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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Sep 01. 2021

악惡은 세상世上을 미혹迷惑시킨다

악령은 이제 사로잡혔다. 영원히 자신의 악 속에 갇혔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_프리드리히 니체



악惡은 소리 없이 자라 어느 순간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世上을 미혹迷惑시킨다. 한번 폭주한 악은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오늘의 악은 더 이상 평범한 악이 아니다. 선과 악의 경계를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거나 도덕적 양심을 외면하는 그런 의지적인 악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악은 선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 양심 자체가 이익을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다.


아렌트는 악도 진보한다는 걸 알았다. 종교적 악을 평범한 악으로 대체했고 그 평범한 악을 다시 소크라테스의 양심 도덕론으로 방어했다. 여전히 유대교적인 그러한 양심론이 간파하지 못했던 또 다른 악이 그때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 그건 평범한 악과 도덕적 양심을 넘어서는 새로운 악, 즉 부드러운 악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악도 태어나고 자라고 성숙하고 늙고 죽는다. 악의 태어남은 여러 외형을 가지지만 거짓과 뻔뻔스러움과 천박한 허영은 그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악은 스스로 진보한다. 평범한 악과 도덕적 양심을 넘어서는 새로운 악, 부드러운 악이다. 선과 악의 경계를 잘 아는 합리주의자이다. 너무도 합리적이어서 합리성 · 비합리성, 선 · 악의 경계선도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다. 모순과 갈등은 양심의 갈등을 일으키는 대신에 그들의 내면에서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용해될 수 있다. 오늘의 악은 더 이상 평범한 악이 아니다. 선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 양심 자체가 이익에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다.  


힘이 없는 악은 의미가 없다. 악이 악다워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권력이든 물리적인 폭력이든 재력이든, 지식이나 기술 혹은 특수한 재능이든 상대를 강제하거나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녀야만 악답게 자랄 수가 있다.


오늘의 악은 더 이상 평범한 악이 아니다. 선과 악의 경계를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거나 도덕적 양심을 외면하는 그런 의지적인 악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악은 선악의 경계가 지워진 악, 양심 자체가 이익을 따라서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부드러운 악이다. 여자에 대한 사랑과 폭력 사이를 부드럽게 넘나드는 남자들, 돈과 복음 사이를 유연하게 건너 다니는 자본주의 사제들, 약자들을 가엾어하면서도 내 동네로 들어오는 혐오시설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이비 시민들, 공적 권력과 사적 축재 사이를 넘나들었던 전임 대통령 등등의 사례들이 이 시대의 새로운 악, 유연하고 부드러운 악의 전형적인 얼굴이다.


힘을 가지고 자라난 악은 또 나름의 성숙을 지향한다. 악이 공격성을 드러내면 사회의 대응도 적극적이 되어 분쇄 혹은 절멸의 의지로 나타나지만 그 같은 사회의 대응을 견뎌낸 악은 보다 강한 내성을 얻어 더욱 굳건히 자라 가며 분식할 탈을 세련시킨다.


여전히 상식처럼 회자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이 부드러운 악의 변신 앞에서 이미 시효를 다했거나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듯 악들도 빠르게 변한다. 사유는 세상의 속도보다 더 빨라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세상 안에 팽배한 악의 세력과 그나마 겨우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악도 성숙하고 지혜로워지면 권위를 가진다. 악령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쓰고 있는 탈이 좀 더 화려해지고 세련되었을 뿐. 악의 자취가 더욱 교묘하게 감춰지고 있을 뿐. 어떤 악은 제 키를 가리고도 남을 면죄부를 찾아내 완숙해진다. 완숙한 악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면 파괴되지도 절멸되지도 않는다.


완숙할 대로 완숙하고 번성할 대로 번성해 이제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게 된 악과 대면할 때 우리는 그 무력감 혹은 절망감을 일순간 축원의 형태로 바꾸어 내뱉는다. 속된 말로 “잘 먹고 잘살아라” 쯤이 되는 그 축원은, 그러나 실은 가장 가혹한 저주이다. 너는 네 악 속에서 영원히 번성해라, 구원받을 수 없는 네 악 속에서 영원히 갇혀 있어라.


그 절망감과 무력감은 마침내 그의 악에 대한 엉뚱한 축원으로 변해 갔다. 이 악을 지울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에 없다. 그의 죄가 탕감받을 수 있는 벌은 없다. 있다면 오직 하나 그가 자신의 악 속에서 영원히 번성하는 것이다. 자신의 악 속에 영원히 갇히는 일이다. 너는 너의 악 속에서 영원하라 ….


악령은 이제 사로잡혔다. 영원히 자신의 악 속에 갇혔다.



덧_

이문열, 〈사로잡힌 악령〉

김진영(철학아카데미 대표), 〈부드러운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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