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우리가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시어머니는 시골집으로 돌아가셨다. 잔뜩 화가 난 이유를 남겨 둔 채였다.
우리의 일상은 급하게 흘러갔다. 큰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아기를 보살피는 것은 너무도 바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B C G예방접종을 했다.
첫째 아이는 단 한 번도 예방접종이란 것을 해보지 못했다. 그때는 혼인신고를 못했으니 출생신고도 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예방 접종은 꿈도 꾸지 못했을뿐더러, 예방접종할 돈도 없었다.
아기를 때에 맞춰서 예방접종해야 하는 줄도 몰랐다.
한 달간 연기되었던 남편의 군입대 날짜가 어느새 하루 앞으로 다가와 버렸다. 엄마가 엄마의 승합차를 타고 다녀오라며 차키를 줬다.
다음 날, 장에 다닐 때 운전해 주던 친구에게 운전을 부탁하고 다른 친구 한 명과 나와 남편이 입대시간에 맞춰서 집을 출발했다. 4월이었지만 날씨가 쌀쌀했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아기와 큰 아이를 엄마에게 맡겼다.
훈련소 앞에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혼자 온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친구나 가족들이 동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부대 근처의 이발소부터 들렸다. 그때까지 남편은 머리를 자르지 않고 있었다.
도로변에 바짝 붙은 이발소는 몹시 허름했다. 불투명한 유리의 새시 문을 밀고 들어서자, 오래된 거울 앞에 낡은 이발 의자가 몇 개가 있었다. 비좁은 이발소 안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모두들 초조한 얼굴로, 낡아서 스펀지가 너덜거리는 검은 레자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있었다. 그날이 이발소의 대목인 거 같았다.
남편의 차례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편이 이발의자에 앉자 나이 든 이발사가 남편의 어깨 위로 가운을 씌웠다. 이발사가 능숙한 솜씨로 구형 바리깡을 들어 뒷목을 출발해서 정수리 쪽으로 밀어 올렸다. 그리곤 순식간에 깎은 알밤처럼 만들어 내놓았다. 이어서 타일로 된 세면대에 고개를 밀어 넣고는 비누칠 몇 번 하고 플라스틱물가지로 물을 뒤집어 씌웠다. 머리 깎고 감는데 십 분도 안 걸린 거 같았다.
작은 수건으로 머리를 쓱쓱 닦아내는 남편의 낯선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나는 남편의 삭발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비로소 남편의 군입대가 실감이 났다.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부대로 향했다. 입구에서 헌병들이 보호자와 훈련병들을 분리시켰다. 보호자들은 연병장 가에 있는 계단에 뜨문뜨문 앉았고 오합지졸의 훈련병들은 연병장에 줄지어 섰다. 그리고 연대장인지 대대장인지 모를 사람이 나와서 부대를 소개했다. 뒤이어 군악대가 요란하게 악기를 연주하며 연병장을 한 바퀴 돈 뒤 훈련병들 앞에 서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내 눈은 빡빡 민, 머리들 틈에 끼어 있는 남편을 찾느라 분주했다.
연병장에 바람이 불었고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가뜩이나 쌀쌀한 날씨였는데 연병장을 휘돌아 드는 바람은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몇백 명은 족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먼지바람 속에 묻혀서 자꾸만 흐리게 보였다.
“이제 보호자분들께서는 아무 염려 마시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훈련병들은 어머니! 하고 부릅니다. 어머니!”
붉은 모자를 쓴 교관이 먼저 소리쳤다.
“어머니!”하고 외치는 훈련병들의 함성이 바람과 먼지를 뚫고 공중에 울려 퍼졌다.
“자, 이제 모든 보호자분들은 계단에서 내려오셔서 안심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교관이 계단을 향해 절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편의 친구들이 내 어깨를 살짝 쳤다. 돌아가자는 신호였다. 운동장에 모여 있던 훈련병들도 인솔자를 따라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모든 보호자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는 마지막까지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구름처럼 움직이던 훈련병들이 막사의 건물 뒤로 모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 새끼들 똑바로 못해!”
훈련병들이 몰려 들어가는 막사 쪽에서 큰 소리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실신해 버렸다.
남편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차에 몸을 실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른 봄의 짧은 해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집은 텅 빈 듯 썰렁했다. 남편이 빠져나간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영원을 향해 떠난 사람을 배웅하고 온 듯했다.
다음날이 되어 아침이 밝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큰아이의 학교를 엄마가 데려다주었고 태어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아기도 엄마가 보살폈다. 나는 하루 종일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아마도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몸과 마음을 무기력하게 만든 것 같았다. 엄마가 곁에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남편이 입소하자 전화는 고장 난 듯 고요했다. 시집에서도 남편의 친구들도 안부전화는커녕, 발길을 뚝 끊어버렸다.
