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로막게 만드는 말은 여럿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걸 해서 뭐 해"다. 의미를 잃어버린, 혹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자조적인 물음이다. 글을 써서 뭐 해, 책을 읽으면 뭐 하나, 직장을 다니면 뭐 하나, 일을 해서 내게 좋은 게 뭔가, 일 년에 두 어번은 이런 생각이 들이닥치는데 이번에도 그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결국 살면서 가장 커다란 규모의 회사에 들어간 기쁨을 길게 누리지 못하고 직장을 나오기로 다짐했다.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이 더는 나오지 않는다는 불안감도 당연히 있지만, 족쇄처럼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한 곳에서만 묶인 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더 크다. 애초에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을 누군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써도, 구상해 놓은 장편 동화를 드디어 쓸 시간이 확보되었다는 것도, 괜한 인간관계를 맺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무례한 언어를 받아 들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도 이제 더는 하지 않아도 된다.
숲이 아닌 나무를 바라보기 위해 직장을 다니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미래에 나는 돈을 벌 수 있을까, 기후 위기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정말 없을까, 이런 커다란 물음표가 하나씩 따라 나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다 살아버린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당장의 업무와 일과를 해치우다 보면 그런 허황된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바쁘게 움직였는데 바쁘면 바쁠수록 헛헛해졌다. 직장을 다니고, 성과를 받아 진급을 하고, 연봉을 올려 집과 차를 산 뒤 아이를 키우는 게 일생의 기쁨일까. 아무것도 실패하거나 낙오하지 않고 오래전 누군가들이 정해준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게 잘 살았다는 증표인 걸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왕 다니는 회사라면 더 즐겁게 다니고 싶었고, 더 재밌게 추억을 쌓고 싶었고, 발전하고 싶었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과 중요한 일을 나누지 못하고 모든 일을 중요하게 여겨 급급하게 일을 쳐내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런 내게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느냐고 질문할 텐데, 나는 아직 타협하고 싶지 않다. 청소년 소설을 내보낸 김에 돈이 되지 않더라도 장편 소설을 쓰고 싶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서점은 부도가 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속 어딘가 빚처럼 주저앉은 나의 열망을 깨끗하게 쓸고 닦아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사람들이 원하는 명예와 돈을 좇지 않고 조금 가난하더라도, 조금 많이 초라하더라도 아프지 않게 살고 싶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 역시 많은 자문자답이 필요했다.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 바로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광고가 붙는 것도 아니어서 브런치에 글을 올릴 바에는 돈이 되는 웹소설이나 시나리오, 원고료가 나오는 동화나 소설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글을 쓰고 싶다는 초심을 잃어버린 마음에서 기인한 생각이었다. 올해의 나는 효율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 목표다. 이걸 하면 얼마를 벌 수 있다느니, 최저의 시간을 투자해 최고의 수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도처에 널려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생활비가 부족하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몰상식하고 고된 사람을 만나면 얼른 피해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렇게 정해진 길을 따르지 않고 트렌드를 좇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길을 걸어 나가고 싶다.
이걸 해서 뭘 하나 싶은 마음이 다시금 솟을 때면, 그 물음을 과감히 마음에게 물어보려 한다. 너 하고 싶니, 하고 싶지 않니, 하고 싶지 않다는 답이 들리면 과감히 그만두고,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면 알겠다며 토닥이고 스스로를 나아가게 해보려 하려 한다. 요즘따라 더더욱 직책과 직급과 소속으로 나를 설명하는 일은 지쳤다는 답이 들린다. 그건 진부하고 재미없다는 마음의 말이 자꾸만 따라 나온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두려움과 불안감이 오히려 즐겁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은 어떻게든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