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내가 새롭게 마주한 외래는 소화기내과였다.
오랜 순서를 기다려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의사는 당연히, 낯선 얼굴이었다.
의사는 내 검사기록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간호사가 내게 의자를 내어 주었다.
나는 의사를 바라보며 앉았다. 의사가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혹시, 종교가 있으신가요?”
의사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나는 뜬금없이 종교를 묻는 의사의 말에 의아했다.
“있긴 합니다만, 그건 왜...?”
“지금부터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할 겁니다.”
나는 의사가 뜸을 들일 때는 반드시 쉽지 않은 결과를 말할 때 그런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 터였다.
“검사 기간이 길어서 고생하셨죠? 저희는 그동안 환자분의 위에서부터 소장, 대장, 십이지장과 직장까지 소화기관의 전체를 검사했습니다. 혹시 지난번 수술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을까 싶어서 담도내시경도 했고요.”
잠시 후 의사는 사진 여러 장을 내게 보여주었다.
“보시면 위에도 대장, 십이지장과 직장에도 염증이 많습니다. 특히 대장엔 아예 자갈밭처럼 울퉁불퉁하죠? 정상이라면 이렇게 매끈해야 합니다. 이렇게 울퉁불퉁하다는 것은 염증이 생겼다가 낫고 다시 염증이 생기고를 여러 번 반복했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매끈하고 선홍색의 대장 사진과 검붉은 색이 고르지 않게 분포된 사진을 비교하면서 보여줬다. 검붉은 색이 고르지 않은 사진은 그냥 봐도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의사의 말이 자꾸만 길어지고 있었다. 불길했다.
“원래 소장에는 염증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환자분에게는 소장에도 염증이 꽤 많이 발견되었어요. 그것은...”
나는 뭐 그까짓 거 별 거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혼자서 당당하게 결과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의 말이 자꾸 길어지고, 말을 끊을 때마다 조금씩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싶어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의사의 말에 집중했다.
“환자의 병명은 크론병입니다.”
사실 나는 혹시 무슨 암이라도 걸렸다는 것일까 싶어서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름도 생소한 크론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걸 말하려고 종교까지 들먹이다니.
“그게... 뭔데요...?”
“음.. 우선은... 희귀성난치성 질환인데... 안타깝게도 아직 치료약이 개발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 게 왜 걸린 건데요?”
“치료약이 없다는 것은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입니다. 그렇기에 치료약을 개발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희귀성 난치성 질환이라 함은...?”
“네, 말 그대로 환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죠. 우리 병원에 환자분까지 두 명이 치료받고 있습니다. 다른 한 분은 다른 지역에서 오고 있어요. 우리 지역에는 환자분 하나입니다. 희귀하면서 현대의 의학으로는 완치할 수 없다는 거죠. 쉽게 말하면, 그것을 희귀성 난치성질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에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의사는 내게 더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사이트를 알려주었다. 환우회라며 자기보다 거기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잠시 멍했다. 내가 지금 고칠 수도 없는 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세상에 암이 아닌 이상, 그런 병이 또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치료 약이 없다는 것은,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마세요.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크론병 환자들 중에 머리 나쁜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통계가 있답니다. 다들 IQ가 높아요. 전 세계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다고 해요. 원래는 서양인들이 걸리는 데 요즘엔 우리나라에도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죠. 그것은 환자분이 똑똑하다는 의미일 겁니다.”
의사가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내게 말했다. 아마도 위로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크론병환자로 살게 됐다.
나는 감기약 하나를 처방받더라도, 저는 크론병 환자입니다.라고 미리 말해줘야 한다. 과한 처방이나 항생제 처방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항생제는 장의 발란스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내 지갑에는 보건소에서 “희귀성난치성 질환자” 에게 발급해 준 증명서가 있다. 혹시라도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크론병환자를 감안하고 치료해 달라는 안내장이기도 하다.
