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책을 언젠가 볼 것이라면 가급적 책을 읽고 저의 글을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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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중반부를 넘어가는 시점에서야 영혜가 정상이 아님을 인지했다. 냉정하고 차분하며 일관성 있는 그녀의 태도와 행동, 자연스럽기 위한 누군가의 관찰 때문에 그녀를 정상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를 부정하는 순간, 누구도 정상일 수 없었다.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그들은 모두 숨겨왔던 내면 때문에 아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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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을 거부한 영혜가 채식을 넘어 스스로가 나무가 되려는 순간까지, 그녀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삶은 (그녀 만큼이나) 큰 변화를 마주한다. 영혜 한 사람의 평범함으로부터의 이탈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숨겨왔던, 아니 숨기고 살아야 했던 내면의 자아를 끄집어낸다. 이젠 무엇이 평범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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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누군가에 대한 관찰과, 관찰하는 관찰자의 내면이 책의 전부다. 이 글에 등장하는 누구도 함부로 평범하다고, 또는 이상하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영혜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인내하며 평범하게 - 오히려 착하기를 자처한 지혜도, 평범함 속에 자신을 숨겨오다 자신의 관능적인 충실함을 발산한 길 수도, 그들을 바라보며 도피한 민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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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관찰은 나의 습관이다. 그 습관들로부터 누군가를 나의 언어로 지칭하려고 할 때,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려는 태도를 가진다. 결과에 대해 평가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거부감은 관찰자의 태도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관찰의 모양은 있으나 기준은 없다. 기준이 없는 분석은 공중에 떠도는 먼지와 같아서 누구도 주시하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불편함으로 남는다. 내 안에서 재구성된 사회적 관념과 합의된 이데올로기를 따라 관찰대상의 평범함의 정도를 정한다. 그렇다고 내 안에 형성된 또 하나의 세계에 의해 관찰된 결과물이 엉성하고 편협한 것만은 아니다. 내가 구성되기 위해 거쳐 간 수많은 다양성들의 존재 자체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누군가를 관찰한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나를 거쳐 간 세상의 입장이라 하고 싶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작가를 거쳐 간 관찰은 어떤 결과물을 내놓았나. 적어도 나에게 재구성된 작가의 글은 그리 유쾌하진 않다. 평범한 사람은 없으며, 누구든 내면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아파하고 있다. 민호의 입장처럼 그들을 방관하는 것 또한 죄를 물을 수 없는 이기심인 것이다. 그들은 어디서 위로받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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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그들은 끝까지 혼자다. 특히, 많은 것을 포기하고 영혜에게 헌신했던 지혜는 오히려 영혜로부터의 고립을 경험하게 된다.
서로. 함께. 더불어. 공동체. 민주주의
둘 이상의 인격체가 만난다. 상생하기 위해 도덕적 양심을 토대로 규범을 정하고 가치를 만든다. 그것에 맞추어 때로는 인내하고, 때로는 끌어올린다. 그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이탈하는 소수를 위해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기도 하며, 소수가 다수가 되었거나 소수가 주장하는 다름을 다수가 인정할 수 있을 때 규범을 수정하기도 한다.
함께 살기 위해 스스로를 제한하고, 때론 병이 든다. 하지만 결국 상처 받는 것도 위로받는 것도 혼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