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병원에 도착해서 남편이 수속을 밟는 사이, 나는 아기를 낳아 버렸다. 입원하고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였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자궁문이 열린 상태라고 했다. 의사가 미련하다고 했다.
“2.5킬로그램, 사내아이입니다. 효자네, 2.4킬로그램부터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하는데, 딱 턱걸이네.”
간호사와 의사가 말했다.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담당의가 병실로 찾아와서 나를 깨웠다.
“오늘 이 시간부터 절대로 침대에서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내가 퉁퉁 부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의사를 올려다봤다.
“그동안 어떻게 견디셨어요? 많이 어지러웠을 텐데. 보통 사람 같으면 제대로 걸어 다니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두꺼비처럼 눈만 끔벅이고 있었다.
“분만하기 전에 빈혈 수치가 6.4였는데 분만하고 나니까 4.5로 떨어졌어요. 이대로라면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쓰러질 수 있는 수치입니다. 아주 위험합니다. 절대로 침대에서 내려오거나 걸으시면 안 됩니다. 화장실 갈 때도 반드시 보호자와 함께 가야 합니다.”
의사가 되돌아서 병실을 나갈 때까지도 나는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따금 고개를 들거나 내릴 때마다, 눈앞에 별들이 와르르~ 쏟아지거나 솟아올랐다. 그 증상은 어릴 때부터 있던 거라서 나는 폭죽놀이 하는 것처럼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빈혈수치가 정상에 가까울 때까지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완전히 정상으로 올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 빈혈을 앓아왔기에 핏줄도 얇아져 있고, 심장이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6인실이었다.
다른 산모들의 친정식구들이, 시집식구들이, 남편이, 꽃이며 과일바구니며 곰국이며 갖은 선물들을 들고 찾아왔다. 내가 차지한 침대를 뺀 다섯 개의 침대에는 하루 종일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그날 아들을 낳은 사람은 나 하나라고 했다. 다섯 명의 산모와 보호자들이 모두 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때만 해도 아들을 선호하던 시대였다.
“아이고, 애기 엄마는 좋겠네. 시댁에서 아주 좋아하시겠다. 부럽네, 부러워.”
아주 대놓고 부러움을 표현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있었다. 내 침대를 찾아오는 이는 주사를 놓고 수혈 팩을 갈아주는 간호사밖에 없었다. 그리고 때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는 식당아주머니가 있었다.
내 침대 발치에는 ‘절대 안정’이 붙어 있었다. 절대로 침대에서 내려오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혼자 걸어서 화장실엘 갔다. 나를 보호해 줄 보호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러 남편이 한차례 다녀갔을 뿐이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아기를 잠깐 면회했다. 신생아실에 누워 있는 아기 가운데 제일 작은 아기가 우리 아기였다. 간호사가 아기를 안아서 유리벽 너머로 아기의 얼굴을 보여줬다.
아기는 못 생겨도 너무 못생겼다. 얼굴은 붉었고 주름 투성이었다. 큰 번데기 같았다. 아기가 작아서 더 그렇게 보였다. 나는 아기가 바뀐 줄 알았다. 태어날 때부터 너무 예뻤던 큰 아이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 애 동생이었기에 닮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얜, 못생겨도 너무 못생겨서 얼굴을 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병원에 있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기를 면회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쯤, 엄마가 왔다. 큰아이를 학교에 보냈다고 했다. 먹고 싶은 게 없느냐고 묻는 말에,
“바나나가 먹고 싶어.”
나는 건너편 산모에게 선물로 들어온 과일 바구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나나가 먹고 싶었다.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기에 지금처럼 싸지도 않았을 때였다. 한 개에 천 원쯤 했던가. (그때 짜장면 한 그릇에 1500원 정도 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병원을 나간 엄마가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 8시쯤 되어서 돌아온 엄마는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내게 엄마는 별일 아니라고, 벽에 부딪쳤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엄마의 손에는 바나나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삼일이 지났다. 다음 날이면 퇴원이 가능할 거라고 담당의가 말했다. 나는 그날도 방문객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퇴원하는 산모들이 무수히 들어오고 나가고를 했다.
방장처럼 병실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그날 늦은 오후에 엄마가 큰 아이를 데리고 병실에 왔다. 책가방을 메고서였다. 학교가 끝나고 엄마에게 가자고 졸라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울음부터 터트렸다. 한참을 우는 아이를 달래서 숨겨놓은 바나나 한 개를 먹이고 내 곁에 눕혔다. 아이가 집에 가지 않겠다고, 엄마하고 있겠다고 떼를 썼다. 집에는 시골할머니가 어제부터 와 있다고 했다. 매일 소리 지르고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 무서워서 집에 가지 않겠다고, 엄마하고 있겠다는 것이다.
아이는 태어나서 나와 단 하루도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아이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었다.
