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사를 마치고 한동안 우리의 삶은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 선 듯 보였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집을 장만했고, 비록 중고차지만 그때 흔하지 않은 자동차도 있었다. 남편은 괜찮은 직장에 다녔고, 큰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작은 아이는 작게 태어났지만, 건강했고, 애교가 아주 많은 재롱둥이였다.
우리는 주말이면 온 가족이 차를 타고 캠핑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다. 이사하고 처음 찾아온 설에는 내가 우리 집에서 전을 부치고, 고기를 재우고, 잡채거리를 장만했다. 타지에 거주하는 형님들을 대신해서였다. 주방이 어느 정도 넓었고, 저장해 놓을 수 있는 베란다와 냉장고가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한 요리를 좋아하셨다. 네 며느리들 중에 내가 요리를 가장 잘한다고 하셨다. 그것은 욕먹고 구박을 받으며 시어머니의 비법(?)을 전수받아서였을 것이다.
큰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안정적이다 생각했던 몇 개월이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언제 등기가 나오는 것이냐며 보증에 대한 독촉을 했다.
등기가 나오자마자 시집에서 보증서 준 은행돈부터 갚았다. 여기저기 융통했던 모든 빚도 두 은행에 집을 저당 잡히고 갚았다. 돌려 막기를 한 셈이다.
그때 남편의 월급은 오십 팔만원이 조금 넘었고 보너스가 600%였다. 그러나 생활해 나가는 데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부족했다. 매달 나가는 이자가 만만치 않았다. 나는 은행에서 오는 고지서와 카드 명세서, 공과금 고지서를 숨기기 시작했다. 미처 내지 못해서 독촉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남편은 뭐든 미뤄서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만약 들키는 날엔 큰 싸움이 벌어졌다. 남편에게 숨겨야 할 비밀이 자꾸만 늘어났다.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불안했다.
아이들도 점점 커가고 있었다. 들어가는 교육비도 늘어났다. 전교에서 늘 상위권을 유지하는 큰 아이에 대한 욕심이 컸던 탓이다.
내가 만나는 학교 엄마들은 다들 나보다 열 살에서 스무 살은 많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에서 자리 잡을 시간과 여력이 나보다 훨씬 앞섰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비하면 우리는 맨땅에 헤딩한 사회 초보나 마찬가지였다. 물려받은 재산 없이, 재산이라고는 겨우 빚투성이인 작은 집 한 채 겨우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 속에서 내가 듣는 거라곤 어떤 학원이 잘 가르친다거나, 서울 대학교에 재학 중인 과외 선생이 있는데 한 달 교습비가 얼마라는 둥, 자기 아이는 학교 끝나고 학원 두 탕 뛰고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과외를 학과별로 받으며, 주말엔 하루 종일 과외를 받는다는 얘기들이었다.
육 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중학교의 수업을 받고 있었다. 선행학습이었다. 각종 경시대회에 나가서 상을 휩쓸어 오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엄마들은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총명탕이라는 한약을 먹이고 있었다. 비타민과 영양제는 기본이었다.
그것도 우리 아이의 공부가 상위권이라서 끼워 주는 정보였다.
나는 아이에 대해 기대가 컸다.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우리 같이는 만들지 말자는 무언의 약속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아이가 공부에만 매진해줬으면 싶었다.
우리는 알았다. 가진 것 없는 놈이 출세하는 길은, 공부를 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야 나중에 아이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리라는 것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이가 5학년 때부터 지역에서 유수하다는 과학학원과 수학학원을 보내고 있었다. 소문만큼 학원비가 비쌌다. 대출에 대한 이자와 아이의 학원비.
허리끈을 아무리 졸라 매도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매달 마이너스를 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목을 졸라왔다. IMF가 오기 몇 해 전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때 남편 친구의 아내 되는 사람이 식당을 해보라고 권했다. 사람들의 외식문화가 이미 활성화된 시기였다.
직장만 있으면 신용카드를 마구잡이로 발급해 줬다.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신용카드는 의식주 시장의 모든 틀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이미 전반적인 소비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88 올림픽과 함께 들어온 나이키, 아디다스, 아식스 같은 외국브랜드가 지방으로 몰려 내려왔다. 의류에서 메이커라는 것이 정착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전에는 모두가 시장의 브랜드를 입고, 신었다. 물가가 상승한 시기이기도 했다.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고 기억한다.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여유가 있었다. 마치 폭풍우가 몰려오기 전처럼 평화로웠고 흥청거렸다.
