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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Sep 12.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19)

  19.

 “문 열어봐.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엄마가 알 거 아냐. 문 좀 열어봐.”

 나는 몇 센티도 되지 않는 방문을 사이에 두고 아이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그러나 방 문 너머에서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급기야  안방 서랍장 속에 넣어두었던 열쇠꾸러미를 찾아서 아이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는 방의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도 몸을 풀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이렇게 울고만 있는 거야? 엄마한테 말을 해봐.”

나는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게 큰 아이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언제나 죄책감이 들었다.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씻으려는 마음에서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주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고 믿었다.


  여전히 아이는 말없이 흐느끼고만 있었다.

“너, 이러면 정말 엄마, 화낸다. 빨리 말하지 못해!”

내가 살짝 언성을 높였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아이가 겨우 목이 맨 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을 해야 해 줄 수 있는지 없는지 알 거 아냐. 엄마가 지금까지 니가 하고 싶다는 거 안 해 준 거 있어? 얼른 말해봐.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거면 뭐든 해 줄 테니까.”


“엄마, 윤배, 알지?”

 아이가 콧물을 훌쩍이며 말을 시작했다.

윤배라는 아이는 나도 알고 있었다. 윤배와 우리 아이는 제일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가끔 그 아이네 집에서 놀다 오곤 했다. 학교에서도 늘 붙어 다녔다. 윤배네 아빠는 지방대 교수라고 했다.

 “어제 윤배가 자기네 집에서 놀자고 해서 걔네 집엘 같이 갔는데…”


 학교가 끝나고 함께 윤배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기로 하고 집에 가방을 놓고 오겠다며 들어간 윤배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질 않더라는 것이다. 기다리다 지친 우리 아이가 윤배네 집으로 찾아갔더니, 윤배 엄마가 윤배가 집에 없다고 했다. 그 집에 들어가는 입구는 단 하나였고, 우리 아이는 윤배의 집 일층 계단에 앉아 있었다. 윤배가 다시 집에서 나가려면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나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제가 일층에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윤배가 나가는 것을 못 봤어요.”

“내가 없다면 없는 거지. 무슨 말이 그리 많은 거니? 그리고 너, 어디 살아?”

“영구 임대아파트요.”

우리 아이가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 말이 맞구나. 알았으니까 얼른 집에 가. 윤배는 없어.”

매몰차게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 어제였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학교에서 만난 윤배는 하루 종일 우리 아이를 피하더란다. 우리 아이는 학교가 끝나고 일부러 윤배를 기다렸다가 어제 일을 따졌다는 것이다.

 “우리 엄마가 너하고 놀지 말래.”

 “왜?”

 윤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우리 아이는 몹시 당황했다고 했다. 집에 놀러 가면 간식을 내주며 윤배와 친하게 지내라고 했던 윤배엄마였다. 학기 초에 우리 아이가 반장에 선출되고 모인 자모회에서도 윤배엄마는 나를 일부러 찾아와서 우리 아이가 윤배의 친구인 것이 너무나 기쁘다고까지 말했다.  

 “너, 사는 곳이 영구임대아파트라고, 거기 사는 사람들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고, 우리 엄마가 다 거지랬어.”

윤배의 말에 우리 아이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도 남편도 아이도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영구임대아파트에는 일곱 개 동에 천오십 세대가 살았다. 한 동이 백오십 가구였다.


 내가 살던 도시에서 처음으로 시범 삼아 저소득층에게 주거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시행한 아파트였다. 세대를 이룬 대부분이 국가유공자와 영세민, 그러니까 기초수급자였다. 시청에서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동엔 일반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국가유공자와 기초수급자에게 임대하려 했지만 전 세대를 다 채우기엔 이런저런 이유로 자격이 되는 입주자가 부족했다. 그 나머지 부족분을 저소득 일반인에게 임대해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을 외부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학교 엄마들 사이에서는 이미 굉장히 저급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평가하는 모양이었다.

“엄마, 우리 이사 가자. 당장 이사 가자. 우리 거지 아니잖아. 맞지? 우리 거지 아니지?”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나는 또 한 번의 막막함을 느꼈다.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미 우리는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신축 아파트의 편리함에 젖어 있었다. 이제는 단칸방에 네 식구를 욱여넣기엔 아이도 너무 커버렸다. 큰 아이가 2학년이었다.

공부방도 필요했다.

    

 그때 남편에게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다니던 회사보다 훨씬 큰 기업에서였다. 동종업계에서는 최고였다.

 문제는 경력사원으로서가 아니라 신입사원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3개월 동안 수습기간을 다시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석 달은 월급이 30%나 줄어든다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먼 장래를 생각하면 잠깐의 어려움은 견뎌야 한다고 우리는 판단했다.

     

  나는 나도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석 달을 버틸 생활비도 충당해야 하고 이사도 고려해야 했다. 일은 초등학교 2학년 생과 두 돌이 겨우 지난 아기를 데리고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진을 찍는 카메라엔 필름을 넣어야 했다. 필름을 인화해서 사진으로 현상하는 때였다. 사진을 찍은 필름을 사진관에 맡기면 사진관에서는 현상소에 보냈다.

