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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Sep 19. 2024

나는 원조"고딩엄빠"다.(20)

                                     20.

  내가 계약한 아파트는 시청에서 짓는 시영아파트였다.

      

  21평이었고, 분양금액은 삼천 칠백만 원이었다. 천사백만 원이 장기융자로 지원되고 나머지는 입주할 때까지 분기별로 내야 했다. 입주가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 보통의 아파트처럼 터를 닦으며 분양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건물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 분양했다. 그래서 입주가 빨랐다.


  내 계산대로라면 적금 붓는 것에서 대출을 받고, 나머지는 시집에 보증을 서 달라고 해서 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내게는 그동안 붓고 있던 곗돈이 있었다. 제일 끝 번호로 탈 생각이었다. 그래야 이자가 높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 알고 지내던 계주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번호를 바꾸었다.  

   

  첫 번째 납입을 하고 남편에게 계약한 아파트의 얘기를 꺼냈다.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반대만 하지 마. 내게도 다 계획이 있으니까, 애들도 커 가는데 언제까지 남의집살이만 할 순 없는 거잖아.”     


 그때 남편의 회사에서 법인자동차를 직원에게 불하한다고 했다. 현대 자동차의 “엑셀”이었다. 남편은 그 차를 불하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파트의 입주금에 허덕이던 우리에게  여윳돈이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남편이 시집에 그 차 이야기를 꺼냈나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시집에 가는 걸 좋아하는 눈치였다. 시골에 있을 때는 그토록 집에 가는 걸 싫어하던 남편이었다.   

   

  아직 시집이 시골에 있을 때는 농사철이 되면 모든 자식들이 들어와 농사일을 돕길 원했다. 철마다 바쁜 일손을 돕지 않으면 쌀과 채소나 양념을 가져다 먹지 말라고까지 했다. 시집에 들어가면 새벽부터 일을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두 분의 성격을 맞추는 것이었다.

시부모님은 말끝마다 욕을 달고 살았다. 성격이 급해서 뭐든지 빨리 못한다고 고함을 질렀다. 평소에도 목청이 컸다. 그것을 견뎌야 하는 것이 나는 너무 무서웠다.

      

  형제들은 모든 휴가를 시골에서 보내야 했다. 남편은 막내답게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들어가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러면 나는 아이를 데리고 혼자 들어가 밥하고 빨래하는, 집안일을 했다. 그러던 남편이 시집이 도시로 이사를 나오고는 자주 찾아가는 눈치였다. 물론 이해는 갔다. 넓고 좋은 집에, 완벽하게 갖춰진 집에서 훨씬 너그러워진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시부모님이 남편에게 그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했다. 차 값은 백만 원이었다.

어찌어찌 자동차가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졌다. 남편에게는 아직 운전면허가 없었다. 차를 가져다 놓고 운전면허를 따러 다녔다.


  남편이 조금씩 삶에 활기를 느끼는 것 같았다. 큰 회사에서 취직되었고, 비록 중고차지만, 그때 그리 흔하지 않은 자가용을 갖게 됐다. (그 넓은 아파트 주차장에 자가용자동차가 몇 대 없었다. 그 몇 대되지 않은 차 중에 한 대가 우리 차였다.) 부모님은 정말 부모답게 대해 주었으니 별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성실하게 살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시부모님께 아파트 이야기를 꺼냈다.

“뭐어, 집을 산다고?”

“네, 아이가 학교에서 거지들의 아파트에 산다고 놀림을 받아요. 그리고 여기도 이년이면 재계약을 해야 하는 데 얼마 남지 않았고요. 이제 이사도 다닐 만큼 다녔잖아요.”

“얘가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니 주제에 무슨 집을 산다고 하는 거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악착같이 모아 집을 장만하려고 한다면 잘했다 칭찬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주제에 무슨 집을 사려고 하냔다.


 “집 사는 주제가 따로 있는 거 아니잖아요. 조금만 도와주세요. 돈 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냥 보증 한 번만 서 달라는 거예요. 이사하고 등기 나오면 바로 갚을 게요.”

“아니 돈도 없이 빚으로 집을 산다는 거냐?”

