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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Aug 15.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15)

15.

 우리는 아직 이불속에 있었다. 장이 쉬는 날이었다. 모처럼 늦잠을 자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9시가 채 되지 않았다. 전화를 받으니, 낯선 남자가 대뜸 나를 찾았다. 사투리가 없는 전형적인 서울 말씨였다.


 어디냐고 물으면서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른 아침에 걸려오는 전화는 대부분 반가운 전화가 아니었다.

나는 엄마의 빚 독촉 전화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었다.


 “청와대입니다. 청와대에 민원 넣으셨지요?”

 나는 당황했다.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네... 그, 그런데요. 누.. 누구신데요?”

그렇게 달력에 표시를 해가며 기다렸던 회신이었다. 이주가 되려면 아직 며칠이 남아있었다. 나는 가슴이 떨렸다.

 청와대라잖은가. 우리나라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 최고 높은 사람이 있는 곳, 온갖 최고를 다 갖다 붙여도 모자랄 그곳, 그곳에서 드디어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답변이 온 것이다. 그런데 정작 민원을 넣은 나는 너무나 당황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댁에 방문하려고 합니다.”

 “저희 집 엘요? 왜요...? 집이 누추하고 엉망인데....”

나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이따가 뵙죠.”     

 “일어나! 일어나! 빨리빨리 일어나! 큰일 났어. 청와대에서 사람이 온대!”

 아직 이불속에서 잠이 깨지 못한 아이와 남편을 깨워 일으켰다. 그때부터 우리는 날아다녔다. 아이를 대충 씻기고 우리도 세수를 하고 집을 정돈했다. 때마침 엄마는 전날 밤, 교회에 가서 자고 온다고 했다. 엄마가 있는 것이 별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남편이 이리저리 뛰고 있는데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다른 남자였다. 남자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여기 시청인데요. 혹시 청와대에 민원 넣으셨어요?”

“네, 그런데 왜요?”

“아니 우리에게 아무 말도 없이 거기다 민원을 넣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 사람 뭐라는 거야. 내가 문턱이 닳도록 찾아갈 때는 콧방귀도 뀌지 않더니.     


“시청에서 들어주지 않으니까 더 높은 곳에 도움을 요청한 거죠. 그게 뭐 잘못 됐나요?”

“여기 지금 난리 난 거 아세요?”

“왜 난리가 나요?”

“청와대에서 갑자기 내려온다고 해서 시청전체가 지금 비상이 걸렸어요.”

시청 병무과 직원의 목소리는 급하고 당황한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만으로는 전쟁이라도 난 듯했다.

“전화받으시는 분 때문에 여기뿐만 아니라, 병무청도 난리 났어요.”

 “거긴 또 왜요?”

“군대면제 해달라고 넣었던 서류, 다 준비해 놓으라고 새벽에 연락이 가서 담당자부터 청장님을 비롯한 전 직원이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었대요. 그리고 시청으로 온다는 연락을 좀 전에 받았어요. 이게 뭔 난리입니까? 미리 알려나 주시지 않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거기다 민원 넣을 거라고 미리 얘기했다면 도움을 줬을 거라는 건가?

 “그런데 제게 왜 전화하신 거예요?”

 “청와대에 뭐라고 민원을 넣은 것인지 미리 좀 알려고요. 뭐라고 하신 겁니까? 뭐라고 하셨길래 이 비상이 걸린 겁니까?”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뭐, 도와 달라고 했겠죠. 뭐....”


 내가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할 때, 지극히 사무적이던 담당공무원의 전화를 내려놓고 집안 청소를 대충 마치고 옷도 좀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양복을 깔끔하게 입은 남자 둘과, 낯익은 얼굴의 시청공무원이 집으로 왔다. 남자들이 들어서자 좁은 거실이 어수선해졌다. 나는 인사를 하며 슬쩍 창밖을 내려다봤다.

 주차장에 양복을 입은 낯선 남자들 몇 명이 서성이는 게 보였다. 그 옆으로 검은색 승용차도 몇 대가 서 있었다. 그때는 승용차가 그리 흔할 때가 아니었다. 우리 아파트에 승용차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와, 청와대가 높은 곳이긴 한가보구나.       


 집안에 들어선 두 남자가 집안을 둘러보았다. 남자들이 소파에 나란히 앉고 시청 공무원은 그 옆에 서 있었다. 우리는 바닥에 앉았다. 소파에 앉은 남자 하나가 들고 온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냈다. 거기엔 내가 병무청에 보낸 시댁의 재산목록과, 주민등록등, 초본과 호적, 통장사본들이 들어 있었다. 거기다 시청에 넣었던 서류들까지, 서류봉투는 꽤 두툼했다.      

 “아기가 언제 태어나죠.”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음 달 말 경이 예정일이에요.”

 내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는 말없이 서류들을 넘겼다.


 나와 남편은 죄인처럼 앉아 있었다.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 양복 입은 두 남자의 얼굴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서류를 뒤적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픈 데는 없나요?”

 “제가 많이 빈혈이 심해서 개인병원에서 받아주지 못하겠다고 해요. 혈액을 구할 수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어요.”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아이를 낳는 막달이 임박했지만 나는 몸무게가 별로 늘지 않았다. 얼굴엔 빈혈기로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이 돌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여윈 편에 속해 있었다.


 남자가 눈길을 돌려 남편을 보며 물었다.

