락으로 숨었다.
그러나 수금사원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거칠게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와 봐요!”
남자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주인집에서 들을까 봐, 내가 숨어 있는 것을 남자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거기다가 도중에 아기가 울기라도 할까, 또 가슴 졸였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잔뜩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내 숨 쉬는 소리도 남자는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기를 품에 안고 다락에 갇혀 있는 몇십 분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잠잠해지고,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나고, 소리가 멀어지고서도 나는 한동안 다락에서 나오질 못했다. 남자가 가는척하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우리는 다달이 책을 사야 했다. 월불입금은 늘어갔고 나는 다락에 갇히는 곤욕을 종종 치러야 했다
우리에게는 불입금만큼 책이 쌓여갔다. 아기는 아직 걷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못 할 때였다.
말보다 그림책을 먼저 접하게 된 셈이다.
나는 겨우 기기 시작한 아기에게 책을 갖고 놀게 했다. 어차피 읽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고 책은 점점 늘어 가는데 책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책으로 탑도 쌓고, 울타리도 치고, 책을 장난감 삼아 놀았다.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아기에게 흥미롭게 느껴진 모양이다.
TV도 없었고, 아기에게도 내게도 친구 될만한 게 없었다.
나는 그때 아기가 다른 아기들보다 지적 발육과 육체적 발육이 빠른지 늦는 건지 몰랐다.
비교할 대상도 육아에 대해 의논할 데도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