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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Aug 08.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14)

14.

 남편 앞으로 입영통지서가 나왔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뱃속에 있었다.

 등기로 입영통지서를 받고 며칠 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입대 날짜가 임박해서 관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월급이 삼십팔만 하고 몇 천 원이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많은 돈도 아니었다. 88 올림픽이 끝나고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결혼식을 올리면서 방이 두 칸인 아파트로 옮겼고 아이가 곧 학교에 입학할 것이고 또 둘째가 태어나면 생활비가 더 많이 들어갈 것이었다.      


 시부모님의 성격이 조금은 유순해졌지만 사람의 본성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전에처럼 함부로 대하거나 욕설을 마구 퍼붓지는 않았지만 폭언이나 하고 싶은 말에 거침없는 것은 여전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시부모님이 두려운 존재였다. 그 속에 남편 없이 시골에 들어가 살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큰 아이를 도시에서 교육시키고 싶었다.


남편이 직장 생활한 것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만약 내가 여전히 부업을 하고 있었다면 어느 정도 여윳돈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아이가 둘이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허겁지겁 동사무소 병무담당을 찾아갔다. 동사무소에서는 시청으로 찾아가라고 한다. 나는 다시 시청으로 갔지만 시청에서는 그런 법이 없다고 했다. 다만 부모님의 재산이나 우리의 재산이 법에서 정한 것에 충족하면 면제를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시골의 부모님께 연락해서 재산에 관한 모든 서류를 떼어달라고 했다.

 서류를 받아놓고 보니 재산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야말로 나라에서 원하는 것은, 누가 봐도 가난해야 하는 것이었다. 부모의 연세가 많아야 했고, 형제들이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시집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땅을 떼어먹어가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우리는 단 한 번도 부모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큰 애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우리 힘으로 살아왔단 말이에요. 이젠 둘째까지 태어나는데 애 아빠가 군대를 가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울고불고 아무리 떼를 써도, 법이 그렇다는 말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나는 생각다 못해 병무청을 찾아갔다. 병무청의 담당자도 똑같은 말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병무청이 있는 도청소재지까지는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나는 그 거리를 이주 동안 다섯 번은 오갔다. 어떻게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나중엔 병무청 직원들이 나를 먼저 알아봤다. 한 눈에도 앳된 엄마가 일곱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와서 울고불고 떼를 쓰다 가니까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몇 주를 병무청을 드나들다 여기서는 방법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날짜만 까먹고 있었고 입대날짜는 따박따박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나는 생각다 못해 청와대에 민원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마음에 대통령이라면, 그 정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 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남자인 대통령보다는, 같은 여자인 영부인이 조금 더 아이 엄마의 마음과 형편을 헤아려주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편지지를 사다가 구구절절이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영부인께,’라고 시작하는 글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우체국에 가서 등기로 편지를 부쳤다. 그리고 기다렸다. 사람들 말로는, 민원은 받은 날로 2주 이내에 반드시 회신을 해주게 되어 있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달력에 표시를 해가며 2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2주가 두 달도 더 되는 듯하게 더디고 느리게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아이의 출산을 준비해야 했다.

남편이 군대를 가든 가지 않게 되든, 아이가 출산될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돈이 별로 없었다. 내가 다니는 산부인과에서는 출산을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빈혈이 심해서 만에 하나 과다출혈이라도 일어난다면, 혈액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산기가 보인다면 빨리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렇다면 병원비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때 엄마가 돌아왔다. 중장비 남자의 승합차와 함께였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헤매고 다녔는지 지쳐 보였고 행색도 형편없었다. 달아난 남자는 찾지 못했다고 했다.

 남편이 탐탁해하지 않았지만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둔 상태에서 우리의 수입은 뚝 끊겨있었다. 갖고 있던 돈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집세도 몇 달 밀렸다. 이렇게 나가다간 보증금조차 찾아 나갈 수가 없게 될 것이었다. 그때 엄마가 제안을 했다. 옷 장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차가 있고 엄마가 장사하는 방법을 아니까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엄마 말로는 밑천이 최소, 이백만 원은 있어야 될 거라고 했다.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시집에서 빌려보기로 했다. 우리가 손 벌릴 데라고는 시집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무섭고 의심 많으며 인색한 시집에 어떻게 얘기를 꺼내느냐가 걱정이었다.


 며칠을 걱정하고 있을 때 시부모님이 오셨다.

우리는 거실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애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손 내민 적 없이 우리끼리 살아왔잖아요. 이제 애 아빠도 본의 아니게 직장을 그만둔 상태고 어디 취직할 만한 여건도 안 돼요. 이제 둘째도 태어날 텐데. 한 번만 도와주세요. 그냥 달라는 거 아니에요. 장사해서 제일 먼저 부모님 돈부터 갚겠습니다.”


