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아침부터 날씨가 흐렸다. 흐린 날씨 탓인지 6월 20일이 지났음에도 기온은 낮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방송국에 도착했다. 남편 친구의 여자 친구가 행사장에 미리 나와서 나를 맞아 주었다.
“언니, 얼른 와요.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네.”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은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미리 접수해 놓은 백일장 행사장이었다. 이름하여, “주부백일장”이었다. 지방 방송국이었지만 “주부백일장”은 역사가 길었다. 벌써 10년을 넘게 이어오고 있었다.
주부백일장이라고는 하지만 여성이라면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젊게 보이는 여자들이 많았다. 타 지역에서 온 듯 보이는 글쓰기 동호회의 팻말도 여러 개가 보였다. 글을 좀 쓴다는 사람들에겐 이미 유명한 백일장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적당한 곳에 자리하고 앉았다. 식이 시작되었다. 방송국 사장이 나와서 인사와 개회식을 하고 지역의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 몇이 축사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하루 종일 누워서 보내는 것에도 무료하던 차에 미리 접수해 놓았다는 신청서의 압박 아닌, 압박에 끌려 나온 것이었다. 날씨도 좋지 않으니 그냥 얼른 밥이나 먹고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시제가 발표되었다. 원고지와 볼펜도 지급되었다.
참가자들은 수필 부문과 시 부문으로 나뉘었다. 나는 시 부문에 신청되어 있었다. 남편 여자 친구의 생각에, 빨리 써내고 수다를 떨 수 있는 부문에서 시에 응모를 했다고 했다. 시는 아무래도 짧으니까. 그때 내가 알고 있는 “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짧다는 것 하나였다. 시라고는 학교 다닐 때 숙제로 써낸 동시가 전부였을 것이다.
시제는 “아침”과 “어머니”였고 또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여튼 나는 “아침”을 택했다. 아마도 그때가 다른 사람에겐 정오에 가까웠지만 내겐 아침이라서 더 끌렸는지 모르겠다. 10시에 시작한 행사는 여러 가지 식순에 이어 11시가 넘어서 글을 쓰는 순서가 됐다. 나는 얼른 써내고 점심을 먹든가, 남편의 여자 친구와 수다나 떨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곧 비도 내릴 것처럼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12시 30분부터 점심시간이었다. 더 써야 할 사람은 써도 되고 다 쓴 사람은 점심 먹고 돌아가도 된다고 했다. 나는 시제 “아침”에 대해서 써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놀러 왔다손 치더라도 백지를 낼 수는 없었다.
몇 자라도 끄적여 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원고지 한 장 반 정도에 생각나는 대로 써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점점 싸늘하게 느껴졌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생각도 나질 않았다. 몸이 으슬으슬해졌다.
남편의 친구의 여자 친구는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따끈한 어묵국물과 도시락을 내게 내밀었다. 크론병을 진단받고부터는 먹는 것도 그리 여의치 않아 졌다. 조금만 잘못 먹으면 찌르는 통증과 함께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더군다나 나는 밖에서의 화장실은 전혀 이용하지 못하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먹는 것을 자제해야 했다.
그다음 행사를 어떻게 치렀는지 모르겠다. 나는 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들고 갔던 가방을 구석에 던져 놓은 채, 옷도 벗지 못하고 침대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너무 춥고 피곤했다.
그렇게 나는 잠깐의 피곤한 외출을 치르고 그날이 끝난 줄 알았다.
그다음 날, 다들 집을 나갔고 식탁 위를 대충 정리하고 나는 침대로 직행했다.
아침 11시쯤이었다. 까무룩 잠에 빠져들어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전화의 스위치를 눌렀다.
전화의 목소리는 여자였다.
“여기 방송국인데요. 장원을 축하드립니다.”
“...............”
이 사람 뭐라는 거야? 뭐가 장원이라는 거지. 나는 잠결에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확히 내 이름을 댔다.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대꾸하면서 내가 방송국의 백일장에 간다고 누구에게 말했나를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말할 시간도 없었고 말한 사람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기 방송국이라니까요.”