그때 나는 식당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남편에게는 의논하지 않았다. 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어떤 것에도 새로운 시도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편해했다.
나는 남편 모르게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사십만 원 하는 신축건물의 일층을 계약했다. 계약금에 갖고 있는 모든 돈을 털어 넣었다. 이십 평짜리 두 개를 헐어 사십 평으로 개조할 생각이었다.
안에는 크게 인테리어 하지 않기로 했다. 돈도 없었고, 어느 정도 식당을 일으킨 다음에 넘길 생각이었다. 그렇더라도 돈은 처음 예상했던 예산을 자꾸만 넘어갔다.
나는 그때부터 사채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내게 식당을 권했던 남편친구 아내가 달러돈을 주선해 줬다. 달러돈이라는 것은, 이자가 원금의 10%였다. 그것도 모자라 일수도 썼다. 일수는 백만 원을 빌리면, 매일 만 삼천 원씩 백일 동안 갚아나가는 것이었다.
명색이 식당인데 그래도 매일 만 삼천 원이야 갚을 수 있지 않겠냐 하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엄마는 반대했다. 일수 쓰면서 성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집도 담보를 뺄 만큼 뺐고, 남편의 신용카드 세 개는 이미 이리저리 돌려 막고 있는 상태였다.
한 달을 넘게 내부와 외부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식당을 활성화시킨 다음에 넘길 생각이었지만 인테리어 공사를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십 평짜리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는 것으로 공사가 시작됐다. 바닥을 다시 다듬고 이십 평은 온돌을 깔았다. 나머지 이십 평에는 입식으로 탁자를 놓기로 했다.
도시가스 공사와 전기 공사를 했다. 수도공사와 실내 공기를 순환시키는 닥트공사도 해야 했다. 정화조도 식당허가에 맞게 재정비했다. 냉난방기기와 냉동고와 냉장고가 들어오고, 식탁과 의자, 싱크대와 개수대를 설치하고 간판을 달았다. 조금 사이즈가 큰 TV도 한 대 들여놨다.
그 사이에 나는 시청과 보건소에서 영업 허가를 냈고 보건증을 발급받았다.
마지막으로 그릇과 도마, 칼과 수저, 냄비와 불판, 수저통에 냅킨까지 집기 일체가 주방업체에서 들어왔다.
거의 완벽하게 식당이 모양새를 갖춰졌다.
개업을 닷새 앞두고 남편에게 털어놨다.
이미 남의 집을 다 때려 부숴서 모양을 완전 딴판으로 만들어놨고, 허가까지 다 받아놨는데 제가 어떡할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미 간판엔 불이 켜져 있었다.
건물 앞에 차를 댄 남편이 입을 떡 벌렸다. 사람이 너무 엄청난 일을 당하게 되면 화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보았다.
남편이 간판이 걸린, 제법 그럴듯하게 꾸려진 식당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걸 혼자 다 한 거야?”
“응”
"언제?"
"자기 출근하고 큰 애 학교 보내고 나면, 작은 애 데리고 나는 여기로 출근했어."
나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걱정하고 우려했던 것보다 남편의 태도는 순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남편이 말했다.
“언제 오픈할 생각이라고?”
“닷새 후 금요일에 할 생각이야? 그래야 사람들이 많이 올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러면 빨리 여기저기 알려야겠네. 오픈한다고. 그래야 개업 발을 받을 거 아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쨌거나 잘 돼야지. 야, 그래도 이건 좀 너무 했다.”
그때부터 남편이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남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총동원했다. 시집에도 알렸다.
“이 큰 식당을 혼자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종업원은 다 구했냐?”
시어머니가 아들이 식당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와서 보고 말했다.
“그게 문제예요. 아직 주방장을 구하지 못했어요. 반찬을 잘하는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가만있어봐라. 우리 일층 식당에 있던 여자가 있는데 솜씨가 아주 좋아. 성격도 깔끔하고 부지런해. 내가 한 번 연락해 볼게. 아직도 집에서 놀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댁은 상가건물인 일층을 세 주고 있었다. 그중에 식당이 있었는데 그 식당의 주방을 봐주던 여자와 시어머니가 친하게 지냈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마침 놀고 있었고 시어머니의 부탁으로 우리 주방을 봐주기로 했다.
