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해가 바뀌었다. 큰 아이가 중학교 2학년에,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까지 작은 아이는 한글은커녕 산수도 전혀 하지 못했다. 내가 집에 붙어 앉아 아이를 가르친 적이 없었다. 몇 년을 장사를 했고, 장사를 끝내면서 병원에서 세월을 보낸 탓이었다.
당장 3월에 학교엘 가야 하는데 아이는 겨우 제 이름 석자를 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큰 아이 때와는 다르게 작은 아이를 대했다.
“억지로 뭘 시키려고 하지 마. 그냥 지가하고 싶으면 하게 될 거야. 너무 안달하지 말어.”
큰 애와는 달리 작은 아이에겐 너무 관대했고 너그러웠다. 큰 아이는 때려가며 공부를 시켰었다. 그런 덕에 큰 아이는 단 한 번도 우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작은 아이에겐 욕 한 번, 매 한 번을 댄 적이 없었다. 아마도 작은 아이는 그나마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태어난 덕이라 생각한다.
작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아직은 어리다면 어린 나이였지만 결혼식을 올렸고, 직장과 집다운 집이 준비된 뒤였다. 남편의 작은 아이에 대한 애정은 표가 날 정도였다.
그렇더라도 한글은 떼고 입학을 해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구몬선생님을 급조했다. 매일 저녁에 와서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다행히 아이는 빨리 글과 수를 빨리 깨우쳤다. 학교 입학 전에 한글과 산수를 마스터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이 교육에 부모가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할 때가 되면 한다는 거였다. 스파르타식으로 교육한 큰 애는 교과서 같은 아이였다. 정직했으나 융통성이 없었다. 그러나 작은 아이는 훨씬 창의력이 뛰어났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가던 정기 검진을 두 달에 한 번, 나중엔 6개월에 한 번씩 가도 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뒷바라지로 상반기를 보냈다.
여전히 나라는 IMF 중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불안감으로 뒤숭숭했지만 우리 생활에는 체감되는 것이 없었다. 남편은 오히려 승진을 했다.
그러던 그 해 여름이었다. 여름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서울, 작은 딸네 집에 갔던 시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이 왔다. 시부모님은 맞벌이하는 작은 딸네 집에 방학 동안 살림을 봐주러 가 있었다.
새벽에 삼성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는데 의사들이 며칠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는 것이다. 남편 직장으로 연락이 왔다. 나와 남편은 서둘러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우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모든 형제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듣던 것과는 달랐다. 응급실 침대에 앉아 있었고 우리가 들어서자 웬일인지, 애들은 어떻게 하고 온 거냐고 물을 정도였다. 나와 남편은 어리둥절했다.
“아무튼 의사들이란....”
남편과 나는 의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고 혀를 찼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급담당의가 형제들을 다 모이라고 하더니 말했다.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나는 속으로 뭐래. 저렇게 멀쩡하신 분을 두고... 생각하며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그때 시어머니의 나이가 65세였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새벽의 찬바람이 혈관에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의사들의 우려와는 달리 시어머니는 그날을 잘 넘기셨고, 며칠 만에 일반 병실로 옮겼다.
의사들은 시어머니의 병명을 어렵게 얘기했지만, 우리말로 풀자면 “풍”이었다. 시어머니는 말이 조금 어눌해졌고 약간의 치매가 함께 왔다. 뇌출혈로 인한 뇌손상 때문이었다.
시어머니가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것은 입원하고 한 달 정도가 지나서였다.
시어머니가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 모든 친인척들이 다 시집에 모였다. 내가 작은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오고 시집에 도착했을 때는 집안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찬송가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
시부모님이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과 목사님이 와서 예배 중이었다. 안방이 비좁았다. 나는 거실에 아이와 함께 앉았다.
그때 남편의 고모가 슬그머니 와서 내 손을 잡았다.
“얘야, 고생이 많았지? 몸은 좀 어떻노?”
“예, 많이 좋아졌어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안방에서 찬송가소리가 다시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래야지. 젊은 게 아파서야 되겠니. 잘 살아야지. 액땜했다 생각하면 된다. 젊었을 때 아픈 건 괜찮다. 금방 회복되니까. 늙어서 아픈 게 문제지.”
고모님은 내 등을 두드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네 어머니 살던 동네에선, 네 어머니 저렇게 된 게 죄받아서 그렇다 한다. 그 어린 거 한테 얼마나 못됐게 했냐. 그걸 다 본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말들하고 있어. 죄받은 거라고.”
나는 그저 힘없이 웃었다.
다음 날부터 나와 큰 동서는 시집으로 출근해야 했다. 시부모님의 식사와 집안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내 몸은 완벽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언제든 내 몸 하나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직은 어린아이와 중요한 시기에 있는 큰 아이, IMF에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이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남편, 거기다 쓰러져서 정신이 예전 같지 않은 시어머니까지. 갑자기 생활은 두 배로 바빠졌다.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가면 대충 집안 청소를 해놓고 시집으로 급히 가야 했다.
풍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시어머니는 몸이 불편한 곳은 없었다. 단지 기운이 없고 기억력이 나빠져 있었다. 금방 들은 것도 잊어버리는 약간의 치매 증상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상인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금방 예전처럼 회복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 여름을 두 집을 오가며 보냈다.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은 2학기에 올라갔다. 늦더위가 남아 있는 9월 중순이었다.
