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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Oct 31.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26)

#26

 늦더위가 아직 남아 있는 10월에 입원해서 금식과 병의 악화를 오가며 그 가을을 다 보내버렸다. 나는 계절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느낄 여유가 없었다.

다만 남편이 아이에게 입혀오는 옷의 두께를 보고, 아침에 아이가 내게 달려들 때, 얼굴과 손에 달고 들어온 얕은 찬기를 느끼며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아주 잠깐씩, 짐작했다.   

   

  11월도 다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회복과 악화를 반복하고 있었다. 체력이 좋아져야 했다. 그러나 한 번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체력을 다시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사이 나를 뺀 침대, 다섯 개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내가 그 병실에 가장 오래 입원하고 있는 환자였다.

작은 아이는 친하게 지내던 보호자가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울고불고 매달렸다. 정을 주던 사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작은 아이는 바뀔 때마다 헤어진다는 것에 누구보다 서러워했다.

 퇴원한 환자 중에서 외래 진료를 보러 올 때, 일부러 5층까지 들러 주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도 있나 싶어서 간호사실에 전화를 걸었더니, 있다고 하길래 와봤어. 이래 오래 있어서 어쩌누?”

     

 함께 입원한 환자들은 대부분 암환자들이었다. 그들이 퇴원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잘 몰랐다. 완치되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희망이 없다는 것인지 몰랐다.  

    

 그때만 해도 암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전하지 못했을 때였다. 지금도 쉽지 않게 여겨지는 유형의 암인, 유방암이나 폐암 환자는 퇴원하고 다시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다른 암도 2기, 3기, 4기. 숫자가 올라갈수록 위험도는 높아서 더러는 수술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살려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리며 우는 환자도 있었다.

그 여자도 그런 환자 중에 하나였다.


 내가 보기엔 30대 후반일까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다. 암환자답게 얼굴빛이 검었고 깡말라 있었다. 파마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머리카락은 손질되지 않은 채 부스스했다.

 그 여자가 그리 여유 있는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여자의 행색이나 함께 온 남편의 모습에 드러나 있었다. 여자는 남성용 남색작업복을 걸치고 있었다. 남편과는 나이차가 많아 보였다. 남자를 우리는 여자의 아버지인 줄 알았다.

 입원한 사람치고 갖추고 온 짐이 너무 적었다. 입원을 간단하게 생각한 것인지 금방 끝날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병실로 올라왔을 때는 마지막 몇 가지 검사만 남겨 놓고였던 거 같았다. 입원하고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여자가 어떻게 병실까지 올라왔는지 알지 못했다.

 입원하고 하루 만에 수간호사는 환자에게 퇴원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암이 여러 곳으로 전이가 되어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남편에게 말했다고 한다.

 남편이 돌아가야 한다고 환자를 설득하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여자는 그때부터 울기 시작했다.


 여자에게는 식사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퇴원으로 처리된 것 같았다. 들락날락하던 남편이 보조 침대에 앉았다가 사라진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여자는 여전히 울기만 했다. 우리는 소리 죽여 여자의 눈치를 봤다. 저녁때가 되어서 친정어머니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오셨다.


“가야 되지 않겠니?”

 여자는 여전히 침대에 돌아누운 채 말이 없었다.

“가자. 가서 엄마하고 있자. 여기 이러고 있는 다고 무슨 수가 있겠니. 의사 선생님이 퇴원하라잖냐. 이러다 쓸데없이 병원비만 올라간다.”

“난, 안 가. 난 여기서 꼭 고쳐서 나갈 거야. 엄마는 이서방보고 돈이나 해오라고 해요. 난 억울해서 이렇게는 죽어도 못 가!”

여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독기 오른 얼굴로 할머니에게 쏘아붙였다. 여자의 바짝 마른 얼굴은 더욱 검어져 있었다. 여자의 촉촉하게 젖어 있는 눈망울엔 짧은 삶에 대한 억울함이 가득했다.


 할머니는 보조침대에 어둑한 얼굴로 맥없이 앉아 있었다. 밤은 이미 꽤 늦어있었다. 여자는 이불을 끌어 뒤집어쓰고 계속 울기만 했다. 여자는 밤새 짐승처럼 꺽꺽거리며 울었다. 아니, 그녀는 울부짖고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얘야, 이제 그만 좀 울어라. 다른 사람들 잠을 자야 할 것 아니냐.”

보조침대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여자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여자가 그악스럽게 울고 있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지만 어느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 아마도 모두가 삶과 사의 갈림길이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운 것인지 알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침대에서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었다.

     

 여자가 기어이 침대를 뺀 것은 부산에 산다는 여동생이 오고서 나서였다. 3일쯤 지났을 것이다. 챙길 것도 없는 짐을 챙기고 줄곧 여자를 지키고 있던 할머니가 침대마다 눈길을 주며 인사했다.

“그동안 폐를 끼쳐 미안해요.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잘들 고치셔서 부디 건강하세요.”     