내가 문을 연 식당은 주로 삼겹살을 팔 생각이었다. 식당경험이 전혀 없는 내가 접근하기 좋을 거 같았고, 별다른 기술 없이도 손님상에 내놓기 쉬울 거란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고기는 받을 때마다 맛과 질이 달랐고, 삼겹살만 내놔서는 매상을 크게 올릴 수 없었다. 구색으로 김치찌개, 된장찌개를 비롯한 각종 찌개류와 냉면과 소면도 있어야 했다. 거기다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손님을 위해서 소고기도 필요했다.
더군다나 일명 스끼다시라고 부르는 곁반찬이 있어야 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도 만들 줄 몰랐다. 식당을 하려면 식당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야 했다. 서빙과 주방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 장사라는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식당이라고는 돈 내고 내주는 음식을 먹을 줄만 알았지 주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주방에서 어떻게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지, 서빙은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내 식구 먹인다는 마음으로 하면 된다는 무모한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사는 달랐다. 음식을 만드는 것도 달랐고 손님에게 음식을 차려 내가는 방법도 달랐다.
주방을 오래 봐왔다는 어머니가 소개한 여자는 척척 일을 잘해나갔다. 우리는 개업을 삼일 남겨두고 그 모든 것을 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을 볶듯이 해나갔다.
개업 떡을 맞추고, 개업 인사에 쓸 기념품인 수건을 맞췄다. 고기와 주류를 주문하고, 채소와 양념류를 식자재상에 주문했다. 고기를 보기 좋게 썰어 미리 냉동고에 넣어 놓았고, 채소를 다듬고, 김치를 절이고 무치고, 물김치를 담갔다. 모든 것이 경험이 많은 주방아줌마의 지시로 이뤄졌다.
개업 첫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손님이 훨씬 많이 왔다. 고용한 종업원이 모자라 전화로 긴급 아르바이트생을 지원요청해야만 했다. 미처 고기를 썰어 내갈 수가 없었다.
식당 문밖에는 여기저기서 인사로 보내 준 화환이 너무 많아서 두 줄로 세워야 할 정도였다. 그것은 남편이 그동안 사회생활을 착실하게 잘해왔다는 징표이기도 했다. 문전성시를 이룬 덕택으로 며칠 만에 외상으로 밀려있던 집기와 인테리어와 간판 대금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개업 발은 길지 않았다. 삼겹살 맛이라는 게 어느 식당이라고 해서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품목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우리 식당은 아주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아는 인맥이 팔아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의 눈에 뜨여야 하는 데 그러기엔 쉽지 않은 위치였다. 집세가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맛있고 오래된 맛 집이 차고 넘쳤다. 그 속에서 경험 없는 내가, 새로울 것 없는 삼겹살로 버티기엔 역부족이었다.
일수 돈이 밀렸고 달러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나는 아침 열 시 삼십 분부터 밤 열두 시까지 식당에 나와 있었다. 작은 아이를 데리 고서였다. 하루 종일 식당에 함께 있던 작은아이는 육 학년이었던 큰 아이가 학원에서 오면서 집으로 데리고 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동안 퇴근한 남편은 시집으로 가서 시부모와 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 시부모는 남편에게, 내가 돈을 친정으로 빼돌리나 조심하라는 둥, 식당에 오는 손님들과 바람이 나는 것은 아니냐는 둥의 얘기를 주입시킨 것 같았다.
내가 식당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남편은 몰래 와서 식당 안을 감시 어린 눈으로 지켜봤던 것 같았다. 내가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거나 얘기하는 것을 보고 나를 의심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싸웠다.
그 손님과는 어떤 사이냐? 왜 그렇게 눈웃음을 치며 대하냐? 하는 것이 싸움의 주된 내용이었다. 나는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고 온 손님에게 화난 얼굴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 당시 나의 관심은 오로지 돈 버는 것밖에 없었다. 어마어마한 빚을 얼른 갚아치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내 외모는 보이시했다. 어떤 손님은 미소년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내가 동안이었고 짧게 자른 머리에 티셔츠와 청바지를 주로 입었기에 그런 농담을 했던 거 같다. 그 모든 의심의 원류가 시어머니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 주방아줌마에게 들었다.
사실이 아닌 얘기도 자꾸만 누군가 의심 어린 말로 주입시키면 사실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개업한 지 팔 개월 정도 됐을 때였다.
