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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ug 01. 2024

내가 고르는 우정


10. 열 번째 손톱



꼬박 십 년지기였다. 근처에 살면서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걱정도 내려두고, 만취한 채 각자의 집에 바래다주고, 즐거운 일과 슬픈 일 모두 함께 나누었다. 그런 친구가 한순간에 나를 차단하니 한동안은 정신줄을 붙잡고 살기 어려웠다. 회사를 나가면 일을 하느라 바빠서 잠시 잊으니 회사는 어떻게 나갔는데, 중요한 건 더는 친구들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솟는다는 거였다. 그 친구를 알고 나를 아는 중간에 걸쳐진 친구들 뿐만 아니라, 그 아이와는 상관없는 다른 친구들마저 적극적으로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선가 서른에 친구 사이가 한 번 크게 정리된다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인 듯했다. 친구와 연락하기보다 집에서 애인과 예능을 보는 일이, 친구들과 두루두루 만나 실컷 떠들기보다 고요한 카페에서 홀로 책을 읽는 게 더 충만했다. 단짝이라고 여겼던 오랜 친구와 연을 끊어서 더욱 커다란 타격감이 왔다.


그러던 중, 예능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홍진경의 말이 들렸다. 힘들 때는 친한 언니의 집을 무작정 찾아가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브이로그를 찍으며 재밌게 논다는 이야기에서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촘촘하게 잘 구성된 인간관계가 사람의 행복을 담당하는 하나의 척도라면, 그 척도는 무너진 게 뻔했다. 예전의 나라면 중요한 시험을 끝낸 후배에게 고생했다며 맛있는 밥을 사주고, 각자의 일을 하느라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을 모아 약속 장소를 잡고 분위기를 띄운다. 헤어질 시점에는 반갑게 만났다는 뜻으로 화장이 다 지워진 얼굴로 인증 사진을 찍는다. 지금의 나는 친구들의 생일도 잘 챙기지 않는다. 연락을 하면 이른 시일 내에 만나자는 말이 나올 테고, 그러면 나는 우정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약속 장소에 나가야 한다. 그건 나를 만나는 친구에게도 실례인 듯했다. 진정 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우정을 지속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나가는 일이니까.


"홍진경 얘기를 들으니까 나도 얼른 친구를 만나야 할 것 같아."


기껏 서울에 올라왔는데, 몇 발자국만 걸으면 친구를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 내가 한심하다고 했다. 죄책감이 든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십 년지기와 싸워서 연을 끊은 사건이 크게 작용한다고 했다. 애인 '건'이 나를 다독였다.


"지금부터 새로운 관계에 집중하면, 우리가 마흔이 되었을 때 벌써 십 년지기야. 쉰이 되었을 때는 무려 이십 년 지기고. 지난 관계가 왜 헝클어졌는지 고민하기보다 지금 새롭게 만나는 관계에 집중하면 돼."


작가 활동을 시작하고 난 뒤로 정기적으로 만나는 작가님들이 생겼고, 새로운 직장에서는 새로운 동료를 만났다. 꼬박꼬박 평일의 점심을 함께 하고 가끔 퇴근길도 같이 걷는 동료들이다. 그런 동료와 작가님을, 우연히 만나 끈끈한 관계로 이어진 상담 선생님을 두고 대학교 친구와 싸웠다고, 고등학교 친구와 연락이 끊겨버렸다고 그 원인을 나로 잡는 건 시간과 감정을 헛되이 쏟는 일이었다. 그보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던지는 게 훨씬 나았다. 애정하는 사람이더라도 안부를 나누고 만날 힘이 없다면 훗날을 기약하면 됐다. 우정이 끊겼다고, 그러니 연락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한탄을 하기에는 일렀다.


여태까지 이은 관계들을 헤아리느라 미간을 조금 찌푸리는 나를 두고 건이 덧붙였다.


"학창 시절에는 같은 반으로 배정돼서, 같은 학교로 배정돼서 억지로 시간을 같이 하다 보니까 선택권이 없었잖아. 물론 그 많은 친구들 중에서도 친구를 고르는 일은 선택의 영역이었지만. 서른이 되면 집단이 없는 상태에서 우정을 쌓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기한 것 같아. 나는 대학교 친구가 평생 친구라고,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아. 소울 메이트는 예순에도 만날 수 있는 걸. 정여울 작가님을 만난 어느 교수님도 그러셨어."


정여울 작가님이 예순의 교수님을 소울 메이트로 만났듯, 나도 마흔이나 쉰에 새로운 관계와 소울메이트가 될 지 몰랐다. 인생은 아직 길고, 아직 모두 살아보지 않았다. 모임 없이, 집단 없이 내가 스스로 우정을 고를 수 있는 시기가 왔다. 적극적으로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글쓰기 워크숍을 들으며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인연을 시작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다. 놓친 지난 관계를, 나를 떠난 지난 사이를 헤아리며 앓기보다 앞을 바라보는 게 마음이 훨씬 편하다. 곰곰 내가 앞으로 만날 사이를 돌아본다. 친구를 백 명 만드는 것보다 속마음을 걱정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한 명이 더 만나기 어렵다. 지금 내가 지닌 관계가 나의 인생을 대변하는 모든 관계가 아님을 기억한다.


후일담

친구에게 연락을 잘 안 하는, 뜸한 나를 더는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만났을 때 똑같은 추억 얘기만 하고 헤어지는 관계를 힘들여 붙잡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여유는 나는 게 아니라 내는 것'이라는 말을 귀담아 두고 있어서 친구를 만날 만한 여유를 내지 않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제는 마음의 여유와 몸의 여유가 서서히 차올라 친구를 만나도 기쁘게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릴 예정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된 나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계모임에 나가고, 노인복지회관에서 같이 뜨개질을 하며 친해질 다른 할머니들을 그려보면 헛헛함이 빠르게 흩어진다. 각자의 삶을 분투하며 살다가 복지회관에서 만날 우리를 기다린다.


⟪언젠가 손톱을 물어뜯지 않겠지⟫ 연재는 여기서 잠시 멈춥니다. 다시 일상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나 벌어지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에세이를 쓸게요. 반갑게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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