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이경 May 30. 2024

나는 원조"고딩엄빠"다.(4)

#04.

부모님의 뒤를 끌려가는 소처럼 따라갔던 남편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열흘쯤 지나서였다. 남편의 부모님은 남편을 큰누나네 집에 데려다가 검정고시를 치러서 대학엘 보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학원을 알아보는 사이, 남편이 탈출하듯 다시 돌아와 버린 것이다.


 남편에게서 그다음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남편이 돌아와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나 혼자 잘 기를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불안과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내편이라고 믿는 누군가 내 어깨를 부여잡고 있기만 하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세 식구는 자취방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의 부모님이 들이닥치듯 찾아왔다.

 “어떻게 된 거냐? 너 혼자 잘 키우겠다며? 그런데 어째서 우리 애를 다시 꼬드겨서 데려다 놓은 거냐?”

 “제가 무슨 수로 아드님을 꼬드겨서 데려다 놓겠어요?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여전히 당돌했다.     


 한동안 말이 없이 앉아 있던 두 어른은 이번엔 다른 조건을 내세웠다.

시골에 들어와 살라는 거였다. 남편은 도시에서 검정고시로 대학엘 가고, 나는 시골집에서 편안하게 아이를 키우라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편안이지 당시 내 생각에는 시골의 부족한 일손을 조금이나마 보태자는 심보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시부모님의 성격은 거칠었다. 나는 그 두 분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욕지거리와 막말을 들었다. 차마 입으로 옮길 수도 없을 정도의(벌어진 모든 일이, 다 내가 당신들의 아들을 꼬드겨서 벌어진 것이라는데, 그 말에 덧붙여진 어마무시하게 센 욕이 뼈에 새겨져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그 속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시골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어, 그래. 그러면 네 멋대로 한 번 살아봐라.”

 남편의 엄마가 내게 말했다.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지원은 없었다.      

 동생과 내가 자취하던 방은 산동네에 제일 꼭대기에 있었다. 엄마가 재혼하고 떠나면서 얻어준 것이었다.      


 세 사람이 서로 맞닿아 누울 정도의 크기의 방과, 연탄아궁이가 있는 부엌은 두 사람이 겨우 들어설 정도였다.

뒷마당 끝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주인집과 함께 사용했다.


 재혼하면서 남자를 따라 타지로 떠난 엄마가 한 달에 한두 번 들렸다. 엄마가 내게 몇 푼의 돈을 쥐어주고 갔지만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엄마도 생활이 여의치 않은지 우리의 방세를 제 때 내지 못했다.     


 방세는 보증금 없이, 만 오천 원이었다.

주인집 할머니의 독촉소리를 아침저녁으로 들어야 했다. 방 안에 앉아서도 마당에 나온 할머니의 기침소리가 나면 우리는 숨소리조차 죽였다.


 월세는커녕 끼닛거리가 없어서 매일 굶는 형편이었다. 끼니보다 아기 분유가 더 큰 문제였다. 내가 거의 혼수상태인 채로 출산했기에 아기는 분유를 먹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아르바이트가 흔하지 않았다. 어디서고 미성년자를 고용해 주는 곳은 없었다.


 생각다 못한 남편이 막노동이라도 해보겠다며 이른 새벽에 건설현장으로 나갔다.


 해 질 녘에 돌아온 남편이 주머니에서 칠천 원과 빵 하나를 꺼내 내게 들려주며 말했다.

 “나는 참도 먹고 점심 먹고 나서, 또 참을 먹었어. 이 빵은 남는 거 내가 가져온 거야.”


 온몸은 먼지투성이고 얼굴은 지쳐있었지만, 사냥에 성공해 돌아온 사냥꾼처럼 당당함이 묻어있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번 돈이었다.      


  그 돈으로 나는 쌀가게로 달려가서 제일 싼, 혼합곡이라는 것을 샀다. 혼합곡은 납작하게 눌러 놓은 보리쌀과 쌀을 섞은 것인데, 쌀보다 보리쌀이 훨씬 많았다. 그때는 쌀가게에서 됫박으로 쌀을 팔았다.

 쌀을 다섯 되 사고 슈퍼마켓에 가서 분유 한 통을 사서 언덕을 올라올 때 힘든 줄도 몰랐다.


 며칠 배를 채울 수 있는 양식과 아기 입에 넣을 곡기를 양손에 들고 오는 느낌. 오늘은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겠다는 일차원적인 생각. 단지 그때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남편은 온몸에 열이 펄펄 끓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질 못했다. 몸살이었다. 생전 해보지 않던 일을 한 탓인지, 너무 굶어 몸이 허약해진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남아 있는 돈으로 약국에서 약 삼일 치를 지었다.      

 며칠 앓고 나서 다시 그 현장으로 나갔던 남편이 반나절도 안 돼서 돌아왔다. 손에 삼립빵 두 개를 들고서였다.

 “돌아가래. 잘못하면 사고 나겠다고…….”


 등짐을 지고 높은 층으로 올라가다가 휘청대는 것을 보고 현장소장이 퇴짜를 놓은 모양이다.     


 남편의 부모님은 자주 찾아왔다. 도시에 볼일이 있어서라는데, 단지 이것들이 어찌 사나 궁금해서 오는 것 같았다. 들이닥치듯 갑자기 찾아와서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동네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둥, 이게 사는 거냐는 둥……


 아기 우유 한 통, 단돈 천 원짜리 하나 들려주지 않았다. 무엇을 끓여 먹느냐? 아기분유는 있느냐 등, 가난한 집, 아기 낳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안부도 없었다.     


 목소리가 컸고 말투는 거칠었다. 아기가 있으니 조용해야 한다거나. 애가 듣는다거나 하는 배려도 없었다.


