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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Feb 07. 2022

산다는 특별한 일


번번이 뿌리 염색을 하기 귀찮아 진갈색으로 덮어버리자며 미용실을 찾았다. 마스크를 쓰고 가만히 앉아야 하니 미용실도 텅텅 빌 줄 알았는데 웬걸, 예약을 받아주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결심이 서면 그날 해버려야 마음이 시원한 나는 어쩔 수 없이 평소라면 가지 않을 평점 없는 미용실에 들어섰다. 사장님은 어중간한 시간에 손님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셨는지 망연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일어나셨다. 염색하려고요, 라 말하려 했는데 따라 깜짝 놀란 나는 뿌리 염색이 귀찮아서요, 라 운을 뗐다. 경력이 제법 있어 보이시는 사장님은 한 번에 알아들으시고 "밝은 머리에서 갑자기 톤다운하면 어색할 텐데!" 하며 웃으셨다. 나는 기분 좋게 코트를 벗었다.


주민 분이 애용하시는 미용실이라 그런지 사장님은 터프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막 태어난 손녀의 나이부터 아들이 모태솔로라는 사실을 터놓으시기까지 했다. 미용실이나 택시에서의 스몰 토크는 어려워하는 내게 사장님은 사람은 말을 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투로 대화를 리드하셨고, 나의 직업이나 나이를 묻지 않고 최근 미용실에서 벌어졌던 소소한 일화와 머리에 관한 사장님의 신념으로 대화를 이어나가셨다. 덕분에 동네 어른을 인터뷰하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얘기에 응했다. 잠깐 본 사이지만 사장님은 내가 원하는 부모의 상을 가지고 계셨다. 안정적이지만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공무원 직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는 딸에게 "그럼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신명 나게 여행이나 다녀오렴!"이라고 제안하는 호쾌함과 "엄마, 나는 엄마처럼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없어."라고 툴툴대는 아들에게 "그럼,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라고 말하는 당당함.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사장님의 자녀 분들이 무척 부러워졌다.


염색약을 다 바르자 대화 주제는 어느새 따님 분의 결혼식에 다다랐는데, 여덟 시간을 자야 몸에 탈이 없다는 사장님은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잠을 못 이뤄 한의원을 들락날락거리셨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기분 좋은 일에 왜 잠을 못 자느냐고 웃으셨고 결혼식이 끝나면 푹 자게 될지 모르겠다고 덧붙이셨다. 사장님은 정말로 결혼식이 끝난 뒤에야 미룬 잠을 몰아 주무셨다고 했다. 라텍스 장갑을 벗으시며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정말 좋은 일인데 못 잤다니까." 그때 왜 우리 엄마가 떠올랐을까. 도통 잠을 못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아서였다. 엄마는 다섯 알 가까이 되는 수면제 없이 잠을 못 잔다. 동생이 떠난 지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꼬박꼬박 수면제를 찾는다. 수면제만 자그마치 일 년을 먹었는데 알약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기만 한다.


사장님의 명랑한 목소리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는데 속으로는 손 쓸 수 없이 그런 마음이 지나갔다. 와, 누구는 좋겠네. 기쁜 일을 앞둬서 설레고 걱정되어 잠을 못 자다니. 우리 엄마는 동생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서 잠에 못 드는데. 정말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고 해놓고서 사장님에게서 나오는 화목한 가정의 오로라에 숨은 가시가 솟았다. 다행히 자기 연민을 두르지 말자는 원고를 쓰는 중인 터라 이 감정이 잘못되었다는 판단도 빠르게 나왔다. 아픈 나는 말을 뱉고 싶은 충동에 잠시 이끌렸다. 그러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게 만들고 싶어서 우리 엄마도 잠을 못 주무세요, 동생이 세상을 떠났거든요, 라는 말을 뱉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그건 나는 아픈데 너는 행복할 수 없다며 상대의 손을 잡고 아래로, 더 먼 아래로 끌어당기는 악의적인 행동이었다. 입을 닫고 눈웃음을 보였다. 언젠가 행복에 설레 잠을 못 이룰 우리 엄마를 상상했다.


브런치에 올린 에세이를 읽고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작가님을 만난 적이 있다. 기뻤지만 한편으로 유명하신 작가님이 왜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첫 만남에 도를 넘는 솔직함을 내보였다. 저는 쉴 때도 별 것 안 하고요. 앞으로 뭐가 될지도 모르겠고요. 곧 절필할 거예요, 라고 얘기했다. 당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나는 당신이 기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 증명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책을 읽고 무슨 내용인지 기억을 못 하고 글을 써놓고 뭐라고 썼는지 요약을 못 하는 사람이므로. 실제 내 모습은 엉망이라고 얘기해야만 상대를 속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분위기를 망치게 하려는 악마의 날갯짓을 무시하고 사장님의 행복에 기쁘게 웃는 나를 보며, 참으로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불행을 꺼내고 싶지만 꾹 참고 바라는 미래를 그리며 상대의 기쁨을 축하하는 사람이라니,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거울 앞에서 염색약을 치덕치덕 바른 채 앉아 있었다.


다음 주면 나를 궁금해하시는 독자 님들을 만난다. 책이 출간되면 나를 궁금해하시는 기자 분과 인터뷰를 할 수도 있다. 그날을 상상하면 나는 말문이 자주 막혔다.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공부해서 기른 것뿐이지, 생각도 심심하고 가치관도 흐릿한 사람이라 상대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입을 열지 않고 들어주기만 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감정이 들자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아픈 구석이 있지만 즐거운 구석도 꺼내어 보이는 다양한 면을 지닌 사람이다. 때때로 세상을 저물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이지만 그럼에도 꼬박꼬박 약을 먹고 살아내는 사람이다. 살아내는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 읊조리자 세상이 조금, 아주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느 면에서는 부족하더라도 사는 사람으로서 어떤 인터뷰든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새까매진 머리로 미용실을 나오는 길, 흔하디 흔한 인사에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안녕,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안녕히 계세요. 저도 안녕한 엄마를 데리고 올게요. 엄마가 파마를 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저마다의 기쁨과 슬픔을 안고, 산다는 특별한 일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말. 사는 일은 매일 무탈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기쁜 사장님의 눈웃음이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제대로 못 자는 날이면 몸이 뻐근해 일하기 어려우시다는 사장님이 꼬박꼬박 깊은 잠을 주무시기를 바라면서. 안녕, 안녕히 계세요! 오늘 제 글을 읽으러 와주신 독자님들께도 전하는 씩씩한 인사, 산다는 특별한 일을 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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