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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Oct 24.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25)

#25.

  동물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먹는 것이 인간의 욕구 중에서 가장 큰 욕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기본 욕구가 색, 식, 수면이라고 한다. 그 중  “식”이 제일 먼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나는 먹겠다는 것은 삶의 또 다른 표징이라고 믿는다.


 근원으로 들어가면,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한다. 잘 먹지 않고는 건강한 육체가 있을 수 없고, 육체가 건강하지 않고는 건강한 정신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이다.  

   

  나는 옥수수 세 알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옥수수 파티가 끝난 뒤, 다른 환자들은 점심상을 마주하고 점심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거의 보름 만에 옥수수를 맛본 나는, 그 다음부터 음식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냄새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코끝에서 느껴지는 음식의 냄새를 피하기 위해 돌아누웠다.


 입안에서 침이 고였다. 수술한 부위의 통증이 조금씩 심해지기 시작했다.

 수술하고 쭉 통증이 있었지만 조금 성질이 달랐다. 나는 새우등을 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처음엔 진통효과가 떨어진 탓이라고,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츰 속에서부터 스멀거리는 열감이 함께 느껴졌다.

그때 온 병원을 헤집고 다니던 작은아이가 돌아왔다.


“엄마, 나 배고파.”

 돌아누워 있는 나를 손으로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남편은 아침에 출근을 하며 작은 아이를 병원에 데려다 놓고 갔다. 내 침대 머리맡 사물함에 작은 아이의 점심값과 간식비가 있었다. 누군가 병문안 온 사람이 있으면 작은 아이의 점심과 간식을 챙겨줬다.

   

 내가 입원하고 있는 동안 작은아이는 병원에서 고아처럼 혼자 돌아다니며 지냈다. 더러는 남자간호사를 따라다니기도 했고, 병실의 환자보호자가 놀아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병원 방문객이 아이가 혼자 병원을 배회하는 걸 보고 길 잃은 아이인 줄 알고 데려 온 적도 있었다.     


  작은 아이는 병원 구석구석을 기웃거리고 돌아와 내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안실과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정신과병동까지 낱낱이 다녀와서였다.

“엄마,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고 막 울고 있었어. 검은 차에 커다란 상자가 실려 갔어. 경찰도 봤다.”

또 어느 날엔,

“감옥 같이 생긴 문이 있는 데 알아?”

“아니, 모르겠는데.”

“거긴 아무나 못 들어간데. 근데 나 들어가 봤어.”

“어떻게?”

“간호사 형 따라서.”


“쟤 아무래도 정신과병동 갔다 왔나 보다. 이 병원에서 쟤만큼 길 아는 사람도 없을 거야. 아마.”

듣고 있던 다른 환자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플 일 밖에 없는, 별다른 사건이라고는 없는 병실에서 작은 아이는 활력소 같았다.

작은 아이의 조잘대는 소리는 항암제를 걸어 놓고 정적만이 감도는 병실에 참새소리처럼 맑게 들렸다.

     

 그날따라 작은 아이는 점심시간이 지나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가 돌아온 시간은 환자들이 점심상을 물리는 시간이 지나고도 한참 후였다. 점심을 먹을 땐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서라도 아이의 점심을 챙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나는 난감했다.

복부에서는 통증이 몰려오는데 아이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링거를 꽂고 매점까지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날따라 면회 오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작은 아이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때가 되면 돌아와야 하는 거잖아. 엄마가 많이 아파. 혼자 매점에 가서 뭐라도 사 와.”

“싫어, 나 밥 먹고 싶어. 이젠 김밥 싫어. 지겨워졌어.”

생전 떼라고는 쓰지 않는 아이였다. 병원에서도 주면 주는 대로 먹었다. 그런데 그날은 김밥을 먹지 않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그때까지 작은 아이의 점심은 주로 매점에서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김밥이었다. 지금도 작은 아이는 김밥을 잘 먹지 않는다. 그때 맞은편의 환자가 식판을 들고 왔다.

“이거 손도 안 댄 거야. 점심으로 나온 건데 아까워서 저녁에 누구라도 먹지 않을까 싶어서 놔뒀어. 이거 애 먹이면 안 될까?”