“거기가 방송국이면 여긴 청와대다!”
냅다 소리친 뒤 전화를 끊고 돌아누웠다. 그러나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까 조금 전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제 백일장에 오지 않으셨어요?”
“갔죠.”
“거기에 내신 글이 장원에 당선 됐다니까요.”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얘기예요?”
“아니, 왜 제 말을 안 믿으세요?”
“그럼, 내가 뭐라고 썼는지 한 번 말해 봐요.”
나는 수화기를 들고 침대에서 빠져나와 어제 들고 갔던 가방을 찾았다. 그때까지 나는 어제 들었던 가방도 정리하지 않은 채였다. 어제 내팽개쳐 둔 가방을 찾아서 안을 뒤졌다. 다행히 원고지는 어제 넣어둔 그대로였다. 넣어둔 게 아니라 쑤셔 박아둔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어제 뭐라고 써냈는지도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잠시 후 수화기 속의 여자가 내가 썼다는 시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눈으로 따라 읽는 원고지의 글과 같았다.
“악~! 정말 내가 장원이라고요? 맞아요? 정말이라고요? 진짜죠?”
잠이 확 달아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시”의 “시”자도 모르면서 그 대회에서 제일 큰 상인 “장원”에 당선이 되었다.
장원에 당선되고 그다음 주에 시상식이 있었다. 시상식을 통보받고 방송국에 갔을 때 나는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장원으로 당선된 사람이라서기 보다, 당선을 통보해 주었을 때의 에피소드가 방송국 내에 퍼져있었다.
내가 “거기가 방송국이면 여긴 청와대다!”라며 전화를 끊었던 얘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믿기지 않았어요?”
“청와대에서 오신 거예요? 하하하”
나는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장원은 수필과 시를 통틀어 한 명이고, 차상 두 명, 차하 두 명이었다. 한 해에 수필과 시 부문에 다섯 명이 입상한다고 했다. 한 해 참가자가 450명이 넘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 내가 써낸 시가 제일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게 뭔 말인지 내가 써낸 시를 내가 읽으면서도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시상식을 시작으로 갑자기 바쁜 사람이 되었다. 행사가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것이다 보니,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신문사에 인터뷰도 했다. 텔레비전 지역뉴스에 나온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주부백일장은 10년이 넘은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동안의 수상자들은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 동호회에 환영행사에도 참여했다. 시화전과 시 낭송회 준비도 해야 했다. 지역 문학회에 초청도 받았고, 지역에서 행해지는 각종 백일장에 참가했다. 거기서도 나는 여러 가지 상을 수상했다.
그 해 나는 갑자기 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시”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선배 시인들은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뭐가 보여주는 것이고 뭐가 설명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계속 시를 썼으며 급기야 동인지도 출간했다. 내가 써낸 시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찰력이 뛰어나다거나 표현력이 대단하다거나 발상이 새롭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몇 년 간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바쁘고도 약간은 신나는 시간들을 보냈다.
지역에서는 꽤 지명도가 있는 대회에서 장원으로 입상한 수상 경력으로 어디를 가나 대우를 받은 것이다. 지역의 대학에서는 입학을 하게 되면 특전을 주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지 않았기에 전액 장학금을 준다 하더라도 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을 몰랐다.
내가 장원을 수상하고 두 번째 시화전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시화전에 내 보낼 그림에 시를 옮겨 쓰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한 선배시인이 말했다.
“운전면허를 따요, 세상이 달라 보일 거야. 기동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데.”
운전을 하지 못해 큰 액자들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옮기지 못해 힘들어하는 내게 말했다.
‘그래 운전면허를 따자.’
나는 지독한 기계치였다. 한 겨울에 남편은 출근 전에 승용차에 미리 예열을 시키기 위해 시동을 걸어두었다. 그러나 나는 키를 돌려 시동 거는 것조차 겁이 났다. 항상 승용차 시동을 거는 것은 큰 아이가 아파트 일층까지 내려가서 해놓고 올라왔다.
