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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Nov 25. 2019

11월의 자화상

컴퓨터를 켜면 잠금화면이 뜬다. 2초 정도 멈칫하는데, 잠금화면의 배경이 매번 바뀌면서 아름답거나 관심이 갈 만한 풍경 내지 어떤 장면을 담아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가 가봤던 어떤 곳의 풍경을 비춰오면 목적을 잃은 채 과거의 어떤 순간에 집착하며 온몸으로 미미한 감정을 부풀리고 또 끌어내기도 한다. 그 시간은, 단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보낸 시간. 그러니까 재밌지도 않고 보람차지도 않은 어떤 일 또는 휴식을 하며 보낸 시간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삶의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큼 소모적이고 지친 자기 학대도 없겠지만, 인생은 언제나 조금이라도 젊을 때 더 많은 것들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품은 야망보다 나는 훨씬 게으른 사람이다.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자기비판에 갇혀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넌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은 거야’라고 최면을 건다. 자괴감은 이렇게 찾아와 쌓이다가 어느새 동굴 안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이내 털어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그 원동력은 더 나은 나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였을까, 나는 연말이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는데 또 일 년이 지나갔어”


역시나 올해도 습관처럼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특별히 올해는 서른이라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이의 압박. 그리고 관종끼가 다분해서 ‘이것 봐, 정말 우울한 인생이지?’라며 스스로를 더 처량하게 만들기 위한 언사였을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이렇게 또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내년은 올해보다 더 나은 1년을 보내자고. 제대로 성찰하지도 않은 지난 일 년과, 이제 찾아올 새해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습관처럼 말을 했다. 이게 얼마나 나를 기만하는 처사였는지, 친구는 의아해하며 말했다.


“너 올해 책 썼잖아?”


그랬네


사실 올해는, 올해를 만들어 준 지난 몇 년은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한 시간들이었다. 늘 나의 노력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자책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처음으로 출간이라는 결과물을 내놓은 것. 처음으로 꿈이라고 스스로 지칭한 것에 대한 결과물을 만들었던 1년이었다.


-


그래서 올해는, 남은 한 달은 더 이상 내가 보내는 여유와 목적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째려보며 나무라지 않기로 했다. 잘 되지 않겠지만, 조금은 여유롭게 내 한계를 인식하고. 그리고 나를 몰아세우는 내년을 만들지 않기 위해 나를 몰아세우는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빚, 글, 가게, 가족, 연애, 결혼


가로로 나열하니 무게감이 떨어진다. 남들 다 하는 고민을 굳이 이렇게 심각하게?라는 느낌이랄까…




가게


가족


연애


결혼


이렇게 쓰니 하나하나 아주 중요하고 나를 거세게 몰아세우는 악의 무리 같아 보이네.


나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나를 그 한계에 가두는 것 일수도 있지만, 한계를 인식하다! 뭔가 거창한 어떤 의미보다는 여유를 원하는 것이다. 나를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자는 다짐이다.


“Boys! Be Ambitious!”


수능을 앞둔.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어릴 때부터. 꿈을 생각하며 내가 하고 싶은 분야의 최정상을 봐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면 최고가 되지 못해도 최선을 이룰 수 있다고.


이 말은, 지금은 그다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적어도 나에겐 아닌 것 같다. 과거를 비추어 봤을 때 이상과 현실의 갭(gab)은 나를 주눅 들고 처량하게 만들 뿐이었다. 더군다나 난 Boy가 아니라 서른즈음에니까.


그래서 글에 대한 욕심도 조금 내려놓을까 한다. 전업작가가 되어 충분히 글에 인생을 투자할 수 있다면 모를까, 어쨌든 난 지금 난 가업을 물려받은 편의점 사장이다. 매주 하나의 산문과, 장기적으로 단편 소설집을 쓰기 위한 도전은 하루 평균 10시간을 넘게 일하는 나에겐 무리였다고 하련다. 내년 한 해가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고 해도 나를 나무라지 않겠다. 다만 조금 오래 걸려도, 나의 속도를 찾고 그 속도에 맞추어 걷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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