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요아 Oct 07. 2021

집과 가까운 집


고향에 내려왔지만 따로 살고 있다. 사람들은 왜 집값을 아낄 수 있는 본가까지 내려가서 독립을 하느냐 묻는다. "혼자 산 시간이 길어서요."라 얼버무리지만, 여기서는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한 마디로 채 끝나지 않을 문장을 여러 번 이어 가장 명확한 생각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일차원 집단이라 불리는 가족이라는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며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짐이 되고 내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내 발을 잡는 무게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단언하건대 나는 후자였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내가 점점 계산적으로 변한 이유도 가족이었다. 쉴 틈 없는 가스 라이팅과 도를 지나치는 매로 나를 길들인 가족을 보고 있으면 작은 공으로 어떻게 필요한 자원을 얻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가족이 나에게 대가를 주지 않으면 나도 시간과 마음을 아꼈다. 아끼고 아낀 마음은 점점 굳건해져서 내보여야 할 사람을 만나도 보관하기 바빴다.


그러나 졸업을  무렵, 동생은 스스로 세상을 등졌고 엄마는 차를 폐차시켜야  만큼의 커다란 교통사고가 났다. 막내는 자살을 고민할 정도의 심각한 우울증이 왔으며 아빠는 그가 저지른 가정 폭력을 시인했다가 부인하기를 반복했다. 엎친  덮친 격으로 나는 대인기피증 진단을 받았다. 보폭을 넓혀 만들었던 세상이라는 집단에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면 남은 사람들은 지인 뿐일 테니 아끼려는 마음과 싸우며 사람을 사귀었건만 상대방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아도 정작 내가 그들을 무서워했다. 모두가 나를 미워하는  같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삶을 선택했으므로 대인기피증이 드러나지 않는 가족에게 시선을 돌렸다.


할 일이 많았다.


일과 공부를 내팽개치고 가족만 돌봤더니 상황은 점점 나아졌다. 그때만 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두고 이들을 보살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받는 사랑에 금세 익숙해지는지 내 애정은 점점 당연한 감정으로 여겨졌다. 그러자 다시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이전의 상황으로 뒷걸음쳤다. 동생은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부푼 짜증과 지나친 자기 연민으로 남은 시간을 바라봤다. 문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재롱을 떨거나 엄마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쑥스러운 말을 건네도 그때뿐이었다.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문제를 내 쪽으로 돌렸지만 문제는 내가 아니었다. 포기했다가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같은 답이 나왔다. 문제는 내가 아니었다. 반년 간 본가에 머물며 노력한 흔적이 흩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자 가족을 더 미워했다.


어떻게 내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있냐고, 반년 간 일을 포기하고 집에서 살며 당신들에게 다시 애정을 준 건 내 몫이 아니었냐며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 내려와 가족의 곁에 머물며 회복을 꿈꾼 건 처음부터 끝까지 내 선택이었으므로 콕 짚어 누구를 탓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버스를 타고 이십 분은 가야 하는 거리에 월셋집을 구했다. 고향까지 내려왔는데 가족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찜찜했다. 하루가 그랬고 일주일이 그랬다. 일주일이 그랬고 한 달이 그랬다. 딱 한 달이었다.


한 달간 거리를 두자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다. 가까워진 거리에서도 가족을 온 마음 담아 보살피지 않는 환경에 놓이니 도리어 죄책감이 줄었다. 선의가 가족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처음 했다. 이토록 노력했는데 마음을 열지 않으면 남은 건 기다림뿐이다. 나를 갉던 커다란 죄책감이 천천히 깎였다. 가깝게 살지만 자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나를 안았다.


조금만 신경 썼으면 동생을 살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을 너무 오래 하느라 생각의 초입에 들어가기만 해도 숨이 벅차다. 일상을 내팽개치고 그를 보살폈다면 지금쯤 나와 함께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았을 거야. 여느 시월보다 뜨거운 가을볕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기 바빴을 거야. 그러나 이젠 안다. 진심을 다해서 동생을 보살폈다는  내가 안다.  선에서  했더라면 내가 나를 포기했으리라는  안다. 이런저런 입장으로 나를 대면했을 때도  결론이 자기 합리화가 아닌  안다.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가족을 책임감으로 되레 보살피는 이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 싶어 읽지 않을 시간에 글을 쓴다. 당신이 자책감과 죄책감을 그만 뭉쳤으면 좋겠다. 집에 머물지 않고 집과 가까운 집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지은 우리의 집이 굳건히 버텨 이웃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이 마음을 지니 타인이 점점 무서워지지 않기 시작했다. 당신은 당신의 집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이고, 나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부족한 게 많고 아픈 곳이 많은 사람이어서. 당신은 이런 나를 미워하지 않을 테니까.


결코.




이전 11화 도망도 버릇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