그날도 나는 시집에 가서 식사 준비를 해놓고 내려왔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하고 작은 아이를 씻겨 내놓고 더위에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고 나왔을 때였다.
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급히 전화를 받았다. 시계를 보니 밤 9시가 조금 안 되었다. 남편은 회식이 있어서 늦는다 했고 큰 애가 학원에서 아직 올아오지 않았을 때였다.
작은 애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으로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다.
전화를 받아보니 우리 아파트의 같은 단지에 살고 있어서 친하게 지내고 있는 언니였다.
“야, 빨리 내려와 봐. 큰일났어. 아마도 니네 큰 애 같아. 봉고차 앞 유리에 큰 검정 비닐봉지가 붙어 가다가 떨어지길래 뭔가 했더니. 사람이야. 야튼 빨리 내려와서 확인해 봐. 빨리 와, 빨리!”
전화선 너머에서 언니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횡설수설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서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엘리베이터로 뛰었다. 내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더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저녁을 먹고 더위를 식히려 나와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건너편 길에 경찰차가 두 대가 서 있었고, 길 옆으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큰 아이는 보이질 않았다.
“야, 아무래도 니네 큰 애가 맞는 거 같아. 애 집에 없지?”
“네, 학원 갔다가 이제 올 시간 됐어요.”
내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맞네, 맞아. 그 차가 학원 차였어. 얼른 신발 제대로 신고 머릿수건이나 두고 와라. 애는 벌써 병원으로 싣고 갔어. 따라가야지. 얼른 서둘러!”
언니가 내 등을 떠밀며 소리 질렀다.
나는 집으로 뛰었다. 정신이 없었다. 집엔 작은 아이가 혼자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는 둥마는 둥 거실에 앉아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젖은 머리를 대충 털고 지갑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엄마, 왜 그래?”
작은 아이가 겨우 신을 발에 꿰며 물었다.
“모르겠어. 엉아가 다친 거 같아. 얼른 병원으로 가야 돼.”
언니가 벌써 아파트 입구에 택시를 잡아 놓고 있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달리는 택시가 얼마나 더디게 느껴지는지, 연실 택시 기사에게, 아저씨 빨리요, 빨리하며 재촉했다. 택시가 응급실 입구에 우리를 내려줬고 나는 택시 문을 닫았다. 조수석에 탄 언니가 내리면서 소리쳤다.
“야, 애는 데리고 가야지!”
내가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애가 내리기도 전에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언니가 안내창구에 큰 애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그냥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언니가 내 손과 아이 손을 잡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간호사가 응급실 침대의 커튼을 걷어 주었다.
커튼 뒤에 누워 있는 사람이 우리 아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아이는 의식이 없었다. 퉁퉁 부은 얼굴은 온통 피로 뒤엉켜있었다. 어디가 어떻게 다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흘러내린 피로 인해 머리카락이 쇠못처럼 빳빳했다. 아침에 입고 나간 청바지와 검은 티셔츠는 온통 구멍이 나 있었고, 선지처럼 뭉친 핏덩이들이 군데군데 뭉쳐서 꾸덕하져 있었다.
그나마 의사가 치료를 하기 위해 잘라버려 누더기가 되어 간신히 걸쳐져 있었다. 벌써 아이에게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산호호흡기를 비롯한 의료기기가 온몸에 설치되어 있었다.
내가 큰 아이를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았다. 그러나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손도 부어올라 풍선 같았다.
그 옆에 웬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서 있었다. 큰 아이가 다니는 학원의 운전기사였다.
“죄송합니다. 애가 지나가는 것을 보질 못했어요.”
남자는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서 내게 말했다.
“조심하셨어야죠. 횡단보도인데. 어떡해요. 애가 안 깨어나면.?”
오히려 언니가 화를 냈다.
"보호자 되십니까?"
그때 아이의 침대로 의사가 와서 내게 물었다.
“네, 어때요? 우리 아이?”
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검사부터 할 겁니다. 검사가 끝나고 나서 그때 이야기 하기로 하죠.”
큰 아이는 침대 채 끌려 CT촬영실로 갔다. 나는 침대를 따라가다 응급실 유리문에 매달려 두려운 눈빛으로 응급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했다. 내가 큰 아이에게 매달려 있는 사이, 작은 아이는 큰 눈동자를 굴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작은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기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어. 어디 가면 안 돼. 아빠가 곧 올 거야. 엄마는 엉아 검사하고 올게. 알았지?”
“응.”
작은 아이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응급실엔 쉴 새 없이 환자들이 실려 들어왔다. 의사와 간호사, 구급대 대원들이 뒤엉켜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그날따라 환자들은 넘쳐났고 하나같이 교통사고 환자들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 오는 환자들이 내뱉는 신음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들것을 들고 오는 구급대원들은 의료진을 향해 소리쳤고 의료진들은 뛰었다.
여덟 살 아이가 보기에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광경이었을지. 나는 그때 작은 아이를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의식이 없는 큰 아이가 살고 죽는 문턱에 있었다.
작은 아이가 울음을 터트린 때는 아빠가 오고 나서였다.
그때는 휴대전화가 없을 때였다. 퇴근을 하면 달리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갈만한, 알만한, 모든 곳에 연락을 했다. 남편 친구들에게는 물론이었다.
남편이 병원으로 달려온 시간은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우리가 병원에서 두 시간 가까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때 남편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작은아이는 아빠를 보자마자 안심이 된 것인지 매달려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