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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Oct 10.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 다.(23)

#23.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식당 일을 혼자 하면서 병원을 오고 갔다. 시부모님은 아침에 출근하듯이 병원으로 왔다.

 여전히 나를 반가워하지 않았고 푸대접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남편에게 필요한 속옷과 수건을 갈아 주었고, 세면도구도 가져다주었다.   

   

  정말 남편에게 엄마가 필요할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도시로 형제들을 따라 나온 남편은 늘 외로웠다고 했다.

주말과 방학에 시골집에 갈 때면, 다시 도시로 되돌아 오는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도시에 있는 큰 형의 집 근처에는 낮은 산이 있었는데, 그 산엘 매일 올라갔다고 했다. 그렇게 높은 곳에 올라가면 시골에 있는 엄마가 보일까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엄마가 그리웠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멀리 있었고, 다 큰 형제들은 바빴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기댈 곳이 없었다.  

    

  친구들과 한참을 놀다가 해가 지고 어스름이 골목에 드리워지면, 아이들은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놀이터에 혼자 서 있을 아이의 쓸쓸한 등을 상상하면 내 마음도 쓸쓸해졌다.


 어둑해진 집으로 향했을 아이의 힘없는 발걸음을 나는 이해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밥 익는 냄새가 집집마다에서 몰려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청국장 냄새, 된장찌개 냄새, 김치찌개 냄새가 한데 뒤 섞여 골목 안을 가득 메웠다. 온 가족들의 소란스러움이 담장을 넘었다.


 그러나 어린 걸음을 터덜거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언제나 집은 비어있었고, 음식 익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불 꺼진 집의 문을 혼자 열고 들어가면 밥통은 비어있고 식탁은 말끔했다. 어디에도 온기가 없었다.

남편에게 엄마가 있어야 할 때는 그때였다.  이름 불러 집으로 들이고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엄마가 그때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왜 정말 필요할 때 없던 엄마가, 자신의 가족을 책임져야 할 시기에 놓인 남편에게 엄마노릇을 하려는 것인지, 나는 시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남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부모님에게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릴 때 느껴보지 못한 부모님의 온정을 지금이라도 가져보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사고 때 운전을 했던 과장님에게 합의서를 써줬다. 만약 우리가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과장님이 구속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동차가 미끄러지면서 중앙선을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직장을 그만둘 작정이 아니라면 사고에 대해서 문제 삼을 수 없었다. 남편은 조건 없이 합의서를 써줬다. 합의금이나 위자료는 없었다. 치료비와 사고로 인한 후유증에 대해서는 보험회사와 다퉈야 한다고 했다.


  사고 문제는 변호사사무실에 근무하는 시어머니의 친척에게 맡긴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더 입원해야 한다고 했지만 남편은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입원하고 한 달 만이었다. 답답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참 젊은 혈기를 좁은 병실에 한 달이나 가둬뒀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었다.

남편은 퇴원하고 삼일 만에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다. 한쪽 팔은 쓸 수가 없었고 장애진단이 나왔다.

나는 여전히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식당을 지켰다.

그렇게 삶은 또 흘러갔다.     


  사고가 나고 육 개월이 훨씬 지난 것 같았다. 남편이 퇴근하면서 느닷없이 새 차를 끌고 왔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동차를 계약하면 금방 출고되지 않았다. (계약하고 거의 한 달 가까이 걸렸던 거 같다.) 그런데 새 차가 지금 내 집 앞에 서 있다는 것은, 오래전에 차를 계약했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돈으로 차를 산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할부나 외상을 하는 성질이 못 되는 남편이었다.


“샀어.”

웬 차냐고 묻는 내게 남편이 대답했다.

“할부로?”

“아니, 일시불로.”

“무슨 돈으로?”

“아, 사고 보상금 받았어. 재판을 해서 내가 이겼어. 그게 나왔어.”

“언제?”

“오래됐어.”

“근데 어떻게 나한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뭐 말할 필요가 있나. 다 잘 끝났는데.”

나는 기가 막혔다.


 시어머니의 친척이 주선을 한 변호사가 변호를 맡아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까지는 나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 재판이 끝났는지 어찌 됐는지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나는 어이없음을 넘어서 화가 났다.


 나는 시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애 아빠 사고에 대한 재판이 끝났다면서요?”

“응, 그래.”

“그런데 어떻게 제겐 한 마디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걸 니가 왜 알아야 하는 거냐? 잘 끝났으면 된 거지.”

