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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Dec 01. 2021

잡을 수 없는 범인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이 서점을 장악했을 때, 왜 굳이 무례한 사람에게까지 웃는 낯을 보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감정을 들여 웃음을 보여야 한다고? 그 방식을 이해하기 싫은 나는 신념에 맞게 악덕 상사와 아슬아슬한 결투를 벌였다. 블랙 기업에서 일할 적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때마다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하나하나 따지는 내게 상사는 "십 년 전만 해도 요아 씨 같은 사람은 없었어."라 회심의 일격을 보였다. 나는 내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얼굴을 꺼내 대꾸했다. "우와아, 십 년 전이면 제가 초등학생 때네요?"


  그런데 그건 싸울 에너지가 충분했을 때의 나고 이제 사람과의 갈등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더 이상 무례한 사람을 봐도 싸우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굳이 웃으며 대처하려고 하는 이유를 뒤늦게 이해했다. 단순히 당신과 나의 사이에서 생긴 문제라 하기에는 가운데 너무 많은 관계가 얽혔고 가장 중요한 건 싸움에 쏟을 풍요로운 감정이 부족하다. 푸석푸석하기 짝이 없다. 둥글게 둥글게 사는 쪽이 편하다는 말을 싫어하는 나로서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과연 사람은 매 순간을 변화하며 사는 존재인가 싶다. 왜 갑자기 베스트셀러 제목을 잡고 이러쿵저러쿵 고찰하냐면, 거래처로 만난 사람 때문이다.


  거래처로 만나게 된 상대는 신기한 사회생활 수법을 보이는 사람인데, 예의를 차리면서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공손한 어투로 의사를 묻지 않고 강요한달까. 처음에는 내가 삐뚤어져서 그렇게 이해하나 싶었는데 갈등이 생길수록 반말 비슷한 어투로 전화를 잡고 한숨까지 푹푹 쉬는 모양새를 보니 함께 수화기를 든 상대에 대한 존중은 고이 접어둔 게 틀림없다. 카톡을 쓸 때마다 지우고 쓰는 표시가 보인다면 내가 얼마나 화를 꾹꾹 누르며 주저하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다행히 그런 기능이 없어서 무사히 넘어갔다. 예전의 나였다면 뒷배경이고 기업이고 뭐고 두 눈에 불을 켜고 요목조목 짚으며 달려들었을 텐데, 보는 눈도 많고 나중에 다시 볼 수도 있고, 특히 여기 쏟을 감정이 아까워 친절하게 넘겼다. 그러나 연락할 때마다 무너지는 마음은 사무적인 답장처럼 사무적이게 넘길 수 없었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데 감사하다고 답하니 마음이 물었다. 쟤가 날 쓰러뜨린 범인인데, 왜 안 잡아?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체면을 번거롭게 차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어른이 되니 보는 눈이 너무 많아졌다.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지인에게 예전처럼 톡 쏘아붙일 수 없다. 상대는 트라우마인지 모르고 말했을 가능성을 모두 이해해야 해서다. 자존감을 쓰러뜨리는 범인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나는 한마디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쪽을 고른다. 물론 상대는 어느 날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알고 늦은 후회를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사실 다 내 바람이다. 나를 괴롭힌 범인은 누군가를 괴롭힌 범인과 결이 맞아 친하게 지낼 수 있으니 영영 외롭지 않을지 모른다. 또 나를 무너뜨렸다고 그가 괴로워지라는 저주는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혼자 흥! 흥! 하고 뒤를 돈다. 저주를 할 거면 확실하게 해버리지, 또 그 사람이 잘못되지는 않았으면 싶고…… 아무튼 이상한 어른이 되었다.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매번 찡찡거릴 수 없어서 나는 혼자 씩씩대다가 범인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나를 위한 방안을 찾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커피를 사자는 거다. 내기에서 진 것도 아니고 왜 갑자기 동료들에게 커피를 사냐 하면, 이유는 단순하다. 동료들은 기분이 좋아야 하니까. 나는 기분이 안 좋으니까. 그……으러니까 동료들은 기분이 좋아야 한다.


  기분은 태도로 보이지 않아야 하지만 정말 기분이 태도로 하나도 표현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화를 받으면 눈썹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조금 더 깊게 쉬어지는 것은 당연한 증상이 아니던가.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게 화를 방출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낌새를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동료는 내가 밖에서 통화를 마치고 온 뒤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는 걸 눈치챘을지 모른다. 오늘은 요아 씨를 건드리지 말아야지, 하고 어쩌면 나도 모르는 배려를 시작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세상에는 은근히 좋은 사람이 많으므로 나는 그 가능성을 모두 안고 동료들을 카페로 데려갔다. 고맙다는 동료들에게 진짜 웃음을 보였다. 가짜 웃음만 짓다가 진짜 웃음을 지으니 나를 위한 대책이 맞았다.


  요즘 따라 마음이 자꾸 와르르 무너지다 혼자 보수 공사를 하며 난리인데, 가장 아쉬운 건 때마다 범인을 놓친다는 거다. 오늘은 상대가 내 선을 가뿐히 밟는 모습을 보고 잠시 진지하게 싸우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했는데, 상상만으로 지친 나머지 이번에도 범인을 놓쳐버렸다. 나를 자책하다가 미래의 내가 텔레파시를 보낸 거라 위안한다. 야, 현요아, 괜히 싸웠다. 네가 졌음.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 얼마나 허탈할까. 게다가 말로 싸우는 일은 단어도 골라야 하고 와중에 트집 잡히지 않게 예의도 차려야 하고 말도 엄청 똑똑하게 증거를 가지고 와야 한다. 그런 걸 할 바에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애정이 담긴 말을 하는 게 낫다. 그러니까 난 범인을 놓친 게 아니라, 놓아주는 거다. 가라! 가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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