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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Oct 17.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24)

#24.

   입원하자마자 병실로 올라갔다. 5층이었다. 내 침대 발치에 ‘금식’이라는 표시가 걸렸다. 모든 게 급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심전도 검사를 다시 하고 피를 뽑아갔고, 혈압을 체크했다. 링거 걸이가 양 옆에 하나씩 설치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병, 하얀 비닐자루, 알부민 등이 차례로 걸렸고 팔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수술할 부위의 면도를 했고, 코에 줄을 꽂아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건 뭐 내가 황소도 아니고, 나는 도저히 맨 정신엔 죽어도 못하겠다고 고집 피웠다.     


  입원기간 동안 나를 담당할 레지던트가 들어와 수술에 대해서 설명했다.

“담당 교수님께 설명 들으셨겠지만, 이건 큰 수술입니다. 저희는 수술 시간을 아홉 시간 조금 넘을 걸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그전에 수술실에서 환자가 나온다면 그것은 다시 닫는다는 의미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내 수술은 다음 날 첫 번째였다. 수술시간이 길기에 나를 제일 먼저 한다고 했다. 그러나 수술 시간은 늦춰졌다.

 마침 대형 자동차사고가 나서 응급으로 들어온 환자 때문이었다. 근처 고속도로에서 4중 추돌사고가 있었는데 제일 앞차에 탄 환자가 위급하다고 했다. 수술 예정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나갔다. 나는 서서히 긴장이 됐다.      


  드디어 하얀색 간호사복을 입은 남자간호보조사가 침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 간호보조사가 앞에서 끌고 남편이 뒤에서 침대를 따랐다. 나는 완전히 탈복한 상태로 하얀 천 한 장만 덮고 있었다.      


 내게 보이는 거라곤 병원 복도의 천정뿐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고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술실까지 가는 시간이 내게는 이 세상의 마지막 길처럼 느껴졌다.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가을이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호기롭게 장담했었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길에서 원초적인 두려움이 나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자기야.”

내가 보이지 않는 남편을 불렀다.

“응, 나 여기 있어.”

“나,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내 눈에서는 의도치 않았지만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문밖에서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잘하고 와. 잘 될 거야.”

움직이는 침대를 따르던 남편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꽉 잡았다. 이 세상에 연결된 마지막 끈처럼.     


  드디어 수술실 문 앞에 도착했다. 커다란 수술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 두 명이 내 침대를 인계받았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밖에서 기다리세요.”

누군가 말했다. 남편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꼼짝 않고 있을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남편이 소리치는 소리가 닫히는 문밖에서 들렸다.     


 침대가 들어간 곳엔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시멘트에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어떻게 보면 창고 같은 구조였다. 양 옆의 철제로 된 새시 장식장에 녹색 보자기에 싸인 것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을 뿐이었다.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내가 타고 온 침대에서 침대보채로 들려져 다른 침대로 옮겨졌다.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그 소리들은 높은 천장에 울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쇠들이  부딪치는 소리도 들렸다. 내가 도저히 이름을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침대 가까이로 당겨졌다. 천정에 붙어 있는 라이트가 내려왔고 강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언젠가 보았던 영화, 마루타의 한 장면 같기도 했고, 외계인이 나오는 SF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울지 마세요. 울면 수술할 때 힘들어요. 그만 진정하세요.“

누군가 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나는 울먹이며 내 이름을 말했다.

“나이는 요?”

“서른 살입니다.”

“네, 좋습니다. 이제 잠깐 주무시고 계시면 되는 겁니다. 저를 따라서 숫자를 셀 겁니다. 하나, 둘, 세엣.....”

나는 셋까지 따라가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없다.

나는 깊이 잠에 빠져들어 갔다.      


 꿈을 꾼 것 같았다. 나는 긴 터널을 반듯하게 누워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아니 빨랐지만 빠르지 않았다. 둥근 원형 터널의 넓이는, 누운 내 몸이 빠져나갈 정도였다. 넓지 않았다. 그러나 좁지도 않았다.

 천정에 네모난 형광등이 끝없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누워서 바라보았다. 마치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영화인 로봇 태권 V에서 보았던 한 장면 같았다.


 훈이와 영희가 로봇에 올라탈 때 긴 터널을 누워서 자동시스템에 의지해서 빠져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마치 그랬다. 천정의 불빛은 하얗고 뽀얀 색이었다. 나는 그 터널을 빨려 들어가는 듯이 통과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내가 잠에서 깬 곳은 중환자실이었다. 수술을 하고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 잠시 옮겨 놓은 곳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잠에서 자다 깨다를 여러 번 반복한 후,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처음 입원했던 병실이었다.     


 사방이 어두웠고 조용했다. 나는 몸을 조금 뒤틀었다. 그러나 팔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코에 줄이 매달려 있었고, 링거 병과 수혈봉투까지, 오른팔에 세 개, 왼팔에 네 개가 달려 있었다. 손가락엔 체크기가 꽂혀 있었고, 배엔 피주머니가 두 개나 달려 있었고 소변을 빼주는 소변 주머니까지. 이건 영락없는 인조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장 같았다.