“어머니, 제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애 아빠 여태 놀다가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동안 먹고 산 게 용한 거죠.”

“우리는 보증 못 서 준다. 그러니 사든지 말든지 니 알아서 해라.”  

   

  막막했다. 두 번째 납입금을 기간 안에 못 내면 계약이 무산되고 그동안 납입한 돈에서도 손해를 볼 수 있었다. 납입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은행에 서류를 넣어도 심사하고 돈이 나오는데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다. 나는 애가 탔다. 천만 원 적금을 들어 놓은 곳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해도 몇 달 더 부어야 대출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당장 돈이 나올 수 있는 곳은 시집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시집엘 찾아갔다. 마침 시아버님이 집에 계셨다.

“아버님, 한 번만 도와주세요. 큰 집을 사겠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남의집살이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월세 나가는 돈으로 대출금 갚으면 언젠가 집은 남는 거잖아요.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많은 것도 아니에요. 팔백만 원이에요. 그 돈 보증 한 번만 서 주세요. 이사하고 등기 나오면 바로 갚을 게요.”

 나는 거실에서 시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빌다시피 했다.


“그 돈이면 되는 거냐? 그 돈이면 아파트 이사 가는데 문제가 없는 거냐?”

“네, 그다음 돈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알았다. 서류 뭐가 필요한 지 가져와봐라.”

나는 미리 들고 간 서류에 시아버지의 인감도장을 받았다.

“너, 그 돈 꼭 갚아야 한다. 이사하고 바로 갚겠다고 한 거 잊지 마라. 우리한테 뭐라도 날아오면 너 그땐 알아서 해라.”

시어머니가 도장 찍는 시아버지 옆에서 말했다.

“그럴 일 없을 거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그다음 납입금은 적금 붓던 은행에서 대출을 냈다. 남편이 든든한 직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관리소에 입주 날짜를 신고했다. 이사로 인한 복잡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제일 빠른 날짜를 선택했다.

 아이를 하루라도 빨리 거지 아파트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우리가 이사할 때 시어머니는 제일 큰 냉장고를 선물로 사주셨다.

 짐이 들어오고 쓰레기가 나가고 관리소에서 사람들이 오고 가고, 이사하는 날은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집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때 남편이 시집에 맡겨놓은 아이들을 데려왔다.


“엄마, 나 이제 숨 좀 쉬는 거 같아.”

 큰 아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한 말이다. 나는 큰아이의 말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어린 것이 학교에서 얼마나 기를 죽여 살았을까 싶어서였다.


 그때까지 아이들은 집을 구경도 하지 못했었다. 지금처럼 모델하우스가 있지 않았다. 시청에서 제시하는 구조도와 면적과 방향만 보고 계약하는 때였다. 통에 숫자를 쓴 은행 알을 넣고 돌려서 동, 호수를 추첨했다.    

 

  두 아이가 이방 저 방을 뛰어다니며 깔깔거리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21평이면 그리 넓은 집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이었다. 비록 빚투성이에 올라앉았지만 우리 집이었다.


 거실도 있고 주방에 식탁을 놓을 수도 있었다. 안방은 넓었고 아이들 방도 커졌다. 욕실엔 욕조도 있었다. 아이들은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놓고 물장구를 치며 놀 터였다.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는 넓었다. 빨래를 널 수도 있고 예쁜 화분도 내다 놓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천정을 뚫었고 시월의 햇살은 맑고 청량했다. 열어놓은 창문에서 시원하고 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날은 이사하는 날이었기에 아이들이 아무리 뛰어도, 어떤 시끄러운 소리에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다 이해해 줬다.

 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처럼 모두가 너그러웠다.

   

  어느 정도 집이 정리되었을 때 집들이를 했다. 나는 자랑하고 싶었다. 시집 식구들과 남편의 직장 동료들과 남편 친구들을 모두 초대했다. 하루에 하지 못하고 사나흘 동안 매일 손님을 치렀다.     


“야, 야, 그래도 니네 어머니가 마음을 크게 썼다야. 이런 집도 다 사주고.”

집들이에 오신 남편의 큰고모님이 주방에 오셔서 내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말씀하셨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이 집, 니 어머니가 해준 거라며. 이제 걱정 없다야. 남의집살이 설움 안 당해도 되니. 그 소리 듣고 내가 눈물이 다 나더라. 얼마나 고마운 지….”