 웬일인지 두 분은 듣고만 있었다. 전에 같았으면 노발대발했을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래, 얼마가 필요한 거냐?”

시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백만 원이요.”

남편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이백만 원이면 장사를 할 수 있단 말이지?”

“네, 우선 그거 가지고 불려 볼 생각입니다.”

 “언제까지 필요한 거냐?”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제가 별로 시간이 없잖아요. 좀 있으면 군대엘 가야 해서...”

“알았다. 내일 집으로 와라. 준비해 놓으마.”

시아버지는 더 이상 말이 없으셨다.

“너, 제일 먼저 우리 돈부터 갚겠다고 한 약속 잊지 마라.”

시어머니가 잊지 않고 못을 박았다.

 “염려하지 마세요. 제일 먼저 갚을 테니까요.”

남편이 대답했다.

“애, 외할머니가 함께 한다니까 믿는 거다. 늬들이 뭘 알겠느냐.”


 그렇게 장사 밑천, 이백만 원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차는 있는데 그 누구도 운전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남편은 운전면허가 있는 제일 친한 친구를 꼬드겨서 운전을 하게 했다.


 돈을 가져오는 날 밤에 우리는 동대문시장으로 향했다. 엄마와 남편과 배부른 나, 아이까지 모두 함께 남편 친구가 운전하는 승합차를 타고서였다.


 남편은 입영통지서를 받은 상태였고, 집세 밀린 것은 석 달을 넘기고 있었으며, 아이가 태어나기까지는 두어 달 정도가 남아 있었다. 장사 밑천이라며 시집에서 겨우 돈을 꿔온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룰루랄라 소풍이라도 가는 양, 즐거워했다.

 

 이제 장사는 잘 될 것이고 대통령영부인께서 우리의 사정을 잘 헤아려서 군대도 면제시켜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작은 아이도 무사히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 뻔했다. 더군다나 우리에겐 이백만 원이나 있었다. 그것은 남편의 육 개월치 월급과 맞먹는 거금이었다.

 그런 큰돈이 우리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우리는 부자가 될 것이고, 마음은 이미 부자였다.     


 우리가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밤 열 시가 넘어서였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주차장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차량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관광버스에서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둘러맨 사람들이 쏟아지듯이 몰려나왔다. 우리나라 사람의 반은 거기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너무나 빽빽해서 부딪히지 않고는 걸어 다닐 수조차 없었다.


 자동차를 주차하고 우리는 길가에 있는 샌드위치 점에서 끼니부터 때웠다. 그리고 나와 아이는 차에 있었고 엄마와 남편과 남편의 친구와 엄마가 물건을 떼러 갔다.


 물건 떼러 간 사람들이 돌아온 것은 새벽 3시가 가까워서였다. 아이와 나는 잠이 들어 있었고 드르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뒷문을 열고 남편과 친구가 들고 온 짐을 실었다. 나는 잠결이었지만 싣고 있는 짐의 크기가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물건이 맘에 드는 물건이 없었어? 왜 물건이 이거뿐이야?”

 “물건이 맘에 안 드는 게 아니고, 내가 서울 오지 않은 몇 개월 사이에 값이 엄청나게 올랐어. 이백 갖고는 얼마 살 수가 없어. 구색도 못 갖추겠어.”

 엄마가 장사하지 않은 육 개월 사이에 세상의 물정이 변했다는 것이다. 서울로 향할 때와는 달리 차 안의 분위기는 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아 있었다.


 그다음 날부터 우리는 오일장이 서는 것에 맞춰서 장사를 하러 나갔다. 장에 나가서 좌판을 펼치고 물건을 진열하는데 이건 썰렁해도 너무 썰렁했다. 마치 집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내온 것처럼 옹색하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날씨도 추웠고 손님도 없었고 매출도 없었다.

 첫날 우리는 이만육천 원을 손에 쥐었다. 순수익이 아니라 매출이 그랬다. 물건 값을 빼지 않아도 그것은 유지비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거기다 우리 다섯 명의 두 끼 식사비까지 들어갔다. 다음 날도 장에 나갔지만 장사는 시원치 않았다. 추위는 매서웠고 장에 오가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며칠 따라다니던 나와 아이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남편과 친구와 엄마가, 내가 없으면 어색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날씨도 날씨지만 두 사람의 식비라도 줄여야 했다. 만삭인 몸으로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차 안에서 지내는 것도 내게는 힘들었다.  


  물건이 팔리지도 않았지만, 조금 판 물건 값은 식비와 자동차 기름 값과 두 남자의 담배 값으로 헐어졌다. 곶감 빼먹듯이 표도 나지 않게 물건이 빠져나갔다. 돈도 모여지지 않았다. 판매한 물건 값을 모아 다시 물건을 해 와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물건은 물건대로 사라지고 돈은 돈대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청와대라며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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