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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경 Nov 14. 2024

나는 원조 "고딩엄빠"다.(28)

#28

  큰아이는 3일이나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큰아이가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경찰이 사고에 대해서 현장검증을 진행했다. 남편이 보호자로서 참관을 했다.      


  큰아이가 차에 부딪혀서 날아간 거리는 29미터라고 했다. 스키드마크가 시작된 지점과 아이가 떨어진 지점을 계산한 거리였다.

 아이는 건널목에서 차에 부딪히면서 장장 29미터를 앞 유리에 붙어갔다가 29미터 뒤에서 떨어진 것이라는 거다.

 남편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과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학원차 운전기사는 과속과 신호등건널목 사고가 겹쳐서 8대 중과실에 해당한다고 했다. 아이가 건넌 건널목은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운전자는 운전자 파란불이라고 했지만 바람 쐬러 나와 있던 아파트 주민들이 보행자 파란불이었다고 증언했다.


“야, 난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찔해. 검은 비닐이 차에 붙었다가 날아가는 줄 알았다니까. 살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애가 잘못됐으면.. 아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언니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얘기하곤 한다.


 엄마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나는 그때 또 한 번 깨달았다. 아이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3일 내내 나는 물 한 모금도 목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큰아이의 침대 곁에 꼿꼿이 앉아서 아이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의사는 정상으로 생활할지 못할지는 깨어나 봐야 안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얼마나 똑똑하고 건강한 아이였는데, 내가 그동안 그 엄청난 수모와 모멸과 무지막지한 가난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큰아이 때문이었다. 내 삶의 궁극적인 이유는 그 아이 하나였다.     


“아이고 이러다 엄마가 먼저 초상나겠어. 뭐라도 좀 먹고 잠깐이라도 좀 누워요. 엄마 먼저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곁에 입원한 척추수술 환자 내외가 나를 말렸다. 하지만 그게 말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큰아이 외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다행히 큰아이는 4일째 되는 날, 깨어났다. 그런데 예전의 우리 아이가 아니었다. 횡설수설하면서 자꾸만 엉뚱한 말을 했다. 나는 또 한 번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정상이 아니라도 좋으니 깨어나기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막상 깨어나니 예전의 똑똑하고 미래를 촉망받던 우리 아이가 자꾸 생각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그때 큰 애는 나의 미래이자 희망이었다. 그거 하나 잘 키워서 자랑스럽게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 만드는 게 내 온 삶의 동력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듯했다.


 그러나 의사는 아이의 상태를 더 두고 봐야 한다고 했다. 머리에 충격을 받은 것이기에 일시적으로 정신 착란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큰아이의 상태를 체크하며 나는 피를 말리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 큰아이는 깨어났지만 혼자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모르고 있던 상처들도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큰아이가 깨어나는데 모든 신경을 쓰느라 간과하고 있던 상처였다.

 

 큰아이는 자동차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오른쪽의 대부분이 닿았던 모양이었다. 한쪽 머리와 얼굴, 어깨, 옆구리 엉덩이와 무릎이 아스팔트에 갈려서 뼈가 드러나 있었다.

 그러면서 앞 뒤 갈비뼈가 세 대가 부러져 폐를 찌른 것이다. 아이가 깨어나면서 갈비뼈가 폐를 뚫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흉이 생긴 것이다.


 의사는 급하다며 그 자리에서 옆구리 부위에 국소마취를 했다. 잠시 후 큰아이의 옆구리에 구멍을 내어 호스를 꽂았다. 폐에 들어찬 공기를 빼기 위해서였다.


“숨, 들이쉬고 잠시 참는 겁니다. 하나, 둘, 셋.”

“으악!”

큰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큰아이의 비명 소리를 듣고 나는 얼굴을 돌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아이의 고통이 고스란히 내 몸으로 전해졌다.      


 며칠이 지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사고 낸 자동차가 무보험차량이었다. 간신히 책임보험만 들어져 있었다. 책임보험만 들어 있었기에 보험회사와의 합의는 없었다.

 병원비도 정해진 한도 내에서 책임져 준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책임보험의 한도를 이미 초과하고 있었다. 보험회사에서는 될 수 있으면 병원비를 적게 주려고 했다.      


 나는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모자라면 우리가 내면 된다고 했지만 앞으로 얼마의 병원비가 더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도 내에서만 치료비가 지원됩니다.”

“뭐라고요 이미 초과 됐는데 그 외의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보험법이 그렇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요?”

“그렇죠... 우리로서는...”

대답하는 남자의 말투가 내 답답함과 억울함에 비하면 너무 느긋했다.


 나는 화가 났다. 아니 애가 다쳐서 저 모양으로 누워있는 것도 억울하고 화가 나는데 치료비도 못주겠다는 거 아닌가.     

“저기요... 목소리 들어보니 결혼하셨을 거 같은데.. 아이가 있으신가요?”

“그렇죠.. 그런데 그건 왜요?”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댁에도 아이가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요? 세상일 알 수 없는 건데, 댁이 나 같은 일 겪지 말라는 법 없죠.

세상에 돌아다니는 모든 차가 다 종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는 건 그쪽에서 더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저처럼 재수 없지 말라는 법 없는 거죠.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 겪게 하면 어느 쪽으로든 반드시 나도 받게 되어 있는 게 세상이치예요.

