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하루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새댁, 이리 와 봐. 얘, 말한다.”
“말을 해요?”
“응, 나보고 큰엄마라고 부르며 물 좀 달래.”
주인집에는 아주머니의 조카라는 어린애가 함께 살고 있었다. 원래는 시동생의 아들인데, 시동생이 이혼하면서 보육원에 맡긴 아이를 아주머니 내외가 수소문해 찾아다가 키우고 있다는 일곱 살짜리 아이였다. 우리 방에도 자주 와서 놀다 가곤 했다.
그 아이가 주인아주머니를 큰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우리 아기도 큰엄마라고 부르더라는 것이었다.
아기가 돌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아기는 성장이 느렸다. 돌이 지나서야 겨우 걷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말은 빠른 것 같았다.
아기와 말로써 의사소통이 된 것은 팔 개월 정도 됐을 때부터였다. 걷기도 전에 말문부터 열린 것이다.
내가 그림책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주면 따라 했다. 나는 그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아기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할애했다. 달리 할 일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아기는 그림책에 나오는 것들을 빨리 알았다. 글을 읽는 것은 아니고 그림을 보고 외우는 것이다.
남편에게 산 그림책, 열두 권짜리 한 질에는 한 권마다 테마가 달랐다. 꽃, 동물, 음식, 자동차, 도시이름 등이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었다. 돌 정도 되는 아기의 수준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아기의 교육을 염두에 두고 책을 구매한 것은 아니었다. 모자라는 실적에 꿰어 맞추느라 책을 산 것이었다.
특히 자동차를 좋아했다. 그림책에 있는 모든 자동차의 이름을 다 외웠다. 외국의 오래된 올드카의 어려운 이름을 낱낱이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정확한 발음은 아니었다.
내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에게 말하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애 엄마는 거짓말을 하루에 열두 번을 넘게 한다더니 너도 그런 거야?"라며 웃었다.
하지만, 아기에게 그림책을 들이밀며 물어보고는 모두들 놀라는 표정을 짓곤 했다.
"얘 천재인가 봐."
지금의 아기들은 엄마아빠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 태어나서 한 달 무렵에도 어린이집엘 간다고 한다고 들었다.
그때는 유치원은 초등학교 가기 1~2년 전에 가는 곳이었다. 그전까지는 거의 엄마가 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유치원에 가지 않고 곧바로 학교에 가는 아이들도 많았다. 글자는 학교에서 배웠다.
그렇다 보니 유치원에 가기 전까지는 오로지 잘 자고 잘 먹고 잘 노는 것이 아기의 본분이었다.
지금처럼 조기교육 같은 것이 없을 때였다.
우리나라의 최고학군이라고 불리는 강남 같은 데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가 살던 중소도시에서는 그랬다.
그때까지도 우리 부부는 고등학교 때처럼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하루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애가 자라고 있는데 말 함부로 하지 말어. 애가 듣잖아. 가뜩이나 애가 똑똑해서 듣는 대로 말할 텐데, 어쩌자고 아빠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애가 아빠를, 누구야! 하고 부르면 어떡해? 그리고 남편의 엄마라고 하지 말고 시부모님이라고 하는 거야. 이젠 어머님, 아버님 하고 불러드려. 그래야 더 친근감 있어서 예뻐해 주실 거 아니겠어. 애가 똑똑해. 잘 키워봐.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애가 다른 애들하고는 달라. 반드시 엄마가 고생해서 키운 보람이 있게 할 거야."
나는 어색하고 뻘쭘했지만 남편의 이름 옆에 “씨”자를 넣어 부르기로 했다. 어쩌면 그것이 더욱 어른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누구에게 말할 때도 시부모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너무 억세고 무서운 그 어른들에게 어머니, 아버지 부르기는 쉽지 않았다.
이름 따라가는 거라며 말씀해 주신 그 아주머니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 아주머니는 아기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며 아기가 있는 가운데 막말을 쏟아 내놓는 시모님을 안타까워하셨다.
아기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변 따라 보고 듣고 배우게 되는 거라며,
그것이 가정교육인 거라고 말씀하셨다.
더디지만 아기는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남편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