이제 조금씩 걸어도 된다는 의사의 허락을 받고 있던 터였다. 나는 수혈받는 피주머니와 링거 병이 매달린 링거폴대를 의지하고 공중전화박스까지 걸어갔다. 어지러웠다. 병원에 입원하고 처음으로 제일 멀리 걸었다.
“어머니, 오늘은 아이를 병원에서 재울게요.”
“아니, 학교에서 올 시간이 넘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거길 갔단 말이냐?”
“네, 태어나서 처음 떨어지다 보니 아이가 돌아가지 않으려 해요. 어차피 내일 퇴원해도 된다니까, 내일 제가 데리고 갈게요.”
“어, 니네 그렇게 애를 싸고 돌아봐라. 그래서 애 꼬락서니 잘도 되겠다.”
시어머니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시어머니는 한 번도 병원에 오지 않았다. 엄마 말로는 전날 아침 일찍 시골에서 나온 거라고 했다.
“그럼 엄마, 시어머니와 함께 잤어?”
내가 병원 복도의 의자에 앉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아니 나는 교회에서 잤지. 그리고 아침에 가서 애 등교 시켜놓고 볼 일 보다가 하교시키고...”
“근데, 얼굴은 어디에다 부딪친 거야?”
“……”
나는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감지했다.
“말을 해봐. 무슨 일 있었지?”
엄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전에… 사업할 때… 빚을 좀 진 게 있었는데…”
엄마의 목소리는 젖어서 입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응, 그런데?”
내가 다그치듯 말했다.
“그 여자를 병원 화장실에서 만났어. 그 여자가 화장실 벽에 머리를 들이박고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어. 돈 내놓으라고…”
엄마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숙이고 있는 엄마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귀 위 언저리가 불룩 솟아 있었다.
“하아.”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무릎 위에 마주 잡고 있는 손등에도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엄마가 말하는 그 여자는 나도 알고 있는 여자였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엄마가 벌인 장사는 아주 잘 되었다. 밤마다 돈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들어왔으니까. 그때가 엄마에게는 평생에 최고의 대운의 해였다고, 엄마는 종종 회상했다.
엄마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계모에게 갖은 박대와 설움을 받다가 육이오가 터지고, 고아가 되었다고 했다.
그때가 열여섯 살이었다. 전쟁 중에 하나 있는 동생을 잊어버리고 혼자서 밥도 빌어먹고 일도 해주며 전쟁을 겪어나갔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겨우 동생을 찾았지만 다시 헤어지는 수난을 겪으며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다.
엄마는 늘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아버지와 헤어지자마자 남자를 만난 것도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은 욕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또한 어릴 때 부모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해서였을 거라는 걸, 나는 요즘에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잘 되던 장사를 접고 더 좋은 번화가로 가게를 옮기며 하나이던 가게를 세 개로 확장했다. 처음엔 그런대로 만족하게 매상이 유지되었다. 내가 중학교 일 학년 때, 내가 살던 중소 도시에서는 도로에 자가용 승용차가 하루 종일 보아도 몇 대 지나가지 않았다. 그때 우리 집엔 감색의 브리사라는 승용차와 운전기사가 있었다. 나는 그 차로 등하교를 했다.
잘 나가던 사업이 무너지는 데는 순식간이었다. 세 개이던 가게를 둘로 줄이고 곧 하나가 되고 하나마저도 문을 닫았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 버텨보려 애쓰던 엄마가 사채를 쓰면서 엄마의 팔자는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빚쟁이들이 집으로 쳐들어왔고 엄마는 그들을 피해 다녔다. 나와 동생은 한 겨울에 난방도 되지 않는 집에서 굶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우여곡절 속에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를 입학할 무렵 엄마가 다시 가게를 시작했다. 도망간 남자의 도움을 받고서였다. 그러나 그 가게는 매일 적자를 면치 못했다. 엄마의 한 번 기운 운세는 다시 일어서질 못했다.
후일 엄마는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너 없이도 내가 얼마나 잘 사는가 봐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도시를 떠나지 않은 거라고 했다.
“갚은 이자가 원금을 넘은 지 오래됐어. 그런데 그 여자가 원금을 안 갚았다고…”
돈 내놓으라고 사람들 많은 데서 얼굴에 멍이 들 정도로 구타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많았다.
엄마가 억울하게 두드려 맞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속상했다, 내가 아들이었으면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오후에 나는 퇴원을 했다. 3박 4일 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시어머니는 가스레인지 위에 미역국을 들통으로 한가득 끓여 놓고 있었다. 미역국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차 있었다. 시어머니는 아기를 받아 안아보지도 않았다. 이불에 싸인 아기를 남의 집 아기 보듯이 힐끔 들여다봤을 뿐이었다.
시어머니에게서는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무엇인가에 심사가 뒤틀어진 것이 분명했다. 병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잤다는 데 기분이 나빠진 것일까?
내가 해놓은 집안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나는 아기를 안방에 뉘워 놓으며 시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