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하는 사람이 멕시코로 오랜 여행을 떠났다. 물론 마음이 바뀌면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오겠지만, 실은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이주와 같은 여행이라 기대를 접는다. 멕시코로 떠나겠다는 선언을 들은 순간부터 출국하던 날까지 나는 그가 멕시코로 떠난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고, 믿지 않으려 했고, 그에게서 잘 도착했다며 몇 건의 파란 사진을 받았을 때야 실감이 된 나는 그제야 참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시는 붙잡을 수 없다는 떠난 기회와 거리라는 이유로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사이라는 사실이 슬퍼서 얼마간은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참 이기적이다. 내가 사람들을 떠나는 건 개의치 않아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떠나는 건 아파하고 아쉬워하고 가끔은 분노해 엄한 사람들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다. 마주치는 배경과 둘러싼 상황이 달라져 조금씩 변한 성격이 나와 맞지 않아 몇 명의 지인을 보냈고, 한 번 정도는 봐줄 만한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결국에는 용납하지 못하고 몇 명의 친구에게서 등을 돌렸다. 내가 사람들을 보낸 만큼 사람들도 나를 보내버렸는데, 나를 제일 좋아한다던 독자님은 뜸한 내 활동 때문인지 다른 작가님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고 서울에 오면 누구보다도 먼저 보자던 친구는 서울에 왔다는 내 메시지에 다음에 보자는 답장 하나만을 남겨두고 연락이 끊겼다. 나야말로 좋아하는 작가가 매번 바뀌고 계절마다 애정이 가는 친구가 달라지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순리인데, 왜 분기마다 연락이 뜸해지는 사람들을 보면 슬프다 못해 급기야 버림받았다는 기분이 드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백 오십 명의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물론 평균이고, 어떤 사람은 더 적고 어떤 사람은 더 많을 테지만 나는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이백 오십 명이 누구일지 궁금해했다. 그 이백 오십 명이 바뀌고 사라지고 다시 생긴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콩자루에 콩이 하나씩 들어가듯 바뀌지 않는 불변의 사람들이 나의 관계를 촘촘히 채우리라 믿었다.
이제는 안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인연이 내 장례식에 찾아와 줄 사람이 될 수도,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막역한 사이가 한순간에 틀어져 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도 알지 못하고 그만의 삶을 살아나갈 것이라는 걸 기억한다. 틀어진 사이는 제대로 방향을 맞춰 다시금 회복하게 만들고 내가 싫어 뒤를 도려는 사람에게는 왜 그런지 물어보고 반성한 뒤 모습을 고쳐야겠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단번에 몇 십 명씩 나를 떠나는 일이 아니고서야 나는 한 명 한 명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널 만나 즐겁고 반가웠다고 속으로 부치지 못할 편지를 보낸다.
떠날 때가 된 인연들, 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마무리되면 좋으련만 모든 인연은 그리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네 애정이 큰지 내 애정이 큰지 살피다가 실망감으로 누군가를 떠나보낼 수도, 쟤랑 친하니 나랑 친하니, 나는 저 사람이 싫은데 어떻게 저 사람과 여행을 떠날 수 있니, 같은 서운함을 잘못 표하다가 끊어질 수도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경계 안에 사람들을 들여놓지 않는다. 설령 애인이더라도, 막내더라도. 버림받은 채 속상해할 내 미래가 무서워 몸을 돌돌 마는 모습이 꼭 고슴도치 같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내밀한 경계에 들이지 않음으로써 드는 편안함이 있다. 그런 단단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