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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l 27. 2024

글 안 쓰는 작가


9. 아홉 번째 손톱



애인 '건'과 나는 독자 사이였다. 그는 내가 에세이를 쓰기 전, 스타트업에서 관련 아티클을 올릴 때부터 팬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브런치로 창구를 옮긴 후 꾸준히 에세이를 쓸 때도 빠짐없이 댓글을 다는 열렬한 팬이었다. 그와 나의 매개체는 글이었으니 나는 건을 만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찔렸다. 직장에 다니면 자연스레 글을 멀리 하게 되니 그가 은근 내게 실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은 우려가 들었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는 책이 돈이 되지 않는 것 같다며 동력을 번번이 잃어버리는 내 모습에 내색은 안 해도 서운해할 것 같았다.


물론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중 하나는, 프로는 글이 쓰이지 않아도 우선 쓰고 본다는 것인데 나는 천천히 글감이 차오르면 그 이야기를 밖으로 내보이는 사람이라 그가 동경하는 내 모습을 더는 보여주지 못할 것 같았다. 글을 자주 쓰지 않으니 주요 문예지에 소설을 올리겠다는 꿈 마저 서서히 흩어졌다. 올해에 되지 않으면 내년에 해도 되지 않냐는 간절하지 않은 마음을 애써 무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솔직한 마음을 밝힐 수는 없었다. 건은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였다.


고등학생 시절,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한 번도 어깨 위로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당시 애인은 내 긴 머리를 보고 반했다고 말했고, 그러니 비단결 같은 생머리를 유지해야 한다며 꾸준히 몰래 미용실에 가서 매직을 했다. 그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생머리인 줄 알았겠지만, 아니었다. 깔끔하게 단발을 하고 싶었지만, 때로는 거추장스러운 긴 머리를 댕강 잘라버리고 싶었지만 참은 건 애인이 나를 보는 첫인상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쓸데없는 이유에서였다. 그와 헤어지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용실에 들러 귀까지 오는 똑단발을 하는 일이었다.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이렇게 쉬운 일을 몇 년 동안 차일피일 미룬 내 모습이 스스로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서였다. 이후로는 나를 지키자며, 누군가 나의 첫인상을 보고 그 인상을 깊이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그 인상을 힘들이면서까지 굳이 지킬 필요 없다는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다시 건을 만나게 되자 고등학생 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글은 꾸준히 쓰면 늘고, 늘면 내가 바라던 작가의 삶에 어쩌면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니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책을 집필하는 데 온 노력을 쏟지 않고 온라인 플랫폼에 올리는 나는 독자와의 소통이 중요한데 그 소통이 차차 사라지는 기분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전처럼 숙명적으로 에세이를 쓰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이전 글은 조회수가 내 구독자의 두 배를 넘겼지만 좀처럼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이전에는 분명 댓글이 많이 달렸던 것 같은데, 나 역시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며 노력을 들여 댓글을 썼던 것 같은데 사람과의 소통에 지친 나머지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소통이 빈번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책 보다 침대에 늘어져 쉬는 걸 좋아하는 게으름 때문에 이전처럼 글이 활발히 쓰이지 않는다.


모르는 지역에 가면 꼭 근처에 독립 서점이 있는 지를 살피고, 서점에서 책 한 권이라도 안고 나오며 책을 읽으면서 여행을 즐기기 바빴던 나는 이제 없다. 상념과 걱정이 가득한 나머지 아무것도 보고 읽지 않으며 커피를 마시는 게 마음이 편하다. 소통을 하지 않으면서 소통을 바라고, 책을 읽지 않으면서 글이 잘 쓰이기를 원하고, 하루에 한 문장도 쓰지 않으면서 내 책이 뜬금없이 역주행을 해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소망하는 내 모습이 웃기고 슬프다.


새로운 지역에 가면 꼭 독립 서점을 찾았던 일 년 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건은 낯선 곳에 가면 이렇게 묻는다.


"독립 책방 찾아볼까?"


그러면 나는 고개를 젓는다.


"책 읽을 힘 없어."


책을 읽어야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책이 다시 읽힌다는 선순환을 알면서 한 번 책을 멀리하게 되니 금세 멀어졌다. 때때로 오는 기고에서 내 이름 뒤에 붙여진 작가라는 호칭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글과 책을 멀리하는데 작가라는 상태를 유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답답함을 이길 수 없던 나는 건에게 결국 실토했다. 더는 예전과 같은 집중력과 몰입력을 가지고 글을 쓰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이런 나도 좋아해 줄 수 있냐는 속마음이 덧붙여졌다.


건이 답했다. 당연하다고. 사람은 언제나 변하고, 이렇게 살다가도 저렇게 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비슷한 대답을 듣고서야 한결 마음이 놓였다. 글을 멀리하게 되는 날이 있으면 글을 가까이하게 되는 날도 있을 테고, 독서를 취미로 자신 있게 말할 때가 있다면 지금은 독서를 그다지 하지 않고 있다는 내 모습을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 권을 앉은자리에서 전부 해치우겠다는 다짐을 조금 버리고 한 챕터라도 읽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앞으로 글을 쓰지 않아도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답을 듣고서야 이런 다짐을 한 게 약간 부끄럽기는 한데, 고등학생 때의 애인에게 "머리 잘라도 돼? 그래도 나를 좋아해 줄 거야?"라고 물어본 것 같기는 한데 어차피 물은 쏟아졌고 바라던 답이 나왔으니 됐다.


하루에 글 한 편을 쓰는 때가 있었다면, 지금은 솔직히 일주일에 한 편을 쓰는 것도 벅차다. 벅찬 마음이 글에 슬며시 묻어나는 것인지 이전과 다른 무심한 반응에 매번 기가 죽는데,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즐겨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지 글로 일확천금을 번다거나 백 명의 진짜 팬을 만들기 위해 쓰기 시작한 건 아니니까 기대를 내려두기로 한다. 건이 이런 나를 꾸준히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그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건 글을 쓰지 않는 나를 나로 받아들이는 작업이다. 글이 상상처럼 쓰이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급기야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스스로에게 하는 일은 그만두고 싶다. 나를 지키면서, 건강을 챙기면서, 여유롭게 글을 쓰는 것도 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절박하게, 고통 속에서, 글을 쓰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던 호소가 없는 나도 나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게으르게 글을 쓸 바에야 절필을 하겠다는 독한 마음을 놓아두고 천천히 힘이 차오르기만을 기다리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다. 그리고 그건 이제껏 몰랐던 방법이기도 하다.


후일담

이 주 뒤, 휴가를 떠난다. 휴양지는 집이다. 시력 교정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을 하고 나면 당분간 전자 기기를 멀리해야 하니 노트북 화면을 빤히 바라보며 글을 쓰는 건 사치다. 예전 같으면 회복 기간인 한 달 정도를 글을 쓰지 않고 날리는 게 아쉽다고 생각할 텐데, 지금은 도리어 반갑다. 고생했던 눈을 편하게 쉬게 하고 싶다. 그저 잠의 세계에만 몸을 맡기고 싶다. 이런 때도 있으면 저런 때도 있으니까, 우선 수술이나 잘 되기를 바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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