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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Oct 03. 2021

도망도 버릇


내가 섬으로, 시골로, 안으로 도망친 이유는 작게 여럿이 있지만 크게는 매일의 흑역사를 갱신하는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친구에게는 도통 빠지지 않을 가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사적인 곳에서 얻은 짜증을 공적인 일에 배이게 할 수 있다는 확률이 무얼 하도록 만드는 주체성을 앗아갔다.


좋아하는 이를 만나 근황을 나누거나, 열정을 지니고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일에 집중하거나, 점원에게 살가운 말로 인사를 건네는 일도 그만두었다. 지쳤거나 부질없게 느껴졌기보다는 무서워서였다. 관계에는 답이 없었다. 다정한 진심을 담아 안부를 물어도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이윽고 입을 닫고 집에 들어사는 게 모두를 다치지 않게 하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반년 이상 문을 걸어 잠갔다.


누명을 쓰면 아득바득 잘못이 아니라 말하던 성격에서 갈등을 부풀리기 싫어 입을 다물고 도망치는 쪽을 택하자 고립감이 더욱 깊어졌다. 무례한 사람과 맞서 싸우지 않으니 감정 소모는 없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점점 사람이 무섭고 싫어졌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내 글을 읽는 사람뿐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를 애정하는 사람 몇은 도망이 내 삶을 애착하는 증명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부딪혔을 때 삶을 내려놓지 않고 다른 길이 있으리라며 용기 있게 뒤를 돈다는 해석이었다.


첫 책 『제주 토박이는 제주가 싫습니다』에서 무거운 왕관이 아닌 가벼운 왕관을 찾아 쓴다는 얘기를 썼다. 버티지 못할 중압감이 든다면 척추를 위해서라도 무거운 왕관을 내려놓겠다고. 그러나 종일 가벼운 왕관만 찾다 보니 원래는 거뜬히 들 수 있을 만큼의 무게도 들기 버거워졌다. 어느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야 했는데, 할 수 없는 일만 정하다 보니 정작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급한 메일이라면 융통성을 발휘해 주말이어도 한 통 정도는 쓸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토요일에 일을 시키냐며 속으로 펄펄 뛰었다. 당근 마켓에 물건을 올렸는데 터무니없는 값으로 깎아달라는 요청을 들으면 대답하기 힘들어 물품을 내렸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에 도망치는 특징이 더해지니 큰 결심을 하지 않고도 포기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디선가 사는 것은 단순히 사는 게 아니라, 죽음과 삶 중 삶을 택한 이들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따로 삶을 택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택한 것도 아니었기에 굳이 얘기하면 삶 쪽이라는 말이 맞았다. 그러면 좋은 일이건 싫은 일이건 마주 봐야 했다. 싸우지는 않아도 좋고 싫다는 의사를 표현해야 했다. 불가피한 일로 물러선대도 내 탓이 아니라는 말은 한마디 해야 했다. 누명을 씌운 사람이 곤란해진다는 배려는 잠시 넣어두어야 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홀로 아프게 곪는 건 나였다. 더불어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명확한 거절 의사를 밝히지 않는 건 되레 상대를 괴롭히는 일이 될 수 있었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무서울 때, 진심이 오지랖으로 해석될까 두려울 때마다 나는 '서툴다'는 표현을 떠올린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모두 서툴다. 자신의 가장 완벽하고 성실한 면을 꺼내 전시해야 굶어 죽지 않는 사회에서 서툴고 부족하고 노력하겠다는 말은 나의 약점을 구태여 꺼내는 일처럼 치부되지만, 나는 죽음이 아닌 삶을 고른 사람이며 사생활에서까지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완벽해지고 싶더라도 모든 일에 서툴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어서다. 그건 나도 그렇고 나와 마주 보는 그대도 그렇다. 우리는 서툶 속에서 진심을 찾아내려는 마음만 잃지 않으면 된다. 잊지 않으면 된다.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있는, 타인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요. 어쩌면 어떤 치유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있을 겁니다.

《우리는 자살을 모른다》 임민경, 들녘,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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