    

 겨울로 가는 길목임에도 아이의 이마에 땀이 흘러 머리카락이 마구 엉켜있었다. 손도 때국물로 꼬질꼬질했다 그런 상태로 보조침대에 올라앉아 밥을 먹었다. 집에 있었다면 내가 씻기고 밥을 먹였을 것이다. 곁에 앉아 숟갈 위에 반찬을 올려주었을 것이다. 물을 챙겨주며 천천히 먹으라고, 꼭꼭 씹어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는 병원에서 애어른이 돼가고 있었다. 혼자 밥을 먹고 집에서 하던 반찬투정도 하지 않았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밝게 얘기하는 아이의 눈동자가 언제나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아이가 경험하기엔 너무 이른, 주검이 하루에도 수차례 오가고, 신음소리와 고통이 엄습해 있는 병원이 아이에게 두려움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이가 하루 종일 있는 곳은 암병동이었다.


  그것을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 아이는 온종일 고층 병원의 복도를 쉴 새 없이 뛰어다닌 것이다. 아이에게 너무 일찍 삶에 가장 깊이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알려 준 듯해서 나는 미안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아픈 몸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는 못된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수술한 깊숙한 곳에서 통증이 점차로 속도를 내고 있었다. 저녁에 남편이 퇴근을 하고 왔다. 그러나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때까지 나는 아프다는 말도 못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낮에 옥수수를 먹은 탓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침대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 것은 밤 9시가 넘어서부터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땀에 입고 있는 환자복이 푹 젖었다. 통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거 안 되겠다. 보호자에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냐.”

옆의 환자가 나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나는 손을 저었다. 연락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간신히 말했다.

그러는 사이 밤 11시를 넘고 있었다.       

 열이 점점 심해졌다. 나는 그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침대가 무섭게 흔들렸다.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떨기 시작했다. 오한이 온 것이다. 누군가 두꺼운 이불을 가져다 덮어줬다. 그럼에도 나는 너무 추웠다.

그때 누군가 간호사실에 알렸다.


 내 옆 대장암환자가 자신의 휴대폰으로, 내 사물함을 열어 남편이 적어놓은 집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빨리 병원으로 오셔야 할 거 같아요. 애 엄마가 위독해요. 간호사실엔 알렸는데 그래도 남편분이 오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통화하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링거에 새로운 링거가 걸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날 밤 열이 체온계가 잴 수 있는 수치를 넘어버렸다. 더 이상 측정이 불가했다. 주치의가 달려오고, 남편이 병원으로 온 것을 나는 몰랐다. 응급으로 CT를 찍고, 담도 내시경을 했다.


 검사 결과, 수술한 부위에서 소화액이 흘러나와 봉합해 놓은 곳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이다. 말이 염증이지 녹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수술한 그 자리에서 낭종이 하나 더 발견이 된 것이다. 작은 계란만하다고 했다.


 그것은 옥수수를 먹은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미 염증이 생기고 있었는데 옥수수를 먹으면서 소화액이 증가했고, 악화 시키는 것에 일조했을 것이다.

 옥수수에 관해서는 함께 입원했던 환자들과 나만의 비밀이었다. 옥수수를 나눠줬던 환자는 오래도록 미안해 했다.  내가 떼를 써서 마지못해 몇 알 준 것인데.


“하, 원인을 알 수가 없네.”

계속 주치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장 다시 개복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내가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였다.


“조금 지켜 보는 게 좋겠어요. 당장 수술은 무리예요.”

주치의가 말했다.

 나는 불안했지만 다시 수술할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겪었던 고통을 다시 한 번 더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끔찍했다.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열이 정상 수치 가까이 내려오기까지 3일이나 걸렸다.

독한 항생제가 투여됐고 마약성 진통제를 주사로 맞지 않고서는 통증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금식은 당연했다.   

   

 미음이 나오기까지 거의 2주는 걸린 거 같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식욕을 잃어버렸다. 독한 항생제와 마약성 진통제를 맞다 보니 입에서 쓴 내가 났고 코에서 늘 약냄새가 났다.


 너무 먹고 싶은 게 많아서 매일 종이에 먹고 싶은 것들을 썼었다.