지금에야 유명 연예인이 크론병 환자라서 조금은 알려진 병이다. 하지만 내가 크론병을 처음 진단받았을 때만 해도, 일반의사도 크론병 환자를 실제로 본 건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약국에서는 그게 어떤 병이냐고 내게 물어볼 정도였다.
병원 치료가 시작되면서 나는 일주일마다 병원에 가서 약을 타왔다. 스테로이드와 면역억제제를 처방받다 보니까 부작용을 보고 약이 가감되기 때문이었다.
의약분업이 되기 전이었다. 병원에서 약을 바로 타 올 수 있었다. 일주일 간 처방해 준 약을 복용하고 부작용이 없고 조금의 차도가 있으면 그 약을 계속 이어갔다. 피가 헐어 있는 대장으로 소실되어서 한 달에 한 번, 철분제를 링거로 투약했다. 치료약이 없다 보니 주 치료제는 스테로이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병원에서 준 약을 한 삼일쯤 먹었을 때부터 내 생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피곤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3월이면 큰애가 중학교 3학년이 될 예정이었다. 교통사고가 나고 채 6개월이 넘지 않았지만, 큰아이는 그런대로 빠르게 회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 어린애라서 그런 거라고 했다. 큰애는 학원에서 이미 고등학교 일 학년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선행학습이었다. 큰애의 모든 일정은 밤 12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내가 뒷정리하고 잠이 드는 게 새벽 1시는 되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새벽 4시에 맞춰놓은 알람시계소리에 거뜬하게 일어났다.
나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4시 30분, 새벽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6시에 예배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새벽시장에 가서 장을 봐다가 아침 준비를 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직장과 학교로 보냈다. 그리곤 집안일 끝내고 11시에 인터넷 강좌를 들으러 인터넷학원으로 갔다.
그때 우리 집에 486 팬티엄 컴퓨터가 있었다. 그러나 컴퓨터는 아이들의 전용이었고 나는 켜고 끄는 방법도 몰랐다. 몸이 좋아지면서 나는 컴퓨터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때는 컴퓨터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었다. 지금 사람들이 들으면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학원에서는 컴퓨터 켜고 끄는 방법과 인터넷 접속하고 이메일 주소 만드는 방법, 이메일 주고받는 방법과 문서작성하는 법을 가르쳤다.
한 시간 반 정도의 강좌를 듣고 돌아와 다시 집안일을 하는 데 전혀 피곤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 나의 변화를 보고 남편이 직장에 가서 내 얘길 했던 모양이다. 남편 직장 동료들이 그 약이 뭔지 자기들도 좀 구해다 주면 안 되겠느냐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달라진 것은 또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대형마트에서 일주일 동안 생활할 것들을 한꺼번에 구매했다. 그것은 내가 운전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식탐이 늘었는지, 카트를 두 개를 끌어야 할 정도 먹을 것을 주워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먹는 양도 엄청나게 늘었다. 혹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아니, 무슨 장사를 시작했어?” 할 정도였다.
그렇게 내겐 병이 우환이 아니라 생활의 활력소로 바뀌어있었다. 통증도 현저하게 줄었고 설사의 빈도도 낮아졌다.
나는 그때 알았다.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인 지.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는지.
나는 단 한 번도 하루를 온전히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피곤했고 머리가 맑지 않았다. 그 원인이 빈혈이 심해서라는 것을 작은 아이 낳을 때 알게 됐다. 철분제를 복용했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활기차게 움직이니까 가족들은 반가워했고 좋아했다. 집안 분위가 바뀐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매일 아프거나 누워있는 엄마에서 씩씩하고 활기찬 엄마로 바뀐 것이다. 많이 먹다 보니까 몸무게도 4킬로가 금방 늘어났다. 몸에 맞는 옷이 없었다.