종업원들을 모두 그만두게 한지 오래였다. 아줌마와 둘이 해도 충분할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한 팀도 받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우리는 하루 종일 TV만 보다가 퇴근하기도 했다. 아주 적은 단골과 남편의 지인들로 근근이 주방아줌마 월급을 챙길 정도였다. 식당의 비용 대부분이 남편의 월급에서 메워나가고 있었다. 식당을 내놓고 싶었지만 목이 워낙 좋지 않았기에 입질이 전혀 없었다.
그날도 점심때 몇 팀이 다녀가고 개미새끼 하나 얼씬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식당 할 때 돈 좀 주지 않았어?”
아줌마가 심심풀이 땅콩을 꺼내듯 말문을 열었다.
“아뇨. 어디 그럴 분들인가요? 아줌마가 더 잘 아시잖아요.”
나는 아줌마가 시어머니와 친하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내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고 사장아, 시골 땅 보상받았을 때 다른 형제들은 다 돈 가져간 거 알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우리 시부모님이 어떤 분인데요.”
“에고, 이러니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지. 다 줬대. 시골 땅 보상받았을 때!”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동안 남편의 중고차 사준 것이 너무 고마웠고, 그나마 보증 서준 것에 감사하고 있던 터였다.
“내가 왜 그리 늦게 출근하는 줄 알아?”
아줌마의 출근 시간은 아침 열 시 삼십 분까지였다. 그러나 늘 삼십 분은 늦게 출근했다. 나는 그것에도 불만을 표할 수가 없었다. 월급도 늦게 주는 형편이었고 내가 혼자서 할 줄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붙어 있어 주는 것이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사장네 시어머니가 전화를 해서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떠는 거야. 그 긴 시간 동안 수다를 떤다면 별별 얘기가 다 오가지 않았겠어? 앞으로도 오억은 더 보상이 나올 게 있대. 뭐 문제가 있어서 늦어진다지 아마. 다 돈을 얻어갔는데 사장만 바보같이 백만 원짜리 차 한 대 사준 거에 감격하고 있는 게 딱해서 내가 일러주는 거야. 이렇게 어려울 때 가서 돈 좀 달라고 해봐. 다 가져갔다는 데, 왜 바보같이 사장만 이러고 있어.”
주방아줌마가 나를 아주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줌마의 말을 믿지 않기에는 너무 구체적이었다. 우리를 뺀 모든 형제가 가져갔다는 돈의 액수를 구체적으로 말했다.
“시어머니가 하두 여러 번 얘기해서 내가 아주 외운다니까.”
“그걸 왜 아줌마에게 얘기하신 거예요?”
“아마 자랑하려는 거겠지. 나는 이렇게 자식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돈이 있다. 뭐 이런 거 아니겠어. 그리고 나보고 사장이 손님하고 바람피우는 거 같진 않느냐고 하더라. 친정 엄마가 자주 오는 거 같던데 돈을 빼돌리지는 않느냐고도 했고.”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빼돌릴 돈이 어딨 냐고 했지. 장사가 너무 안 돼서 가겟세도 밀려서 보증금에서 까먹고 있을 거라고 했어. 그리고 바람 필만큼 손님이 오는 거냐고 해줬어.”
“그러니까 뭐라세요?”
“그래도 잘 감시해 달래.”
나는 기가 막혔다. 아줌마의 얘기를 듣는 내내 시어머니 특유의, 깔꼬장한 표정 속에 감추인 의심 어린 눈빛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장님, 올라가서 한 번 떼써봐. 그래도 남보다는 나을 거 아냐. 매일 그렇게 비싼 이자를 어떻게 물겠어. 이러다 큰일 난다. 나, 그렇게 망하는 식당 여럿 봤어.”
나는 너무 기가 차다 못해 화가 났다. 눈물이 났다. 나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나이는 아직 어렸지만 내가 그동안 겪어낸 삶은 오십 년은 더 된 듯 고되고 드셌다. 나는 내 아이를, 내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려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작은 두 어깨에 올려진 빚의 무게 때문에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어머니는 아직도 나를 열일곱 살 어린애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방아줌마와 짝짜꿍이 돼서 나를 아주 파렴치한 여자로 몰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번만은 그냥 참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시집으로 쫓아 올라갔다.
아이 낳고 살면서 처음으로, 시부모님께 따지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