그 누구도 우리를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잠들어 있던 전화기가 며칠 만에 소리를 냈다. 금요일이었고 아침 열 시쯤이었다.
“나야.”
처음엔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누구… 세요?”
“벌써 내 목소리를 잊어버렸어? 나야, 나.”
남편이었다. 화요일에 입소를 한 남편이었다. 목소리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울음보를 터트렸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기에 감정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에고, 울지 마. 울지 말어. 나 조금 있으면 집에 갈 거니까, 울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남편이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돌아온 것이다. 일주일도 안 돼서.
“사실은 조금 장난을 치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우니까 더 이상 장난을 하질 못하겠더라고.”
집에 돌아온 남편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 남편은 몰라보게 살이 쪄 있었다. 빡빡 밀었던 머리가 그 사이 밤송이처럼 자라 있었다. 거기에 살이 찐 모습이 그야말로 김일성이 따로 없었다. 걱정을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제때 무한대로 먹을 수 있는 밥과 해가 지면 잠들고 해가 뜨면 기상하는 규칙적인 생활이 오히려 살찌게 한 것 같았다.
“아, 그때, 그게 끝이었어. 뭐 처음엔 군기 잡는 척하면서 오리걸음으로 막사까지 이동시키더라고. 그때 모두 다 쭉 쩔었지 뭐. 그러더니, 편히 쉬래. 훈련받는 것도 아니고 신체검사할 거니까, 훈련병들 다루듯 하진 않았어. 그냥 먹고 자고 순서대로 신체검사받는 게 다였어”
남편은 부대에서의 일을 무용담처럼 얘기했다.
훈련소에서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신체검사 중에 문제가 발견된 됐다는 것이다. CT 검사에서 뇌에 뭔가가 보였다고 했다. 군의관은 사회에 나가서 MRI검사를 할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병무청이 지정한 대학의 종합병원에, MRI검사를 받기 위해 예약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단지 남편이 돌아와 있다는 것이 좋았다. 우중충했던 집이 다시 씨끌벅적하게 사람소리 나는 것이 좋았다.
병원에 예약을 하고 집을 옮기기로 했다. 수입이 없어지면서 집세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집세를 몇 달 밀리자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아파트보다 싼 단칸방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시어머니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병원에서 퇴원하고 큰 아이와 아기의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작은 방에 처박아놓았던, 팔다 만 옷 보따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 옷 보따리가 없어진 것도 몰랐다. 그 방을 우리는 창고 삼아 썼었다. 나중엔 엄마가 거기 머물렀다.
거기 들어갈 일이 거의 없었다.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처박아 두었던 옷보따리가 있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옷보따리를 찾자, 남편이 말렸다.
시어머니가 남편과 큰 아이의 밥을 해주기 위해 우리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라고 했다. 엄마가 옷 보따리를 어딘가로 옮기를 것을 본 것이.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돈을 대준건 시집인데 왜 장모라는 사람이 물건을 가져가느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집에서 몰래.
그때부터 시어머니는 또 다른 의심의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뭐든지 친정으로 빼돌릴 것이라는…
어쨌든 우리는 이사를 했다. 큰 애도 전학을 시켰다.
이 모든 일이 단 며칠 만에 이뤄진 일이다.
남편이 전날 굶고 다음날 아침에 MRI 검사를 했다.
40-50여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검사 결과는 판독을 해야 하므로 며칠 걸릴 거라고 했다.
머릿속에 알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그 어마무시한 병무청에서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토록 군대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 사정을 헤아려 달라고, 시청이며 병무청이며 청와대에 쫓아다니고 민원을 넣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치러야 할 의무라며 입대날짜에 끌려가듯이 들어갔던 군대에서 되돌려 보냈다.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가량의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검사결과를 마주하는 날, 우리는 병원의 복도에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우리 차례를 기다리며.
대면한 의사는 별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병무청에 전해주라며 커다란 사각봉투 하나를 들려줬을 뿐이었다. 병원에서 나오며 우리는 사각봉투를 열어보았다. 사각봉투 안에는 흑백으로 찍힌 사진 몇 장과 A4용지 한 장이 달랑 들어있었다. 이십사만 원짜리 치고는 너무나 가벼웠다.
아무리 사진을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뒤집어보고 바로보아도, 우리의 눈에는 뼈만 남은 해골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병원과 의사의 이름이 적힌 하얀 백지에는 영어로 쓰인 글자가 몇 줄 있었다.
우리로서는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처럼 파파고 같은 번역기가 있지도 않았다. 영어사전을 아무리 뒤져도 의학전문용어인 그 글이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