“아니,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애 아빠의 팔이 불구가 된데 대한 재판이었어요. 그것에 대해 제가 왜 알 권리가 없어요? 그리고 그 돈은 제 남편 팔 하나 값이라고요. 이제부터는 어머니가 아들 데리고 사실 거예요?”

“뭐라고?”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그렇게 큰돈이 나왔는데, 그 돈에 대해서 어떻게 제게 한 마디 상의를 하지 않으셨어요? 설사 애 아빠가 입다문다 하더라도, 어머니아버지께서 말리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보험회사에서 나온 보상금은 사천 만원이었다. 그때 그 돈이면 집을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만약 내게 상의했더라면 나는 땅을 사서 묻어 두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파트를 하나 사서 세를 놓았을 것이다. 일생에서 큰돈이 생기기란 쉽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더군다나 남편의 팔과 바꾼 돈이었다. 그렇게 귀한 돈을 차를 현찰로 사며 없애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어머니의 친척이라는 사람에게 후하게 사례를 했고, 변호사비도 모르는 변호사를 선임했을 때 치러야 하는 것보다 더 줬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뭐 하러 아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겠는가. 안 줘도 되는 사례비까지 주면서. 나는 마구 사라진 보상금이 너무 아까웠다. 이건 남편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시부모님의 체면을 살리는데 다 써버린 것이다.

 남편은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겨우 가게를 처분했다. 식당을 시작하고 일 년 육 개월만이었다. 본전도 되지 않는 돈을 겨우 건졌다. 가게를 처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긴장이 풀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먹기만 하면 자꾸 토했다. 체했다고 생각하고 소화제를 먹었다. 그러나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다. 명치끝에 뭔가가 막혀 있는 것 같았다. 더부룩했다.

 한 일도 없이 너무 피곤했다. 등도 너무 아팠다. 사람만 보면 등을 두드려달라고 했다. 두드리면 조금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체중이 급속도로 줄어들어갔다. 나는 먹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큰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난 후, 작은 아이를 데리고 나는 하루 종일 누워서 지냈다.

기운이 없었다. 그것도 잘 먹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여를 보냈을까. 이젠 먹지 않아도 토하기 시작했다.

등의 통증도 점점 더 심해졌다.


  병원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입원을 해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검사를 끝내고 결과를 보기 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월요일에 병원 오실 때 꼭 보호자와 함께 오셔야 합니다.”

나는 그 전화를 받고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몰랐다.


“검사 결과…”

마주한 의사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얼굴과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봤다.

나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위장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곧 의사가 약을 줄 거고, 나는 금방 나을 거였다.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검사를 다각도로 했습니다…”

그러고도 의사는 사각 판에 걸어 놓은 흑백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흠흠, 헛기침을 해가며 뜸을 들인 의사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검사 결과 아무래도 췌장암 같습니다.”


  나와 남편이 서로 얼굴을 바라봤다. 췌장이 무엇인지, 그게 내 몸 어느 구석에 붙어 있는 물건인지 몰랐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장기의 이름이었다.

“그게 뭔데요?”

내가 물었다. 의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등 쪽의 아주 구석에 있는 장기라서 문제가 생겨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문제가 발견됐을 때는 손쓰기가 어려운 상태일 때가 대부분이지요.”     


“수술을 하루 빨리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복부를 절개해서 열어봤을 때, 이미 늦었다고 판단이 들면 우리는 그냥 다시 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췌장암은 예후가 아주 좋지 않은 암에 속합니다. 아직까지의 의학 수준으로는 어려운 암입니다. 또 하나 알아 두셔야 할 것은,”    


의사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나도 남편도 의사가 다음 말을 어서 이어가기만을 기다렸다.


“각오하셔야 할 것은, 그 어느 암보다 뒤따르는 고통이 클 것이라는 겁니다.”

“고통이 크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요?”

남편이 물었다.

“통증의 정도가 심하다는 겁니다. 췌장이 그래요. 단순한 염증에도 환자는 아주 고통스러워합니다.”

의사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동정의 눈빛이었다.


요약하면, 어찌되든 결국 많이 아플 거라는 말이었다.

 

  남편은 당장 수술 날짜를 잡아달라고 했다. 입원 수속을 밟고 수술 날짜를 정했다. 입원은 열흘 후에 하기로 했다. 가장 빠른 수술일정에 맞춰서였다.

그리고 수술 도중에 문제가 생겨도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남편이 서명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그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열흘 후 멀리 여행을 떠나는 정도의 기분이었다. 내가 열흘 후 집을 비우면 불편할 지도 모를 아이들과 남편이 걱정 됐다.    