    

 통닭, 피자, 자장면, 짬뽕, 탕수육, 삼겹살, 수박, 참외, 김밥, 떡볶이..... 먹고 싶은 것이 A4용지에 반 페이지가 넘었다. 회복되면 순서대로 반드시 먹을 것이다라고 굳게 결심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모두 적어놔. 퇴원하면 내가 다 사 줄 테니까. 잊지 않게 다 적어놔.”

나는 그 먹고 싶은 것들을 적으며 반드시 먹으리라는,

하찮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젠 식사를 해도 된다며 저녁부터 미음이 나왔다. 거의 입원하고 한 달만이었다. 밥상에 멀건 미음과 간장종지 하나를 마주하기까지가. 그러나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 겨우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는데 걸릴 것 없는 미음이 입 안에서 거칠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아니 썼다.


“그래도 먹어야 해. 먹지 않으면 회복이 더뎌. 애를 생각해서라도 먹어야지.”

“그렇게 먹으려고 애를 쓰다 옥수수 몇 알 먹고 그 고생을 했으면서 정작 먹어도 된다니까 못 먹네.”

곁의 환자들이 몇 숟갈 뜨다 말고 상을 물리는 나를 보고 한 마디씩 했다.  

    

 입원 전 42킬로였던 체중이 36킬로가 됐다.

 가끔 화장실에서 보는 거울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해골만 남은 얼굴에 눈만 퀭했다. 허리는 굽은 채 펴지지도 못했다. 환자복 밖으로 자꾸 어깨가 비집고 나왔다. 바지도 자꾸 내려가서 허리를 옷핀으로 고정해야 했다.  


 행색으로 보면 병실 안에서 내가 제일 위중한 환자였다.  다른 환자들을 면회온 사람들이 앉아 있는 나를 보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저분은 무슨 암 이래?"

    

 어느 날, 시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며칠 만이었다. 웬일인지 찬합에 반찬과 밥을 잔뜩 해서 들고 왔다. 친하다는 친구와 함께였다. 시어머니는 침대식탁을 열어 반찬과 밥을 차려놓으며 말했다.

“얼른 먹고 일어나야지. 내가 찰밥 해왔다. 한 번 먹어 봐라.”


 시어머니의 친구는 보조 침대에 앉아 나를 동정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유, 그 또랑또랑하던 얼굴이 다 어딜 갔네. 그동안 얼마나 아팠을 거야. 그래. 난 막내가 아프다는 걸 어제서야 겨우 알았지 뭐야.”


 억지로 한 숟갈 떠 넣은 잡곡이 들어간 찰밥과 나물 반찬은 입에서 모래알처럼 거칠었다. 몇 숟갈 먹지도 않았는데도 온몸에서 진땀이 흘렀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니, 왜 먹다마는 게야. 더 먹어야지. 그래도 애써 해온 시에미 정성을 봐서라도 더 먹어야 할 거 아니냐.”

나는 눕고 싶었다.

“애기 엄마, 요즘 통 못 먹어요. 소화도 잘 못 시키는 거 같고요.”

보다 못한 건너편 환자의 보호자가 말했다.


“이제 먹기 시작했으니 아직은 밥 먹기 일러요. 며칠 있다가 다시 해다 줘 보세요. 애기 엄마는 누가 뭘 해다 주는 거 같지도 않던데.”

그 보호자가 다시 말했다.

“나, 이제 며칠 못 와요. 내일 독도 여행 가요.”

시어머니가 그 보호자를 건너다보며 대답했다.


“에고, 이제 겨우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럴 때 잘 먹어야 회복이 빠른데... 친정엄마도 그렇고 시집에서도 그렇고 누구 하나 밥 한 번 안 해 주는 거 같던데... 애는 매일 김밥으로 때우고... 이럴 때 누가 애라도 좀 봐주면 얼마나 좋을까. 애 아빠 혼자 동동 거리는 거 보면 안쓰러워서 원. 쯧쯧...”

입빠른 보호자가 시어머니를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아, 누가 안 봐준다고 했나요. 즈들이 싫다는 걸요.”

시어머니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시어머니는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갔고, 뒷모습에서 찬바람이 불었다.

 다음날 시부모님은 친구부부와 함께 독도로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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