 당신들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나와 남편은 죄인처럼 무릎 꿇고 앉아서 그 모든 소리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잠시 들린 엄마에게 주인 할머니가 방을 비워 달라고 했다. 아기를 낳은 지, 세 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우리는 이사를 했다.


 이사하고  얼마쯤 지나 시어머니가 찾아왔다. 매우 덥고 습한 여름날이었다.

 웬일인지 아기분유와 영양제를 손에  들고서였다.

 “내가 보니, 이걸 먹이는 거 같아서 샀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아기가 태어나고 처음 있는 일이라서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들을 맞았다. 대접할 것은 없었다. 그저 나와 남편이 죄인처럼 마주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애, 백일은 해야 되지 않겠냐? 집에 들어와서 하자. 내가 다 준비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들어와라. 아기 물건이나 빼놓지 말고 챙겨서 가져와라. 네 큰형이 데리러 올 테니 준비하고 있어라.”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유순한 얼굴과 말투였다.


마다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엔 어딘가 미심쩍었다. 늘 아기를 빼앗아 갈까 봐 잠시도 아기의 곁을 비우지 않고 지내고 있는 터였다.


시골로 가기 전에 나는 동생에게 당부했다.

 “혹시 내가 백일 지나고 돌아오지 않으면 엄마에게 연락해서 나를 데리러 와줘.”


 그리고 아기의 옷가지와 장난감이나 물품을 거의 다 남겨두었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몇 가지 챙겼다. 남편의 엄마는 모두 들고 들어오라고 했지만.      


 아기 백일을 하루 앞두고 남편의 큰형의 자동차가 집 앞으로 왔다. 형수와 두 딸을 싣고서였다. 우리는 트렁크에 아이의 유모차를 실었다. 유모차는 엄마가 아기의 백일선물이라며 사 준 것이었다.      


 시골에 도착하니 남편의 집은 이미 잔치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웃에 사는 남편의 두 고모를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지지고 볶고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하이고, 너무 이쁘다 야, 할아버지를 꼭 빼닮았네. 씨도둑은 못한다더니 영락없는 이 집 씨구만,”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이 아기를 보고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남편의 아버지와 엄마는 싱글벙글했다.

 “저기 좀 봐라. 저 정도면 한동안 먹일 수 있겠지?” 남편의 엄마가 마루의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엔 아기의 분유가 가득 쌓여있었다.


 백일 날 아침, 제법 구색을 갖춘 상이 차려졌다. 사진이나 백일복은 없었지만 반 돈 짜리 금반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가까이 살고 있는 친척들과 이웃사람들이 백일 상을 마주하고 축하해 줬다.


사람들이 늦은 아침을 먹고 돌아갔고 나는 큰형수를 도와 뒷정리를 했다. 뒷정리가 끝나자 큰형내외가 돌아갈 차비를 했다. 우리도 따라서 돌아갈 준비를 하려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남편의 엄마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너희들 뭐 하는 거냐?”

 “집으로 돌아가려고요.”

 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딜 간다고?”

 “돌아가려고, 일 다 끝났으니까.”

 남편이 대답했다.

 “가긴 어딜 간다고 하는 거야? 너희들, 못 간다.”

 “무슨 소리야? 엄마가 백일 해준다고 오라고 한 거잖아. 이제 다 끝났으니까 돌아간다는데.”

 “느들 여기서 살든가. 아니면 애는 놔두고 느들만 가라.”


 나는 얼른 유모차에 눕혀놓은 아기를 들어서 끌어안았다. 멀리서 보고 있던 남편의 아버지가 화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달려와 아기를 빼앗으려 했고 나는 아기를 온힘으로 안고 땅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제 아기예요.”

 내가 울면서 말했다.


 “얘가 어째 네 애냐? 씨가 우리 씬데. 얼른 내놓지 못해!”     

 남편의 엄마가 내게서 아기를 빼앗으려고 팔을 잡고 늘어졌다. 나는 여전히 마당 한가운데 아기를 껴안고 잔뜩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엄청난 욕설과 폭언과 고성과 아기의 울음소리와 내 울음소리가 뒤엉켰다.      


 당해낼 수가 없게 되자, 남편의 아버지가 때릴 듯이 주먹을 쥐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때 남편의 큰형이 소리 질렀다.

 “그만 두세요. 뭐하는 거야. 즈들이 키우겠다잖아. 나가라고 해요. 동네 창피해서 이거 원.”


 그때서야 두 어른은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때까지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는지 아니면 그때 다시 돌아온 것인지 모를 동네 사람들 몇몇이 눈에 뜨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의 일방적인 싸움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그들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던 것 같다.      


 우리는 아기를 품에 안고 짐보따리를 유모차에 싣고 뙤약볕 아래를 터덜터덜 걸었다. 버스비는커녕 돌아가서 당장 지어먹을 저녁거리도 없었다.

 남편의 부모님은 아기 손가락에 끼워줬던 백일 반지와 잔뜩 사다놓았던 분유도 못 가져간다며 빼앗았다. 그러나 당장 먹을 것도, 먹일 것도 없다손 치더라도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먼지 나는 시골길을 한참 걸어 나오는데 뒤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렸다.

“타라,”

 뒤이어 따라 나오던 남편의 큰형이었다.


 우리는 시골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이사를 했다. 걱정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고 언제 들이닥쳐 아기를 빼앗아갈지 몰라서 불안했다.


 시골에서 돌아오고도 오랫동안 나는 그들의 욕지거리와 고함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것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모르는 곳으로 숨어야했다.

이전 03화 나는 원조"고딩엄빠"다.(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