 내 머리맡에 조도가 낮은 작은 형광등 불빛만이 어렴풋하게 주변의 윤곽을 일러줄 뿐이었다.     


“깼어? 많이 아프지?”

남편이 내가 눈을 뜬 것을 보고 말했다.

“여기 어디야?”

 목이 쉰 소리로 내가 물었다. 코에 꿰어진 콧줄과 수술할 때 마취를 오래 한 탓이었다.   

“입원했던 병실이야.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

남편이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모르겠어. 나 많이 잤어?”

“응. 삼일이나 잤어.”

흐릿한 불빛에 비친 남편의 얼굴은 밝아보였다.


“좋은 소식이 있어.”

남편이 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몇 시간 만에 수술실에서 나온 줄 알아?”

 나는 눈만 꿈벅이고 있었다.


“일곱 시간 반 만에 보호자를 찾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거 큰일 났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수술실 문을 열고는 나를 보더니, 축하합니다. 하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뭘 축하한다는 건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의사 선생님을 멍하게 보고만 있었어.”

남편은 참았던 말을 쏟아내듯이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쉴 새 없이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이, ‘암이 아닐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아직 조직검사는 하지 않았지만 생긴 게 암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저도 이런 모양의 종양은 처음 본 거라서 정확히 조직검사를 해봐야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마음을 조금은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하는 거야.”

남편은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종양이 췌장에 올라앉아 있더래. 그런데 그놈이 굉장히 컸어. 선생님이 내게 보여주는 데 수술용 세숫대야로 한 가득이었어. 가로세로 20센티미터라는 데 꺼내 놓으니, 공기하고 닿으니까 퍼져서 엄청 컸어.”


 의료진은 그것을 남편에게 육안으로 확인시켜 주더라고 했다. 자기들도 이렇게 큰 것은 처음 봤다면서 그 조그만 몸 안에, 어떻게 이걸 갖고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일주일 후, 조직검사 결과, 병명은 가성낭종에 속한다고 했다.


  나의 진짜 병원 생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새벽부터 간호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시간에 맞춰 항생제와 진통제가 투여되었고 피주머니를 교체했다. 그날 남편은 한숨도 못 자는 거 같았다. 전날 함께 있었다던 엄마가 아침 일찍 왔다. 남편과 교대해 주기 위해서였다.


“여덟 시간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수술실 밖을 지키고 있었어. 시부모가 밥 먹으러 가자고 하는 데도 아범은 꼼짝 않고 있더라. 나도 저녁 장사를 해야 해서 가야 했고, 혼자 지키고 있는 얼굴이 사색이 다 되었더라고.”

그때 엄마는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남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작은 아이를 씻기고 아침밥을 해서 두 아이를 먹이고 큰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출근길에 작은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다. 의사를 만나고 침대커버를 바꿔준 뒤, 작은 아이를 병원에 남겨놓고 출근했다.


  남편은 두 아이를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도,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시부모님이 함부로 내뱉는 험한 말들을 들으며 자란 아이들이었다.

 힘들어도 우리끼리 해나가자고 우리는 생각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잃은 줄 알았던 가족애였다. 남편은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아이들을 알뜰하게 챙겼고, 입원한 내가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려 애썼다. 그것은 내가 큰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가장의 든든함이었다.

 더 이상 내가 앞장서지 않고, 모든 결정을 남편에게 맡기고 의지하고 기댄 때였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6인실이었다.

 암환자들이 있는 암 병동이었다. 내가 췌장암이라고 판단되었기에 배정된 듯했다.

 유방암, 위암, 대장암, 갑상선암, 폐암 등의 환자들이 입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입원한 지 오래된 사람도 있었고, 다시 재발되어 입원한 사람도 있었다.      


  수술하고 이주일이 가까워졌지만 복부의 통증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다. 췌장의 통증은 다른 통증보다 몇 배는 더 컸다. 그것은 의료진도 인정했다. 나는 서너시간마다 진통제를 맞아야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허리도 펼 수가 없었다. 췌장을 수술하면 허리를 펼 수가 없다. 그래서 걷거나 움직일 때, 허리가 거의 90도 각도로 자연스럽게 숙여졌다. 의사는 아직 수술부위가 아물지 않아서라고 했다.


  췌장의 임무는 췌장액을 분비해서 주로 동물성 지방을 소화시키는 역할과 인슐린 분비를 해서 혈당을 조절한다고 했다. 췌장에서 분비되는 소화액은 우리 몸의 소화액 중에 가장 강력해서 만약  다른 부위에 닿게 되면 살을 녹일 수도 있다.


 나는 입원하고부터 13일을 금식하고 있었다.

수액만 맞을 뿐 입으로는 물 한 모금도 허락되지 않았다.      


