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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쌍꺼풀 오이씨 Mar 17. 2020

쌍둥이 아빠로 살아간다는 것

차별하지 않기

 나는 쌍둥이 아빠다. 만 3살이 된 사내 쌍둥이 아빠다.

 아내 뱃 속에 쌍둥이가 숨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뻤다.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편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편애(偏愛)「명사」 어느 한 사람이나 한쪽만을 치우치게 사랑함. (출처 : 국립국어원 누리집)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편애 하지 말자고 서로 다짐했다. 주위에서 편애 때문에 너무 많은 상처와 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편애를 받은 사람도, 편애에서 소외된 사람도 모두 상처를 받는 것이 편애이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폭력. 그 이상일지도 모른 다는 것이 아내와 내 생각이다.


 처음 기적같은 쌍둥이들을 보았을 때 편애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꼬물거리는 손, 작고 투명한 발, 혀 위에 어떤 말인가를 올려 놓고 나지막히 읍조리는 듯한 입술 움직임, 코 끝 솜털사이를 지나는 들 숨과 날 숨. 모든 것이 경이로웠고 모든 것이 사랑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찬란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다. 기적 그 자체인 아이들을 어찌 치우치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을 더 주지 못해 신경 쇠약에 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련만.


 아이들이 점점 자라간다. 뒤집다가 앉다가 서다가 한발 한발 걷다가 넘어질듯 뛰다가 이제는 날아다닌다. 두 아이가 신나서 집 안을 뛰어다니는 소리를 눈 감고 듣고 있으면 마치 초원 위를 질주하는 소 떼들의 달음박질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행동만 커진게 아니라 아이들의 생각의 크기도 커지고 깊어지고 활발해졌다. 말과 행동과 각자의 결정이 커지니 부모인 우리들과 부딪히는 부분들도 점점 늘어간다. 충돌. 아이가 아무리 보채도 미소만 가득했던 내 얼굴에 어느새인가 화가 자리를 잡고 있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화가 나기도 한다. 어느 때는 화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화를 달랜다. 아이도 달래고 화도 달래고. 지친다.

죽어라 치워도 죽어라 어지른다


 어느 날은 밤에 하루를 가만히 되돌아 보니 한 아이에게만 화를 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편애가 나타났다. 나에게는 사랑이 아니라 화로. '편화'라고 해야하나? 그냥 그러지 말자고 다짐한번 하고 넘어가면 될것을 숨 죽여 울었다.  그냥 헛 웃음 한번 짓고 그러지말자, 나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름 잘 했다. 다독여 주면 될 것을 아직 마음 한 구석에서 자기의 자리를 주장하고 있는 우울증이 불끈 일어나 나의 생각을 자기의 양식인양 낚아채선 내 감정을 휘적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헛 웃음 한 번, 큰 다짐 한번, 되뇌임 여러번 이면 될 것을 우울에게 주도권을 내 주어 쓰잘데 없는 상처만 남겼다. 생각할 때마다 쓰라리게시리.......


 아내의 어머니는 편애에서 소외 당한 쪽이셨다. 아내의 외삼촌은 편애의 수혜자였다. 한 쪽은 빈곤을, 한 쪽은 풍요를 경험했지만 두 분에게는 공통분모가 있다. 분노. 편애를 보인 이에 대한 분노. 이건 마치 단단해야 할 혈연의 끈을 끊는 어마무시한 절단기이다.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렇다. 그 절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70을 바라보는 장모님의 손에 아직도 쥐어져 있고, 그의 동생의 손에도 아직도 있다. 절대로 생겨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맘처럼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더 무섭고 조심해야 한다.


 가끔 아이들이 투닥거리면 누구랄것 없이 꺼이꺼이 울면서 부모의 품으로 달려든다. 굳이 판단 기준을 들이밀자면 가해 쪽이나 피해 쪽이나 상관없이 둘 다 속상한 마음을 가지고 엄마 아빠 품으로 뛰어든다. 울음이 말을 막아 자신을 변호하지는 못하지만, 울음이 눈물이 우리 귀에 그 아이의 사정을 전해준다. 둘 다 속상하다. 저걸 갖고 놀고 싶은데 그냥 안줘서, 이걸 갖고 놀고 있었는데 빼았아 가서......둘 다 다르지만 속상함을 안고 있다. 우리 부부는 이럴 때 절대 판결자가 아니라 들어주고 마음을 만져주는 이들이 되자고 했다. 나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속상했구나, 속상했구나, 속상했구나. 아이의 울음과 속상함을 말하는 문장이 잦아들 때 까지. 아침의 속상함이 불현듯 저녁 밥상 머리에서 생각이 나서 눈물을 불러내도 들어주고 안아주고.......


 이건 아마 편애의 고통을 절실하게 보고 자란 아내의 경험과 사랑의 부재가 주는 헛헛함이 시디신 칼날이 되어 가슴에 박혀 버린 내 경험이 합쳐져서 생긴 양육 방식일거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우리 마음은 아이들 마음에 속상함이 남지 않게, 편애가 지나간 생채기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우리의 바램이다. 넉넉하게 받아들여진 경험이 나중에 이 아이들이 다른 이들을 넉넉하게 받아주기를 바라며, 우리는 편애를 최대한 멀리 두고 싶다. 무저갱이 있다면 거기에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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