댁도 꼭 우리 같은 일, 한 번은 당하길 빌게요. 그래야 가입자들의 마음을 알 거 아니겠어요. 내 말 잊지 마세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날 저녁 그 남자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병원비한도가 늘어나서 우리 아이 치료를 다 받을 때까지 부족하지 않게 조치가 취해졌다.


 나와 남편은 교대로 큰아이를 돌봤다. 큰아이의 대소변을 내가 감당할 수가 없었다. 큰아이는 이미 내 키를 훌쩍 넘을 만큼 자라 있었다.

 그 큰 덩치를 내가 화장실엘 데려오가는 것도, 씻기는 것도, 힘에 부쳤다. 퇴근한 남편은 큰아이를 침대 채 화장실로 끌고 가서 대소변을 처리하고 큰아이를 씻겼다.   

   

  큰 아이는 입원하고 11일째가 되면서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러나 기흉으로 인해 성장이 멈출 수도 있다고 흉부외과 의사가 말했다.  

    

 공교롭게도 사고를 낸 학원 차 운전기사는 남편의 셋째 형의 친구의 친형이라고 했다. 지역이 좁다 보니 한 사람 건너면 아는 사람이었다. 그 차 운전수는 그것을 알기에 수소문을 했던 모양이었다.    


 가진 재산이 없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냥 좀 합의를 봐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만약 우리가 합의를 봐주지 않으면 그 기사는 교도소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화가 나고 억울했다. 이번 일은 남편의 교통사고 때와는 마음이 달랐다.    

  

 아이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지도 모르며 온몸에 난 상처는 아물어도 그 자리는 화상을 입은 듯이 남아있을 거라는 것이다. 의사는 시멘트 바닥과의 마찰에 의한 화상이라고 했다.

 남편은 도저히 용서를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중엔 어쩔 수 없이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셋째 형은 나중에 그 친구와는 서먹한 관계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그 운전수는 우리가 합의를 봐줬지만 실형을 살게 된 것이다.   

  

 큰 아이가 입원하고 40 여일쯤 되었을 때 담임선생님이 병원으로 오셨다. 큰 아이의 진로문제 때문이었다. 큰아이가 병원에서 입원하라는 대로 입원하게 되면 출석일수를 다 채울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가 평준화가 아니었다. 중학교의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당연히 큰 아이는 우등으로 최고의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석일 수가 늘어나면서 진학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 큰아이는 갈비뼈도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40여 일 만에 퇴원을 했지만 혼자 학교에 오갈 수가 없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큰아이의 가방을 들고 등하교를 시켰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이상하게 복부에 통증이 오는데 멈추질 않았다. 처음엔 가벼운 소화불량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소화불량이라고 생각하기엔 통증의 강도가 너무 셌다. 예리한 칼날로 베는 듯한 통증이 복부의 전체에 왔다. 설사도 심했다. 뭐든 먹으면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우리는 췌장 수술 후에 남아 있다던 혹이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병원을 찾은 것은 12월이 다 지나갈 무렵이었다.


 검사를 위해 예약을 하고 기다리는 사이, 해가 바뀌었고 그 유명한 밀레니엄이 됐다.     

 

 엄마는 12월 한 달 내내 우리 집에다 부탄가스, 내복, 쌀과 물, 미숫가루, 라면, 일회용 용기, 각종 통조림과 두꺼운 옷과 침낭 등을 쟁였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밀레니엄이 되는 첫날, 컴퓨터 오류로 모든 것이 정지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컴퓨터가 1999까지만 인식하고 2000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부 기관의 주요 컴퓨터가 정지되므로 수돗물은 물론이고 전기도 끊기고, 은행 업무도 마비가 될 것이며 버스나 전철, 기차, 비행기도 운행이 정지될 거라고 했다.

      

 엄마가 시간 날 때마다 쌓아 둔 물품들로 우리 뒷 베란다는, 시골의 작은 구멍가게 하나는 내도 될 정도였다.

 혹시 전쟁이 난다 해도 우리 네 식구가 6개월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밀레니엄의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많은 물품을 처리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다.  

    

 나는 밀레니엄이 된, 1월에 입원과 퇴원을 해가며 검사를 했다. 위 내시경과 대장 내시경을 필두로 담도내시경을 했고, CT를 찍었다. 대장 조영술, 소장 조영술도 했다.

 그 모든 검사가 금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사이에 있는 피검사나 엑스레이, 심전도 검사 등은 이젠 검사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우리는 2~3년을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하면서 살아왔다. 이 모든 검사가 한 번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보니 검사가 끝나고 결과를 마주하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2000년 2월 2일. 검사 결과를 보는 날이었다. 때마침 남편은 본사에 가야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남편이 걱정스레 말했다.  

“혼자 갈 수 있겠어?”

“내가 길을 모르나 뭐. 걱정하지 마.”

“그것보다도....”


 알고 있었다. 남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췌장 수술할 때 보호자와 함께 오라고 미리 연락이 왔었던 것을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이미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수술을 받은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큰 수술을 한 번 받고 나니까, 내 몸에 대해서는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 없었다.

 까짓 거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는 깡이 생긴 것이다.

죽는 게 별 것도 아니던데 뭐, 하는 배짱.  

   

나는 별생각 없이 병원엘 갔다. 그런데 결과를 보는 외래가, 원래 접수했던 외과에서 다른 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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