 우리는 여자가 병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시원하다느니, 이제야 잠 좀 잘 수 있겠다느니, 할만했지만 그냥 여자가 떠난, 시트가 마구 구겨지고 썰렁해지고 침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은, 퇴원하는 사람에게,  잘 치료받으시고 얼른 회복하세요. 라든가, 잘 될 거예요. 마음 편히 먹어요. 등의 인사말을 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는 그 어떤 말도 맞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어떤 위로도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불과했다.      


“세상이 달라졌어.”

퇴근한 남편이 내게 말했다. 달이 바뀌면서 나는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어나서 걸을 때, 허리에 힘이 없어서 복대를 하고 있었고 허리는  굽어있었다. 의사는 염증이 회복되면 허리는 자연스럽게 펴질 거라고 했다.


“세상이 달라지다니 뭐가 달라졌는데?”

“우리나라에 외환 위기가 온 거야.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가 빚이 너무 많아서 망한 거나 같은 거야.”

나는 남편이 무슨 얘길 하는지 몰랐다. 어떻게 나라가 망한다는 건지. 다른 나라가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문을 닫은 기업들을 말했다. 직장을 잃은 가장들과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얘기를 무수히 쏟아냈다. 남편의 회사에서도 인원을 감축한다고 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그럴 일 없으니까. 그냥 얼른 나을 것만 생각해. 올해 안으로 집으로 가자.”     


 나라 안은 온통 IMF로 들끓고 있었다. 모든 국민들의 힘을 잃은 얼굴만 매일  TV에 비쳤다. 버스터미널에서, 기차역에서, 초점을 잃고 황망하게 TV를 보고 있는 사람들. 그때를 생각하면 그 기억 밖에 없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라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재산을 불릴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은행금리는 하늘로 치솟았고 부도난 기업은 부지기수였다. 대출로 산 집이나 땅들은 모두 경매 마당으로 나와 앉아 있었다. 돈만 있으면 그냥 긁어모을 수 있었다.


 병실 안의 환자들은 멍하게 누워 뉴스 앵커의 목소리로 그것들을 들었다. 생사를 넘나든 환자들은 모두가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지 못하면,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혼자 가야만 하는 그 길에 10원짜리 하나도 들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다들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드디어 나는 12월 23일에 퇴원을 승낙받았다. 입원하고 세 달이 다되어서였다.

“아직은 조금 불안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가족들과 보내야지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병원으로 연락하고, 응급실로 바로 들어와야 합니다.”

의사가 당부했다.     


 남편의 차를 타기 위해 병원 일 층으로 내려왔을 때의 그 기분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12월의 싸늘하지만 맑은 공기가 코끝으로 다가왔다. 유리문 하나의 차이가 컸다. 내가 세 달 가까이 머물렀던 병실을 올려다봤다.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창이 보였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너무나 작고 좁았다.  나는 그 좁은 공간에서 석 달 가까이를 살다가 죽다가 하면서 지낸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씻을 힘도 없었다. 병원에 있을 때와 바닥을 딛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병원과 밖은 가해지는 중력에도 차이가 있는 듯했다. 땅에서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IMF가 터지고 나서 남편의 회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더군다나 연말이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큰아이가 학원에 가고 나면, 종일 나는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었다. 청소기를 돌릴 힘조차 없었다.      


 퇴원하고 4일 정도 됐을 때였다. 낮에 친구집에 놀러 간 작은 아이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누구의 도움 없이는 혼자 일어날 수도 없었다. 어두워서 전등 스위치를 올려야 하는데 도저히 불을 밝힐 수가 없었다. 나는 어둑해진 방에 누워 작은 아이가 올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한겨울의 이른 어둠이 내리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안방에서 소리쳤다.

“이리 와봐!”

아이가 주저하면서 안방으로 들어왔다.

“불 켜고 이리 와봐.”

아이가 전등을 켜고 곁에 와 앉았다. 아이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와락 뿜어져 나왔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

대꾸가 없었다.

“여태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냐고? 지금이 몇 시야?”

아이는 울먹이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나, 엄마가 죽을까 봐 무서웠어. 무서워서 집에 못 왔어. 애들이 엄마, 곧 죽을 거래.”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는 엊그제까지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병원에 있었다는 것을 내가 잊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놓고 희망적이지 않은 얘기들을 했는지에 대해서, 아이가 그 모든 얘기들을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의 몸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얼마나 밖에서 공포와 추위에 떨고 있었던 것일까.

“엄마,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엄마는 오래오래 살 거야. 그러니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엄마 정말 안 죽어?”

“그럼, 엄마는 안 죽어. 엄마는 거짓말하지 않는 거 알지?"

"응."

"한 번 약속한 거는 꼭 지키는 것도 알지?”

“응.”

콧물눈물 범벅된 얼굴에 안심된 미소를 띠며 아이가 대답했다.     


 나는 그때부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눈치채지 않게 허리에 힘을 주고 벽을 잡고 가까스로 일어섰다.

나는 엄마였다.

아이들 앞에서는 아파도, 쓰러져도, 죽어서도, 절대 안 되는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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