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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Sep 05.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18)

#18.

  병원에서 사각봉투에 넣어 준 MRI 사진을 들고 남편이 병무청으로 갔다.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누구에게나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말이, 거짓된 진실임을 우리는 수없이 깨달았다.

 언제나 우리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보다 길었고 지루했다. 아이가 자라날 때도 그랬고, 힘겨운 시간들을 견딜 때마다 우리의 시간은 더디고 느렸다.

   

  그때도 우리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 오전시간이 사십 시간도 더 되는 것처럼 지나갔다. 남편을 보내고 나서 나는 전화기만 노려보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서 남편의 목소리가 전선 너머에서 들려왔을 땐 ,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뭐래?”

내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족을 붙이기엔 내가 그동안, 또 우리가 그동안 그 문제 하나를 놓고 얼마나 초조한 시간을 보냈는지 잘 알기에,

남편은 바로 말했다.

“군대에 오지 마래!”    

   

  남편은 병역면제 판정을 받았다.

 사진과 판독문을 읽은 군의관이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고 했다.

 

 종합 병원의 의사가 말해주지 않았던 머리 사진의 비밀을 남편은, 군의관에게서 들었다.

군의관은 사진을 사각형광판에 걸고 설명했다.

뇌의 앞쪽에 검은 물질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고 했다. 우리가 보기엔 검고 흰 것밖엔 보이지 않았는데 군의관은 검은 곳 중에서도 더 검고 진한 곳을 알려줬다는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악성인지 아닌지는 더 두고 봐야 하지만 이것으로 군면제를 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종양의 변화를 확인하라고 당부했다고 했다.

그리고 면제 등급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들려줬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남편을 신의 아들이라는 둥, 선택받은 자라는 둥. 하면서 놀렸다.


그러나 그 의무로부터 놓여난 자유의 기쁨은 길지 않았다. 병역의 의무에서는 벗어났지만 생활에서의 의무는 여전히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작은 아기가 백일이 됐다. 작게 태어났지만 병치레 없이 잘 자랐다. 잘 먹고 잘 잤다. 아마도 삶의 오묘한 힘이 아기의 생명을 이끈 것 같았다.

 

  백일 날, 이른 새벽이었다. 창문으로 여름의 희부윰한 여명이 밝아오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잠결에 방문을 여니까 남편의 큰 고모님이 서 계셨다. 아이들과 나는 한밤중이었고, 남편은 친구가 하는 양계장으로 일하러 가 있었다.


  시계를 보니까 새벽 5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이불을 걷어서 밀어 놓으며 큰고모님을 맞아들였다.


 “오늘이 애기 백일되는 날 아니냐?”

 “어떻게 그걸 기억하셨어요?”

 “얘 나온 날이 우리 큰 애 생일 전날 아니더냐. 그래 내가 잊지 않고 달력에 표시해 놨었지. 그래 아무도 연락을 안 했더냐?”

고모님이 잠들어 있는 아기에게 이불을 여며주며 말씀하셨다.

 “예.”

내가 아이들이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괜찮다. 아직 아침이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하니까 그동안 어른들이 나올런가 누가 알겠냐. 그나저나 이거 애 입혀라. 별 거 아니지만 백일 선물이야.”

큰 고모님은 들고 온 검은 비닐봉지에서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내셨다. 아기의 여름옷 한 벌이었다.


 “이거 비싼 건 아니다. 어릴 땐 천하게 키우라고 했어.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있다. 괜찮다. 넌 꼭 잘 살 거다. 니가 이 고생한 거 나중에 다 돌려받을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넌 꼭 잘될 거다.”

큰 고모님은 내 손을 꼭 쥐고 기도를 하셨다.

잘 살게 해 달라고, 이 고생 다 갚게 해 달라고. 아기와 이 가정을 지켜달라고.

큰 고모님은 감리교 권사님이셨다.


 기도를 끝낸 고모님은 빨리 가서 아침밥 해야 한다며 일어서셨다. 그리곤 내 손에 돈을 쥐어 주셨다. 안 받겠다고, 괜찮다고 나는 사양했다.

 “많지 않은 돈이다. 너 주는 거 아니야. 나중에 애 분유라도 한 통 사는데 보태라. 많이 못 줘서 미안하다.”

 내 얼굴을 지긋이 들여다보는 고모님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내 손을 다시 한번 더 따뜻하게 꼭 잡아 주시고 급하게 뒤돌아가셨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큰고모님의 맞벌이하는 작은 아들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 큰고모님은 밥을 해주러 잠깐 와 계셨다. 며느리에게 생활비를 받아서 생활하는 터였다.


 큰고모님이 돌아가시고 손에 들려준 돈을 펼쳐 보았다. 삼천 원이 꼬깃하게 접혀 있었다. (그때 삼천 원이면 우리 아기의 작은 분유를 한 통 사고 몇 백 원이 남았다.) 고모가 이것을 모으려고 얼마나 애쓰셨을까 싶은 마음에 마음이 아릿해져 왔다. 내게는 너무나 귀하고 큰돈이었다.


  그날, 아기의 백일이 되는 날, 시골에서는 전화 한 통 없었다. 아무도 우리 아기의 백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 같았다.

새벽에 큰고모님이 해주신 기도와 선물이 그날 행사의 전부였다.

     

 초등학교 일 학년인 큰 아이는 공부를 아주 잘했다. 학교에서 인기도 좋았고 모든 선생님들이 아껴주었다.

그것은 내 동생의 힘이 컸다.     


 큰 아이를 전학시키고 나는 걱정이 됐다. 학교생활에 적응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학까지 한 아이가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을 할지 걱정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큰 아이는 내성적이었고 소심했다.


