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드나무 Jan 30. 2020

이별을 고하는 자에게

사실이 아니지만 상대를 회유하기 위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이별의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연인 사이의 헤어짐 뿐만 아니라 어떠한 방식이든 누군가, 또는 무엇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 그것은 나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행위일 수도 있고, 두려움에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순간적인 감정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극단적인 방법은 많은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지만 사실은 상대, 또는 나로 하여금 다른 많은 상황을 고려하게 하지 못하고 머릿속을 하얗게. 단지 하나 또는 두어 가지의 선택지만 쥐게 한다. 돌이켜 보면 난 정말로 그것을 원하지 않았을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래의 일이야 어떻든, 당장 내가 죽을 것만 같으니까. 참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이별을 생각한다.



마음이 약해진 것일까, 솔직해진 것일까. 과거에 나는 많은 것을 인내했다. 그러다 보면 어떤 것은 해결돼 있다. 어떤 것은 그렇지 않지만 감정의 동요를 잠재우고 침착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이런데 쓰이는 것이겠지. 그러나 이 방법이 능사는 아니다. 내가 담아낼 수 있는 만큼의 양이 있다. 참고 인내하다 보면 분명 그릇의 크기가 커진다. 이런 걸 성장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크기와 상관없이 그릇은 낡고 약해져 간다. 바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담아내다 보면 그릇은 깨지기 마련이다. 담아내는 방법이 잘못됐을 수도 있고, 담지 말아야 할 것을 담았을 수도 있다. 잘못 살아왔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살다 보니 내가 나를 좀 더 잘 알게 됐다고 하고 싶다. 



그래, 나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뿌리가 깊게 박혀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많은 가지와 푸른 잎들로 그늘을 만들어 주고,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는. 심심하지만 어느 계절과 어울려도 이상하지 않은 침엽수 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작은 토끼풀이나 수수깡처럼 작고 힘없는. 어쩌면 이리저리 바람의 변덕에 자리 내리지 못하는 민들레 씨 같은 사람. 나무 같은 사람이어라! 그렇게 살아왔지만, 나는 잎을 갉아먹는 송충이도 못 견디는 꿈만 커다란 풀떼기였다.



그래서 이제는 견디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갈대가 바람을 맞이하는 방법은 버티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다. 나무인 척한다고 나를 나무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평소와 다른 시선을 보내는 것이 불편하고 가끔은 자존심도 상하지만, 아무렴. 찢기고 꺾여보니 차라리 그게 훨씬 낫더라. 그래서


오늘 나는 사시사철 푸르던 나무에게 이별을 고한다. 지독한 이별이든, 아쉬운 이별이든. 이별을 말하는 자들에게 그 선택은 나를 더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부터 일 테다. 사춘기 시절에 이런 글들을 지껄여 놓았다면, 그래 뭐 질풍노도의 시기니까. 쟤도 중2병 걸렸나 보다 하겠지. 맞아. 나는 서른이 되고서야 첫 사춘기를 마주한다. 이 이별은, 그간 사춘기를 겪을 세도 없이 단단하게 살아야 했던 지난날을 위로하는 선물쯤 이려나.

작가의 이전글 하소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