  그때부터 마음이 바빴다. 오래 집을 비울지도 모르기에 해야할 일이 많았다. 그동안 장사를 한다고 소홀했던 묵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베란다와 화장실, 냉장고, 가스레인지 후드, 싱크대와 침대 밑까지 매일 쓸고 닦았다.  이불도 빨고 커튼도 걷어서 빨았다. 아이들과 남편이 철이 바뀌더라도 옷을 잘 찾아 입을 수 있게 옷장도 정리했다.    


  장을 봐다가 배추김치, 깍두기, 무생채, 오이소박이를 담갔다. 밑반찬도 만들었다. 아이들과 남편이 좋아하는 것으로, 될 수 있으면 오래 두고 먹어도 상하지 않을 반찬을 만들었다. 큰 냉장고를 가득 채워나갔다. 그동안 먹고 싶다고 했던 것들이 자꾸만 생각났다.


 혹시 집에 내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 내가 없더라도 아이들이 엄마가 해놓은 반찬을 먹으며, 그 맛을 오래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죽음이나 삶에 대한 슬픈 감정은 들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도 전혀 없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입원을 하루 남겨 두고 나는 마지막으로 옷장을 정리하고 화장실을 다시 청소하고, 버릴 것을 다 버렸다.

 내가 떠났을 때 살림을 엉망으로 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다.


 밥하는 방법과 전기밥솥 작동법, 세탁기 작동법 등을 세밀히 적어서 냉장고에 붙여놨다.


  청소가 마무리되고 나는 목욕을 했다. 목욕을 마치고, 책장에 꽂힌 앨범을 꺼내서 펼쳤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 남편이 거기 있었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조금씩 자라고 있었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날, 잠시 행복했던 시간이 거기 멈춰 있었다.

 그동안 내가 그토록 지키려고 안간힘을 써왔던 것이었다.      


  남편이 퇴근을 하고 아이들이 돌아왔다. 아이들은 내가 암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냥 병원에 입원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앉혀 놓고 말했다.

“내일 엄마가 병원에 입원을 해.”

“엄마, 많이 아파?”

작은 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니, 많이는 아닌데 입원하는 게 빨리 나을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어. 그러니까 아빠하고 형아 말 잘 들어야 해. 오래 걸릴지도 몰라. 그리고 큰 애 너, 엄마 없다고 공부 게을리하면 안 된다. 아빠도 도와줘야 하고. 응?”

큰 애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그날 저녁 식탁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나는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병원에 가져갈 짐을 챙겼다. 정리된 짐을 거실 구석에 두고,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적금통장과 보험증서와 월급 통장을 유언장처럼 건네주었다. 집문서와 인감도장을 비롯한 중요한 서류들이 있는 곳도 알려줬다. 그동안 안 먹고 안 쓰며 열심히 모은 전 재산이었다.

이제 내 손엔 십 원 한 장이 없었다.

     

  병원에 입원할 준비가 모두 끝났다.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깊어갔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들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다. 큰 애와 작은 애가 낮은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침 달빛이 창으로 들어와 아이들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보드랍고 따뜻했다. 달큼한 비누냄새가 났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느끼는 행복한 촉감일 수도 있었다.  

    

  현실이 슬슬 직시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모든 것을 두고 나 혼자 영원을 향해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힘겨운 걸음을 안간힘을 쓰면서 지금까지 걸어온 지나간 날들이 눈앞에 펼쳐졌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날 지도 모를 내 짧은 인생이 억울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돌아보면 불꽃처럼 살아왔다. 악착같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젊기에 가질 수 있는 모든 혈기를 사는 일에 바쳐온 것이다.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삶이기도 했다. 그래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사 내 삶의 끝이 여기까지라고 하더라도 나는 조금도 아쉽거나 억울한 마음은 없었다.


  일찍 시작한 삶이었기에 주변의 이른 죽음을 이미 많이 목도했었다. 한결같이 아쉽고 안타까운 삶의 끝이었다.

 인생의 마라톤에서 누구나 완주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체득한 터였다. 때로는 삶이 죽음보다 몇 배나 더 고통스러울 수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내 삶이 이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곳으로 치닫는다 해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 또한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내 나이 겨우 서른이었지만 조금도 미련이 없었다.

포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는 아팠다.

온몸으로 아팠다.

아프다고 표현하기엔 부족한 고통이었다. 내가 울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엄마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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