 현상소에서는 본사로 보냈고, 본사에서 인화하고 현상해서 사진으로 만들었다. 본사에서 완성된 사진을 현상소에, 현상소에서 다시 사진관으로 보냈다. 그 모든 과정의 중간 역할을 현상소에서 했다. 코닥이나 후지필름회사에서는 지역마다 현상소를 두고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지역 정보지에서 한 필름 현상소에서 배달 사원을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봤다. 필름 회사에서 우편이나 버스 편으로 현상소에 보내온 사진들을 각 사진관에 전해주고 오는 일이었다. 인화할 필름도 수거해야 했다.


  나는 아기를 큰 아이에게 맡겨 놓고 현상소에서 면접을 봤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여섯이었던가?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나이였고 외모도 그리 둔해 보이지 않았는지 나는 그날 바로 합격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출근하는 첫날, 나는 아기를 안고 갔다. 현상소 소장의 기겁을 하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니, 그 아기를 안고 일을 할 작정인 거예요?”

“네, 저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아주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로 일을 시작해야 했다. 배달직원이 그만 둔지 이미 일주일이 넘은 상태였다. 사진관에서 독촉을 받고 있었다. 사진관에 보내야 할 사진과 수거해야 할 필름이 잔뜩 밀려 있다고 했다. 당장 누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소장은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내게 일을 맡기기로 한 것 같았다.    

 

 나는 현상소에서 들려준 커다란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둘러매고, 왼쪽에는 기저귀와 아기분유가 든 가방을 메었다. 그리고 앞으로 아기띠를 둘러맸다.

현상소 가방에는 결혼식 사진이나 회갑, 환갑, 가족사진 같은 대형 사진들이 들어 있었기에 꽤 무거웠다.

완전 군장이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아침 열 시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3시간을 달려갔다. 나는 중간에 두 번을 내려야 했고, 종점에 있는 세 번째의 사진관에 들러서 사진을 돌려주고 필름을 회수해야 했다. 그 버스를 타고 오갔을 때 세 시간인 거고, 그 버스 놓치면 하루 종일이 될 수도 있었다. 버스는 하루에 네 번밖에 운행되지 않았다.

다행히 사진관은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꾀를 썼다. 아기는 안고 버스에 아기의 짐을 두고 내리며,

“기사님, 저 앞 사진관에 사진 좀 전해 주고 올 건데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버스기사님은 내 얼굴과 품에 안긴 아기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나는 뛰기 시작했다. 사진을 던져주고 필름을 회수하고. 그 시간은 채 오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종점에 있는 세 번째 사진관에서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를 바로 탄다면, 일곱 시간 안에 다시 아침에 출발했던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몇 주 버스를 타다 보니 이젠 버스 기사님도, 승객들도 다 아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아유 새댁, 아기 나한테 두고 갔다 와. 내가 안고 있을게. 어떻게 매번 안고 뛰노.”

기사님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게요. 힘도 좋아, 젊은 게 좋긴 하다. 천천히 갔다 와. 안 가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처음엔 사진을 던져 놓고 바통터치 하듯 되돌아 부리나케 뛰던 것이 천천히 걸어서 와도 되었다. 나중엔 버스를 아예 사진관 앞에 세워놓고 기다려 주었다. 불평하는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차창밖으로 나를 구경하듯 내다보고 있었다.

      

  버스 승객은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부모님처럼 나를 대해주셨다. 도중에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 줄 수 있게 뒷자리를 양보해 주셨고 점심 먹었느냐며 간식을 나눠주시기도 했다. 사진관사장님들도 자신들이 도와줘야 타고 왔던 버스를 도로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방향이 같은 차가 있으면 잡아주기도 했다. 집에 가서 먹으라며 먹을 거를 일부러 챙겨놨다가 주기도 했다.

모두가 정이 많은 시골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나는 월급으로 삼십오만 원을 받았다. 점심값, 천팔백 원(그때 짜장면이 천팔백 원이었다.)과 버스비 삼천 이백 원을 매일 현금으로 지급받았다. 그 당시 그리 적은 월급이 아니었다. 만약 돌아오는 차를 얻어 타고 점심을 먹지 않으면, 이틀에 한 번씩 큰 아이에게 치킨 한 마리를 사 줄 수 있었다. 저녁 반찬값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남편의 수습기간이 끝나고 내가 매달 받는 월급으로 적금을 들었다. 그때는 금리가 꽤 높았다. 한 달에 이십사만 원 정도를 불입하면 삼 년에 천만 원을 찾을 수 있는 적금이 있었다.

     

 나는 집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가 굴욕적인 마음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했다.


 건설의 붐이 일고 있을 때였다. 여기저기에 신축 아파트가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지방 중소도시였기에 청약저축을 들지 않았더라도 돈만 있으면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가 널려 있었다. 나는 제일 빨리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를 알아봤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의 아파트라야 했다. 평수가 클 수는 없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 데도 무리가 없어야 했다.

     

 나는 남편에게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덜컥 아파트를 계약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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