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에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이다. ···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다 그러할 것이다. _‘밥’에 대한 단상
당당하게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니 머리를 띵하게 때렸다.
도발적으로 시작한다. 공감한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도발적이다. 공감한다. 격하게 공감한다. 주저앉아 울고 싶다.)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정말,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 번, 아니 두 번 만이라면 이리 ‘진저리’ 쳐지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라는 내 배의 아쉬움. 그런데도 밥만 먹고살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밥벌이가 더 ‘진저리’ 난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밥을 벌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목구멍에 넘기기는 더욱 어렵다. 모래알을 씹듯이 질겅질겅 넘겨야 한다. 그래야 ‘다시 거리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이 없는 것이다.
(그걸 나보고 물어보면 어쩌란 말인가. 책값을 돌려주나. 무슨 답을 구하려고 책을 샀다면 몇 천 원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란 내가 도둑놈이다. 던진 화두를 받는 것만으로도 돈 값을 충분하리니.)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나 또한 밥벌이의 지겨움을 알고 있으면서 그의 글에서 무엇을 찾으려는가.)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 글에는 결론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근로를 신성하다고 우겨대면서 자꾸만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라고 몰아 대는 이 근로감독관들의 세계를 증오한다.
(그리 좋으면 네가 해라. 어찌 친구의 장동건 말투가 떠오른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벌써 마음의 친구가 되었다. 그 지겨움을 공유하였으니. 그러나 ‘밥벌이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꿈이 무엇이던가? 언제 우리에게도 꿈이란 게 있었더냐.)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아무 도리 없’이 거리로 내몰리고 또다시 밥을 넘기고 또다시 떠 밀려 나가라는 말인가. ‘아무 도리 없’으니 밥벌이를 위해 거리로 나가야지. ‘무슨 도리 있겠는가.’ )
‘밥벌이의 지겨움’은 ‘아무 도리 없다’라고 맺는다.
맞는 말이지만 허무하고 허전하다.
그냥 푸념하는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조롱하는가.
‘꾸역꾸역 밥을 벌자’라고 외친다. ‘도리 없다.’
김훈은 분노하고 슬퍼한다. 나도 슬퍼하며 분노한다.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렸고,
세상의 더러움을 말할 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
덧_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생각의 나무, 2003년 6월 초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