 내가 전화 통화 중에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큰 아이를 전학시킨다고 동생에게 말했다.

 “어머, 그래. 언니, 그 학교에 내가 잘 아는 선생님이 계셔. 아마 지금은 교감선생님이실 거야. 내가 전화해 놓을 게. 걱정 마.”


 동생이 잘 아는 교감선생님은 아이의 교실까지 와서 담임선생님께 직접 아이의 학교생활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덕에 그때부터 우리 아이는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아이가 학교생활에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늦봄에 이사한 그 단칸방에서 일 년을 넘게 살았다. 그동안 남편은 대학교의 추천으로 다시 취직이 되었다.       


 남편이 취직이 되었을 무렵, 시골에 계시는 시부모님의 거대한 땅이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게 되었다. 부모님의 땅을 중심으로 종축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시부모님이 살고 있던 집과, 농지, 산과 나무까지 모두 보상에 들어갔다고 했다.


  우리는 시부모님이 얼마를 보상받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남편은 육 남매 중의 막내였다. 언감생심 시부모님의 일에 관여할 처지가 못 되었다. 큰 동서와 큰 아주버니가 무시로 시집에 드나들었고, 시부모님이 도시에 이사할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큰 동서가 시어머니와 함께 가구와 가전제품을 보러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그분들의 일이었고 어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아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정부와의 많은 절차들이 있었을 것이다. 보상의 얘기를 우리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보상의 얘기가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이사를 했다. 시골에 있던 모든 살림살이를 거의 다 버렸다. 새집엔 신혼처럼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최신형으로, 최고등급으로, 제일 비싼 것으로 채워졌다.

     

 시어머니는 농사짓는 일에 몸서리가 난다고 자주 표현하셨다. 욕심이 많고 누구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의 시어머니는 농사짓는 일을 몹시 싫어하셨다.


  남편이 어렸을 때에는 밥 하는 사람과 농사짓는 일꾼들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그때는 시어머니가 직접 농사나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고 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남의 집 살이 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져버렸다. 시골의 모든 젊은이들이 도회로 사라져 갔다. 공장을 다니는 게 힘든 농사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농사는 자연스럽게 시부모님의 몫이 된 것이다. 두 분은 그런 삶에 늘 화가 나 있었다. 가뜩이나 급한 성격은 거칠어졌을 테고  목소리가 커졌고 말투 또한 거칠어졌을 것이다. 행동이 사납고 과격해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참에 도회로 나갈 기회가 온 것이다. 시어머니가 꿈에도 그리던 삶이 펼쳐진 것이었다.

도시로 나온 시부모님의 성격이 조금은 너그러워졌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시부모님이 도시로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둘째 아기의 돌을 맞이했다.

 나는 둘째 아이 돌도 그냥 적당히 치르려고 했다. 남편이 직장에 들어간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첫 째 아이의 돌을 못해 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둘째의 첫 번째 생일은 시집의 집들이와 겸해서 치렀다.

    

  우리는 그 단칸방에서 두 번째의 가을을 맞이했다. 그때 큰 아이와 한 반인 아이 엄마가 새로 들어선 아파트에 대해 얘기했다.


“영구 임대아파트라고 알아?”

 “영구임대아파트요?”

“응, 말 그대로 정부에서 영구적으로 임대하는 아파트야. 거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영세민들만 들어갈 수 있대. 그런데 거기 들어갈 영세민들이 부족해서 일반인들에게도 들어갈 기회를 준다는구먼.”

 내 귀가 번쩍 뜨이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거길 들어갈 수 있는데요?”

“동사무소에 가서 알아봐. 나도 신청하고 왔어. 빨리 가야 할 거야. 얼마 남지 않았어. 선착순 이랬어”

나는 그 길로 곧장 동사무소에 달려가서 영구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미 입주가 시작된 영구임대아파트는 13평이었다. 13평이라고는 하지만, 엘리베이터와 계단, 복도, 공동공간 등을 빼면 실제 주거공간은 열덟 평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작은 옷장과 책상 하나 놓고 두 명이 겨우 몸을 눕힐 정도의 작은 방과, 화장실, 작은 주방과 거실을 겸한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방 앞으로 좁은 베란다가 있는 구조였다.

그렇더라도 나는 너무 좋았다. 더 이상 주인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고 작지만 큰 아이에게 방을 줄 수도 있었다. 중앙난방이라서 시간 맞춰서 연탄불 갈아야 하는 걱정도 없었다.

집세도 저렴했다.

우리는 그때까지 열세 번의 이사를 해왔던 터였다.


  우리는 입주신청을 하고 채 두 달이 되지 않아서 영구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큰 아이의 학교가 좀 멀리 있다는 것이었다.

그 먼 거리가 훗날, 큰 애의 장래에 크게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걸 우리는 그땐 알지 못했다.      


  큰 아이는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동생이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은 여전히 교감으로 계셨다. 선생님은 정기적으로 아이의 교실에 찾아가기도 했고, 큰 아이가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잊지 않고 담임을 찾아가서 내 대신 우리 아이를 부탁하는, 청탁 아닌 청탁을 해 주셨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큰 아이는 반장을 도맡아 했다. 그때는 초등학교에서도 다달이 시험을 봤다. 우리 아이 성적표엔 “우”가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수”였다.

큰아이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엉엉 울면서 돌아왔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내내 울면서 왔는지, 얼굴은 이미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얼룩 투성이었다. 내가 놀라서, 왜 우는 것이냐? 무슨 일이냐고? 고 아무리 물어도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계속 울기만 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나는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이는 잠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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