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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함을 자주 느끼는 분에게 부치는 편지

by 현요아


여기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지 궁금해 노크를 두드리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올해 나는 인간관계에 새로운 고민이 생겼는데, 관계에서 비롯된 오해를 푸는 게 귀찮고 번거로워 상대에게서 내게 실망한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순간, 이 관계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며 멀어지는 쪽을 고른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해서 관계의 매듭을 더 끈끈하고 촘촘하게 엮을 텐데 나는 당최 그런 데 관심이 없다. 정확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사건을 헤집고 본래 의미는 그게 아니었다며 자초지종을 읊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어찌 보면 떠날 사람은 떠나라는 식의 달관이다. 물론 이러다 곁에 아무도 두지 못할 수 있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음의 문이 닫혔음을 처음 느끼게 된 건 예민함을 느끼는 정도가 굉장히 커졌다는 거였다. 이전 같으면 좋게 좋게 생각하자며 넘어갈 일이 아무리 좋게 좋게 여기려 해도 좋지 좋지 않게 해석됐다. 급여 명세서를 하도 주지 않아 세 번 정도 요청드렸더니, 상대 편의 상사에게서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계속 급여 명세서를 달라고 하셔서 연락드렸어요.”라는 답변으로 말이다. 어떻게 ‘계속’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그 두 글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급여 명세서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말씀드리지 못한 것 같아요.’라는 답장을 바랐는데, ‘계속’이라는 말은 나를 탓하는 기분이 들어서 작은 한숨을 내쉰 뒤에야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고 대화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애정을 준 지인에게도 서운함을 느꼈는데, 그는 내가 벌인 실수가 아닌 사건을 동료들 앞에서 잘못이라 짚었다. 꾸준히 갈 인연이라 생각해 차차 마음을 여는 중이었는데, 부푼 기대만큼이나 커다란 서운함이 나를 덮쳤다. 정말 좋아하는 인연이라면 그게 아니었노라고 하나씩 입장을 밝힐 텐데 그럴 힘이 없었다. 좋아하는 인연이 아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 입장을 헤아리지 않고 짐작해 사과를 바라는 사람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자존심을 너무 세워서 내가 내게 놀랐다. 왜 그랬는지 오래 고민한 뒤에야 내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관계를 쌓고 싶어서 조금만 맞지 않아도 피하는 습성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맹목적으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존재를 만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잠깐, 여기까지 글이 나오면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전제가 깔린 에세이의 법칙을 바탕으로 1) 그러나 실은 상대도 나의 지나가는 말에 상처를 받았으며 2) 나도 모르게 준 서운함을 바탕으로 자신을 돌아봤고 3) 완벽한 사람은 없음을 알아서 4) 흠잡을 데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완벽한 관계라는 허상을 좇지 않기 위해 5) 상대에게도 나의 예민함을 건드릴 수 있는 실수를 용인하기로 했다. 로 끝나면 완벽한 에세이가 될 텐데, 왜인지 오늘은 받은 서운함이 쌓이고 쌓여서 터져 버리기 일보 직전이라 그렇게 결말짓고 싶지 않다. 다들 너무하다! 어떤 이는 내게 무언가를 마음껏 하라고 해놓고 마음껏 하기 시작하니 너무 마음껏 하는 게 아니냐고 넌지시 물었다. 정말 너무하다!


이 글은 어떠한 깨달음이라거나 지혜라거나 교훈을 얻고 쓰는 게 아니라, 나와 닮은 사람에게 우리 서로 토닥이자고 보내는 편지에 가깝다.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자는 메시지를 받고 살았다. 물론 서운함을 받았다고 다른 이에게 도리어 서운함을 전달하자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애꿎은 화를 다른 곳에 풀지 않을 테니까. 스스로에게 왜 나는 예민함을 이렇게 타고났느냐는 가시 돋친 물음을 던지지 말자는 얘기다. 어떤 이의 지나가는 행동에서, 흘러가는 말투에서 서운함을 받았다는 뜻은 돌아보면 우리는 그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안길 수 있다는 걸 알아서 느낀 감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나는 서운함을 느낄 때마다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리려 애썼다. 그리고 아무리 상대가 나래도 저렇게 말하지 않겠다는 결론에 이르기 일쑤였다.


물론 나는 어느 날의 내가 오해를 받았을 때, 서운함을 받았을 때, 그게 아니라고, 당신의 말에서 조금 서운함을 느꼈다고 하나하나 설명할 힘이 생기기를 바란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음을 체득하고 넓은 마음을 가지기를 소원한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을 균열의 시작점을 찾아 당신과 사이를 지속하고 싶다는 용기 있는 발언을 담대하게 하고 싶다. 다만 지금은 그럴 힘이 없다. 그리고 그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서운함을 느끼는 나를 그만 미워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고 단정 짓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나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기대를 안는 게 잘못은 아니니까.


이 글이 남 탓 하자는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뜯어보면 그렇기도 하므로 강하게 부정하기 어렵다. 소중한 저녁 시간에 누군가 제목을 보고 한껏 기대하고 들어왔는데 남 탓 하자는 이상한 에세이에 ‘이게 뭐람!’ 하며 구독을 취소할 수도 있겠지만, 꼭 내보이고 싶다. 우리는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너무 소중하게 껴안고 자신의 잘못을 확대 해석해 반성점을 찾는 데 익숙하다. 일상에서 성찰을 많이 하는 사람이 성숙한 인격이라 배워왔기 때문에. 가끔은 남 탓해도 된다. 아니, 종종 남 탓해도 된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아량은 충분히 건강해지고 해도 된다. 좀 많이 그래도 된다!



영화 「소공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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