 “남편 분은 어때요? 아픈 곳은 없나요?”

 “네, 다행히 저는 아픈 곳이 없습니다.”

 “다행입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지요.”     

  잠시 말이 없던 남자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희가 도와주려고 여러 가지로 방법을 모색해 봤어요. 그것이 영부인의 부탁이었습니다. 방법을 찾아서 어떻게든 도와주라고. 워낙 부인의 사연이 절절하다고…”

 남자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억양이 없이 차분했다. 이미 나는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마도 임신 중이라서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고 격앙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그 정도로 간절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병역의 의무에 있어서는 어떤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말을 멈췄다.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런데, 라니.

 나는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달짝이던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방법이 없어요. 병역의 의무란 것은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무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병무청을 다 뒤지고 시청에 비상을 걸어가면서 쳐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방법이 없다니. 그 말을 하려고 이 난리법석을 떨었단 말인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내가 따지듯이 남자를 쏘아보며 물었다.

 남자가 나와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서 입대 기한을 조금 연장해 주려고 합니다.”

 “연장이요?”

 “네, 오래는 아닙니다. 아기가 태어나는데, 아빠가 없으면 곤란할 거 같아서 아기 낳고 안정을 찾을 때까지 연장을 해주자는 것입니다.”

 “안정을 찾는 기간이 얼마나 걸리는데요?”

 그때까지 남편은 입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따지고 대들 듯이 말하는 것은 나였다.

 “한 달입니다. 한 달이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판단이 됩니다만...”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시청공무원도 남편도 청와대 직원이라는 사람도 말이 없었다.


 최고 권력기관에서 의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방법이 없다고 못을 박아 버린 것이다. 나 역시 뭐라고 떼를 써야 할지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족관계가 튼실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통념이었다.


  남자들이 주섬주섬 일어섰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을 넘기고 있는 시간이었다.


 지난했던 군대 문제는 포기를 했다. 한 달 벌었다고 해서 우리에게 도움 될 것도 없었다. 5일 장에 나가는 것도 포기 상태였다. 물건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거의 팔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구색을 맞춘다고 구비한 물건이었다. 남은 물건을 우리는 작은 방에 쌓아놓았다.


  얼마 후, 큰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입학식에 참가한 엄마들 중에 내가 제일 어려 보였다. 화려하게 한껏 치장한 정년의 엄마들 틈에, 작고 어린 엄마가 임신한 태를 온몸에 드러내며 후줄근하게 서 있었다.


  큰 아이는 어릴 때부터 내 치맛자락을 잡고 살았다. 불안한 환경 속에 주변 어른들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을 가감 없이 듣고 자란 아이였다. 그것은 아이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거기다 동생이 태어나려 한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는 더 심해져서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입학식이 끝나고,

“일 학년 삼반 어린이, 하고 부르면 네,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는 거예요! 이제 선생님 따라서 교실로 들어가는 거예요.!”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이 선 줄 앞에 서서 말했다.


네! 하고 큰소리로 대답한 아이들이 줄을 지어 교실로 향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바로  줄을 이탈해서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아이들이 웃었고 엄마들도 웃었다. 앞서 가던 선생님이 아이들을 세워 놓고 와서 아이의 손을 잡았다.

“이젠 학생이니까, 의젓해져야죠. 이제 곧 형아가 될 텐데...”

선생님이 배부른 나를 보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제일 뒷줄에 서서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들의 행렬을 따랐다. 행렬은 교실로 이어졌고 학부모는 교실 밖, 복도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엄마 따라서 집으로 가겠다고 울고불고 콧물눈물범벅이 되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아이를 이끌고 교실로 들어갔고 아이와 함께 제일 뒷줄에 앉아 입학식을 마쳤다. 그러나 그 일은 한 달로 이어졌다. 학교에 갈 때, 아이와 함께 가방을 들고 가서 교실에서 수업이 마치는 12시 무렵까지 벌 아닌 벌을 섰다.       

처음엔 교실 맨 뒤에 서 있었다, 보다 못한 담임선생님이 빈 의자를 하나 내주었다. 임신한 몸으로 오래 서 있으면 안 된다면서.


 그러던 어느 날, 낮부터 배가 살살 아파왔다. 통증의 종류가 조금 달랐다. 예정일은 아직 일주일이 넘게 남아 있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집안일을 미리 해 놓은 것이 없었다. 큰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있었다.


첫째 아이는 임신중독으로 출산한 터라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어른들이 두 번째 아이는 조금 일찍 나올 수 있다고 했었다.


 나는 큰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 챙겨야 할 과제물을 챙기고 입을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간간이 느껴지는 통증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산부인과에서는 10분 간격으로 산통이 오면 곧바로 병원으로 가라고 했었다.

 나는 시간을 재면서 냉장고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밑반찬을 만들었다.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은 짧으면 하룻밤 일 테고 길어봤자 이틀일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내가 집안일을 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이 정도의 산통이면 다음날로 이어질 수도 있을 거라 짐작했다. 그 모든 것이 주변의 아줌마들에게 주워들은 얘기들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간격이던 통증이, 갑자기 30분 간격에서 20분 간격으로, 급속히 빨라졌다. 통증의 강도도 점점 강해졌다. 입에서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동네 아줌마들 말이 다 틀렸다. 모든 상황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병원으로 가져갈 짐을 다시 점검하고 목욕을 했다. 씻고 나오는데 산통은 나의 온몸을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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