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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Dec 03. 2021

흐트러진 마음 위에서

할 일을 두고 마음이 잡히지 않을 때


  미래를 믿고 할 일을 벌여 놓았는데, 막상 미래의 내가 되니 마음이 온통 딴 곳을 향해 있어서 작은 일 하나도 쉽게 마치지 못한다. 나무 재질의 키보드를 사면 조금 신나게 글을 쓸 힘이 생길까, 새 스마트폰을 사면 메일을 조금 더 가뿐하게 열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닌텐도에 책상에 의자에 모니터에 마우스까지 산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장바구니를 비웠다. 마음이 잡히지 않으니 방이 더러워졌고 선물 받은 귤과 사과에는 곰팡이가 피었다. 마음이 잡히지 않으니 빨래하는 과정이 귀찮아 축축한 수건을 또 썼다. 노란 조명으로 가득한 카페에서 플랫화이트를 홀짝여도 그때만 즐겁고 다 마시면 마음이 또 잡히지 않았다. 그놈의 마음은 무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연달아하니 자신감이 낮아졌다. 강의로 묶은 수강생 분들의 에세이집 부수를 확인했는데 서른다섯 부였다. 분명 나는 서른 부를 주문한  같은데, 영수증에 서른다섯 부라 적힌 거면 내가 잘못 주문한  틀림없다. 실수로 추가된 다섯 부는 사비로 해결해야 하나, 이대로 가다간 세금계산서에 견적서까지 꼬일 텐데 매니저님에게 미안해서 어쩌나 식은땀이 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인쇄 업체에 전화를 했더니 매니저님이 내게 말하지 않고 다섯 부를 추가 주문한 거였다.  정도로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마칠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니  하나도 꼼꼼하게 처리할  없다.


  마음이 왜 이리 잡히지 않는지 오래 고민했는데, 존재론적인 생각이 많아져서는 아니고, 그저 스마트폰을 끄고 태국 어딘가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강렬한데 도통 그럴 수 없으니 답답해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왔다. 세상을 사는 동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 비슷한 마음일 것 같다. 새로운 변이로 세상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또 인원 제한이 생겼고 국내 입국을 할 때에는 모두 열흘 간의 자가 격리를 거쳐야 한다. 어제는 뉴스를 봤는데 폭력적인 사건을 다룬 기사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답답한 데다 머리까지 아파왔다. 스마트폰을 끄고 쉬고 싶어도 직장을 다니고 일을 벌여 놓은 상태에서는 내 몸 하나 쉬겠다고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무작정 도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고시원을 벗어난지는 오 년 가까이 되었는데 가치관은 여전히 고시원 한편에 머물러 있다. 아무리 피곤해도 돈을 주면 우선 시작하고 보자는 잘못된 생각이 스스로를 향한 신뢰가 바닥을 치게끔 했다. 과거의 나를 탓하기에는 자신감에 자존감마저 낮아질 것 같아 그만뒀다. 대신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마음을 잡을 수 있냐는 물음을 했는데 연말이라 그런 게 아니냐는 답변이 왔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답변이지만 연초까지 기다리려면 한 달이나 남았으므로 그때까지 발 뻗고 기다릴 수는 없어서 다시 쇼핑몰을 들락날락거리다 왜 무언가를 정돈하고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지녔는지부터 생각하자며 마음의 흐름을 따라갔다. 공부하기 전에 본격적으로 책상 정리를 하는 사람이 많듯 나도 마음이 정리되면 그때부터 할 일을 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마음 청소는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인간관계는 혼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생각할수록 더 꼬이기만 한다.


  사람과의 갈등은 없고, 과거에 내가 했던 말은 후회되지 않고, 미래의 나를 신뢰감 있게 쳐다보면서, 날씨도 어느 정도 따뜻하고, 몸도 한결 가볍고, 옷장과 냉장고도 깨끗하고, 마음도 잔잔한 때에 일을 시작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시기는 일 년에 몇 번 올까 말까 한 날이어서 내가 원하는 날 일을 시작하기에는 글렀다. 잔뜩 쌓인 옷더미를 뒤로 둔 채 마감에 맞춰 서류를 보내야 할 때가, 냉장고에 치우지 못한 배달음식이 있는데 아르바이트를 가야 할 때가 더 많다. 그러니 어지러운 책상에서 딱 노트북을 놓을 만큼의 자리만, 복잡한 사진첩에서 필요한 사진을 골라낼 만큼만의 정리로 일을 시작하는 게 낫다.


  어디선가 사람은 잠을 자고 꿈을 꾼 뒤 적당한 양의 과거를 잊으며 다시 태어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책상은 과거를 잊지 않고 흔적을 그대로 이어나가지만, 마음도 여전히 상처가 움푹 파인 채 나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나는 오늘 다시 태어난 것처럼 흐트러진 마음과 어지러운 책상을 그대로 두고 할 일을 한다. 시작하려는 거창한 각오 없이 노트북을 둘 만큼만 동그랗게 공간을 만든 뒤 그저 한다. 이 글은 그렇게 각오 없이 쓰였다. 마침표를 찍고 문장이 끝나는 걸 보니 어떤 일은 대단한 정리 없이도 나쁘지 않게 마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래도 곰팡이 슨 과일은 좀 내다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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