그렇게 석 달쯤 지나고 있을 때였다. 거울을 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동그랗게 변해 있었다. 마치 호빵 같았다. 얼굴 전체에 잔털도 무수히 생겨서 마치 유인원 같았다. 거기다 갑자기 여드름이 돋아나서 얼굴 전체에 꽃이 핀 듯 울긋불긋했다.
온몸이 몹시 가려웠다. 처음에 나는 계절이 봄인지라 건조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리를 긁으려고 바지를 걷어 올리다 말고 나는 깜짝 놀랐다. 다리가 남자 다리처럼 검은 털로 뒤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각질이 일어나서 내가 긁적거릴 때마다 창으로 들어오는 볕에, 하얀 각질이 날아올라 공중에 떠다니는 게 보였다.
몸을 아무리 박박 문질러 씻어도 각질은 가라앉지 않았다. 점점 더 심해졌다. 나중엔 온몸의 살들이 붉은빛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의사는 내가 희귀 질환자인 만큼 언제나 진료 시간을 최대한 할애해 주었다. 대학병원 의사의 진료시간이 10분이네, 5분이네, 했지만 나는 거의 20분을 넘게 의사와 얘기했다.
외국에 연수차 다녀올 때는 그곳에서 개발된 신약이라면서 내게 주기도 했고, 세미나에서 전해 들은 희소식을 전해 주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여러 달을 만나다 보니까, 권위에 찬 의사가 아닌 내 병에 대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 같았다.
“온몸이 가렵고 각질이 생겼어요. 내가 움직일 때마다 공중에 눈처럼 각질이 날려요. 원숭이처럼 털도 엄청나게 났어요. 보세요.”
내가 옷을 걷어서 서양남자처럼 털이 숭숭 나 있는 팔뚝을 보여줬다.
의사가 웃었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입니다. 얼굴도 조금 둥글게 변했네요. 문 페이스라고, 이 또한, 스테로이드 부작용이죠. 어쩔 수 없습니다. 장에 워낙에 염증이 심한데 빨리 잡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스테로이드밖에 없어요. 그리 많은 양을 쓴 것도 아닌데 부작용이 유독 심하네요. 아마도 예민한 체질 때문인 거 같아요.”
“선생님, 저 약 끊을래요.”
“그건 안 됩니다. 아직 염증이 만족할 만큼 나아진 것도 아니고. 스테로이드는 그리 끊고 싶다고 단박에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서서히 끊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후유증을 겪을 수가 있답니다. 일단 제가 시키는 대로 따라오세요.”
통증과 설사의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피부에 발진처럼 돋아나는 여드름과 가려움, 발모 정도는 내 삶의 질을 몹시 떨어뜨렸다. 갑자기 불어난 몸무게는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에 땀범벅이 됐다. 아직 여름이 되려면 멀었다. 그런데 나는 갱년기도 아니면서 갱년기처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늘 내 몸에서 땀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병원에 갈 때마다 약을 끊게 해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의사는 그 주부터 약의 개수가 줄였다. 나는 그 약을 끊는 데 또 석 달이 걸렸다. 약발이 떨어지고 있음을 나는 며칠 만에 바로 느꼈다. 기운이 차츰 없고, 조금만 움직여도 예전처럼 피로감이 몰려왔다. 온몸의 모든 관절이 쑤시고 아팠다.
나의 찬란하고 씩씩했으며 활기찬 봄날은 다섯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끝이 나버린 것이다.
아이들과 남편이 직장과 학교로 가고 나면 나는 다시 예전처럼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던 6월 어느 날, 남편과 각별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의 여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내일 우리 방송국에 놀러 오지 않을래요. 우리 방송국에 행사가 있는 데 와요. 협찬이 많이 들어와서 선물도 많이 줄 거고 점심도 맛있는 도시락으로 줘요. 그렇게 집에만 있지 말고 놀러 와요. 내가 오늘 신청서 접수해 놓을게요.”
남편 친구의 여자 친구는 지역의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남편과 아이들이 출근하고 난 뒤,
방송국에 소풍처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