그랬던 내가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여자가 운전하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남편 몰래 운전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리고 한 달을 운전면허 따는 일에만 매달렸다. 운전하는 것은 재미있으면서도 온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거기다 기계치인 내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는 일이기도 했다.
오전에 학원에 다녀오면 바로 침대로 파고 들어갔다. 늦은 오후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녁 준비를 하는 비밀스러운 생활을 했다.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다는 얘길 듣고 친정엄마는 선물이라며 마티즈를 한 대 사 주었다. 사실 그때 나는 중고로 티코를 알아보고 있었다. 중고 티코라면 남편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내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큰 차를 운전하는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작은 차라면 조금은 만만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엄마는, 중고차 잘못 사면 두고두고 속을 썩일 것이라고 했다. 운전면허도 따기 전에 우리 집 주차장에 새 차가 미리 와서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매일 주차장에 내려가서 차에 시동도 걸고, 운전하면서 들을 카세트테이프도 미리 사다가 음악도 듣곤 했다.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었다. 그 선배 시인 말대로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달라 보였고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가뜩이나 나는 지병 때문에 마음에 추 하나를 지니고 있던 차였다.
그때만 해도 토요일이 휴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매일 출근하던 남편이 어느 토요일에 쉰다는 것이었다. 나는 큰일이다 싶었다. 나는 운전을 하는 것에 재미가 들어 있었다. 토요일에도 학원에서 운전연습을 하고 싶었다. 하루라도 빼먹으면 운전하는 방법을 잊을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나는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한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남편은 펄펄 뛰었다.
“내가 나가서 너 사고 날까 봐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야 되겠어?”
“사고 안 나면 되는 거잖아. 이미 등록을 해서 다음 주가 필기시험이고 말일에 주행시험이란 말이야.”
주차되어 있는 새 차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것까지 말하면 그 불같은 성질에 어떻게 나올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셔틀버스 시간을 놓쳐버렸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남편이 말했다.
나는 남편의 차에 올라 학원으로 향했다. 한 시간의 주행연습이 끝나고 돌아오는 차에서 남편이 말했다.
“언덕에서 시동도 꺼먹지 않고 잘 올라가더라. 제법이던데.”
그럴 수밖에, 내가 신청한 것은 오토면허였으니까. 남편은 오토면허가 생긴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선 나중에 말했다. 나는 필기시험도 주행시험도 한 번에 붙었다. 그때 남편이 기분이 좋은 것을 틈타, 나는 주차장에 새워진 빨간 마티즈에 대해서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이 또 한 번 펄펄 뛰는 때였다.
“우리 형편에 차가 두 대라니 말이 돼?”
“이 차는 엄마가 사준 거고 보험까지 다 들어줬어. 세금도 경차라서 얼마 나오지 않아.”
“그럼 내 차 팔고 이 차 타자.”
“..........”
그러나 다음 날 남편의 화는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내게 도로연수를 시켜주었다. 이미 많은 선배운전자들에게 남편에게는 절대로 도로 연수를 받으면 안 된다는 조언을 들었었다. 도로 연수를 받다가 이혼할 뻔했다는 것이다.
나는 온몸을 바짝 긴장한 채 도로연수에 따라나섰다. 남편이 운전하고 가면서 언덕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과 터널이 끝나는 곳에는 내리막길이 이어지기 쉽다는 얘길 했다. 나는 알아듣지 못해도 응. 하고 대답했다. 한적한 도로가 나오자 남편이 내리며 내게 운전대를 맡겼다.
이건 운전학원에서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보다도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불같은 성질의 남편을 옆에 모시고 운전하는 기분은, 대통령을 모시는 것보다 더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조금 서툴게 차선을 바꾸어도, 브레이크 밟아야 하는 곳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도, 남편은 처음이라서 그럴 수 있다며 차츰 익숙해질 거라고 격려해 주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왕복 100킬로미터를 운전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남편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나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다.
선배시인이 말한 대로 내 삶이 달라졌는지, 얼마나 자유로운 마음이 들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차를 가진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