 어릴 때 아이를 낳고 먹을 게 없어서 굶는 일을 밥 먹 듯한 적이 있었다. 그런 과거가 있었던 나는 굶는 일에는 자신 있었지만,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2주 가까이 견디다 보니 눈앞에 먹을 게 환영처럼 떠다니는 지경이 되었다.      


 병실 분위기는 세상의 어떤 곳보다 좋았다. 보호자 없는 나와 작은 아이를 다른 보호자들이 번갈아가며 보살펴주었다.

냉장고의 먹을 것도 스스럼없이 나눠먹었고, 내가 화장실을 갈 때도 동행해 주었다. 환자들은 모두가 동지애 같은 것으로 결속되어 있는 듯했다. 남편은 그것이 고마워 퇴근 때마다 먹을 것을 사와서 나눠주곤했다.


  앞자리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환자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먹었다.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었고, 보호자들은 방문할 때마다 치킨, 피자, 과일에 부침개, 떡, 과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어떤 이는 돼지갈비를 구워서 가져왔고 곰탕에 설렁탕, 각종 죽은 기본이었다.


 먹고 싶은 모든 것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병을 이기려면 잘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체력을 보충해 놨다가 항암제를 맞을 때는 완전히 까부라져서 물 한 모금도 넘기질 못했다.

 먹을 수 있을 때 충분히 먹고 보충한 뒤, 사나흘 맞는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모든 체력을 다 쏟아부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항암제는 까만 비닐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빛에 노출되면 안 된다고 했다. 검은 비닐주머니에 든 작은 병은 보기에도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링거 걸이에 그 검은 비닐주머니에 든 병이 걸릴 때는 온 병실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검은 병이 걸리지 않았을 때, 그들은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한다며 먹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듯했다.

 먹고 싶고, 맛있다는 것을 서로 공유하며 하루를 보냈다.


 내가 13일째 굶은 오전이었다. 아침상이 물러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견딜 만했다. 그런데 오전 11시쯤 되었을 때 맞은편 침대의 유방암환자를 면회 온 사람이 삶은 옥수수를 들고 왔다. 그 냄새는 들어서면서부터 매혹적이었다. 나는 오래 굶다 보니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 있었다.


 유방암환자는 나를 뺀, 다른 환자들에게 옥수수를 골고루 나눠줬다. 나를 지나치면서,

“미안해요. 조금만 참아요. 나중엔 먹기 싫을 때까지 먹을 수 있을 테니.”


 그날따라 나는 견딜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목으로 음식을 넘겨보지 못한 지가 벌써 이주일이 가까웠다. 나는 마른침을 꼴깍하고 넘겼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유방암환자에게 말했다.

“저, 옥수수 한 알만 주시면 안 돼요. 너무 먹고 싶어요....”

내가 간절한 눈빛으로 건너편 환자에게 말했다.


 침대로 돌아간 유방암환자가 나를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대장암환자가 말했다.

“얼마나 먹고 싶겠어. 수액을 맞는다고는 하지만 벌써 이주나 굶었으니, 그래요 한 두어 알 줘 봐요. 입맛이라도 다시게. 그거야 어떻겠어.”


“먹고 괜찮다고만 하다면 여기 있는 거, 다는 못주겠어.... 아유 난 몰라. 일단 입에 넣고 꼭꼭 씹어서 국물만 먹고 건더기는 뱉어요. 내가 세 알 줄게.”


 유방암환자가 옥수수를 정확하게 세 개를 세어서 내 손바닥 위에 올려줬다.

모든 환자들이 먹는 일을 멈추고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나는 천천히 입 속에 옥수수 한 알을 집어넣었다. 마른 입안에서 옥수수가 굴렀고 내 어금니에 닿았다.

 내가 어금니로 꽉 물자 부드럽게 익은 옥수수가 터지면서 단물이 입안으로 퍼졌다. 달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맛인지 모른다.

 작은 옥수수 알에서 퍼져 나오는 단 맛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남아 있는 옥수수를 한 알씩 천천히 입에 넣었다. 단맛은 더 강하게 느껴졌고 온몸에 있는 모든 감각이 입안으로 몰려들었다. 마른입에서 침이 솟구쳤다. 나는 그것이 목으로 넘어가 사라질까 봐 천천히 음미하면서 오래 씹었다.

 그 옥수수 세알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먹어 본 옥수수 중에서 제일 맛있었다.


 내가 옥수수를 모두 삼켰다. 더 먹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나도 겁이 났다. 나를 바라보던 환자들이 안도하는 얼굴로 자신들의 옥수수를 뜯기 시작했다.     


“물 한 모금도 안 됩니다. 뭐라도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췌장에서 소화액이 나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봉합된 부분을 자극시킬 겁니다. 그건 회복을 더디게 할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봉합된 곳을 녹일 수도 있어요. 최악의 경우 복막염으로 갈 수도 있어요.”

의사가 금식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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