“누가 그래요?”

“저 번에 동네 친목계에서 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던데, 막내네 집 장만해 줬다고. 그래서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 잘했다고 했어.”

“아니에요. 고모, 이거 제가 대출내서 산 거예요. 어머님이 도와주신 거는 대출 낼 때 보증 조금 서 준 거밖에 없어요. 그것도 이 집 등기 나오면 바로 갚기로 하고 해 준 거예요.”

“그럼, 전에 살던 아파트는 네 어머니가 해 준 거 아니었니?”

“그 아파트는 임대아파트였어요. 나라에서 싸게 빌려주는 아파트였죠.”

“네 어머니 말로는 그 아파트도 자기네가 해준 거라던데?”

“아니에요. 그건 사거나 팔 수 없는 집이었어요. 영원히 임대만 해주는 아파트였어요. 그래서 영구임대아파트잖아요.”

“그러면 그렇지. 내 어째 이상하다 했다. 동네방네 떠들 지나 말든가….”

고모님이 거실 쪽을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시집이 도시로 나오고 조금 편하게 명절을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골에서 명절을 쇨 때는 여자들이 명절 준비할 동안 남자들은 밭에서 일을 해야 했다. 특히 가을걷이가 한창인 추석 때는 더욱 그랬다. 힘든 일을 명절 연휴 안에 다 끝마치려는  시부모님의 언성은 더 높아졌고, 안 하던 일을 하는 남자들은 지쳐서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 중간에 있는 며느리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 눈치를 보느라 늘 전전긍긍했다.  

    

 도시로 이사 나오고부터는 힘쓸 일이 없는 남자들과, 언성 높일 일 없는 시부모님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명절이 다가오기 몇 주일 전부터 시어머니가 명절 음식에 쓸 재료들을 준비해 놨다. 그러면 명절 하루 전, 아침에 며느리들이 모여서 전을 부치고 반찬을 하고 고기를 볶았다. 명절날은 여느 집처럼 아침을 먹고 산소에 다녀오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모두가 개신교인들이었으므로 예배로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녁 때나 그다음 날, 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공식적인 행사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명절이 끝나고 모두가 다 돌아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너 집으로 좀 올라와라.”

시어머니의 전화였다.  

   

  이어진 명절연휴였기에 늦잠을 자거나 어수선한 집을 청소하고 있었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너, 네 형에게 뭐라고 한 거냐? 네가 먼저 시작했다며?”

“네? 무슨… 뭐를요?”

“너 뭐라고 했어?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말거리도 되지 않는 거였다. 대부분 시어머니 흉을 봤다는 건데, 며느리들이 모이면 시어머니 흉도 볼 수 있고, 남편 흉도 볼 수 있는 거라는 걸 그땐 몰랐다. 우리는 모두 다시 시집에 모이거나, 전화로 누가 먼저 시어머니 흉을 보기 시작했는지를 가려내야 했다.

      

  시어머니는 내가 제일 만만했는지, 가장 어린 나에게 먼저 전화했다. 처음 시작이 나였다는 거였다. 나는 그리 논리 정연한 인간이 못됐다. 말주변도 그리 좋지 않았다. 누군가 다그치면 머리가 하얘지기도 했다. 누가 먼저 그 별 것도 아닌 얘기를 꺼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삼자대면을 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떠들고 나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모를 그런 얘기에 대해서.


  명절을 쇠고 나면 온 집안이 시끄러웠다. 시어머니는 누가 먼저 시어머니 흉을 봤냐고 집집이 전화를 걸어 따졌고, 남편들은 왜 분란을 만드느냐고 아내들을 족쳤다. 그러다 보니 명절의 뒤풀이는 각 집의 부부싸움으로 끝이 났다.

     

  명절증후군이 오는 이유가 우리 집에서는 온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해야만 하는 노동의 강도 때문이 아니었다.

 뒤에 어떻게 해서든 나오고야 말, 시어머니의 트집이 문제였다.


  그리고 후렴처럼 반드시 뒤이어 따라오는 부부싸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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