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30년 인생이 말하는 인생학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 이 마음은 참 어렵다. 사랑이나 관심 없이는 불가능하기도 하다. 게다가 어쭙잖은 이해는 반감을 일으키기도 하니, 역지사지의 마음은 시작부터 아주 어려운 인류의 과제인 것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이 살아온 세월만큼의 다름이 존재하기 때문에 공유해온 시간이 적을수록 사실 이 역지사지의 마음은 이해보다는 예의에 가깝다. 또 이해에는 한편으론 힘이 필요하다. 이해라는 것의 가장 큰 힘은 경험이다. 완전히 같은 경험은 아닐지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상대가 겪은 일을 겪어본 그 경험은 시작부터 나의 말에 힘을 실어준다. 먼저는 상대의 경계와 반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로 그 마음을 비슷하게 알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겪을 당시 필요했던 격려나 위로를 생각하면 상대에게 어떤 말과 행동이 필요한지 얼추 알기 때문이다. 이 경험이 없다면 앞서 말한 관심이나 사랑 또한 힘이 될 수 있다. 내가 어떤 일을 직접 경험해보진 않았더라도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상대도 그 마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역지사지의 마음은 사실 상투적인 관계에선 발현되기 어렵다.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을 뿐 사람에 대한 이해는 결여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지사지는 관심과 사랑의 대상에게만 품을 수 있는 마음이다. 구체적 대상으로는 가족, 연인, 친구 정도다. 물론 직업과 개인적 성향에 따라 고객이나 동물,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오늘 내가 말할 역지사지의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역지사지의 마음의 핵심은 사실 ‘마음’에 있지 않다. 행동이 수반된 마음이야 말로 역지사지의 핵심이다. 이 행동의 의미는 물론 마음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어느 날 이런 마음이 들었다. ‘한 시간 일찍 교대를 하면 엄마가 참 좋아하겠다.’라는 마음. 물론 내가 일하는 시간이 훨씬 많다. 그러나 엄마의 나이와 몸상태를 고려하면 이 한 시간의 이른 교대는 엄마에게 아주 큰 힘이 된다. 나의 한 시간의 노동으로 어머니에게 한 시간의 휴식을 선물할 수 있었다. 이전엔 내가 이걸 몰랐을까? 아니다. 내가 몰랐던 것은 나의 기쁨이다. 내 희생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얻는 행복을 기뻐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역지사지의 본질이다. 나는 그 한 시간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당연하다. 내가 하는 일과 엄마가 하는 일이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역지사지의 마음은 상대의 행동이나 마음에 따라 발현되는 나의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다. 상대의 삶을 이해하고자 할 때 나오는 능동적인 자세인 것이다.
연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하게 될 행동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친구를 만난다. 술자리를 가진다. 회식을 간다. 클럽을 간다. 여행을 간다. 연락 문제 등.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한 변명이나 이해를 바라지 않고, 내가 이렇게 행동했을 때 또는 행동하지 않았을 때 상대가 품을 마음과 생각, 행동을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하거나 하지 않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은 누구도 주고만 살 수는 없다는 것. 상대가 아무리 나의 이해로 기뻐할 지라도, 그 이해를 몰라주거나 받기만 한다면 지치기 마련이다. 반대로 상대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 역지사지의 마음은 시너지를 가진다. 이 역지사지의 원동력은 내 행동과 마음에 기뻐하는 상대의 마음과, 상대가 보이는 역지사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글로 역지사지라는 말을 풀어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이 마음을,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사람을 향해 ‘다정한 사람’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